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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의 감사 (단 06: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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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사람은 같은 점이 많습니다. 먹고산다는 것이나 또 그 생활 양식에 있어서도 비슷한 바가 많습니다. 특별히 본능에 있어서는 아주 같은 점이 있습니다. 생존 본능이나 생식 본능이나 혹은 서식 본능이나 귀소 본능 같은 모든 본능들이 동물과 인간이 마찬가지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인간은 인간입니다. 동물일 수 없고, 동물로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엄연히 동물이면서 동물이 아니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존재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엄연히 동물이면서도 동물같이 살아도 안되고, 동물같이 생각해도 안되고, 동물로 취급해서도 안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역설적 생애입니다.
사람에게는 웃음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저 브라질 아주 밀림 속에 13년 동안 가서 그 원주민들에게 선교하던 선교사께서 한국 교회에 오셔서 보고 강연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가운데 아주 재미있는 여러 가지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전연 말이 통하지 않는 그런 원주민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아니한 아주 깨끗이 벗고 사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대화를 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선교사의 말씀에 의하면, 아주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전연 안 통하는 사람이라도 딱 만났을 때 저쪽에서 입가에 웃음을 띄우면 "아이쿠! 이제는 살았구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웃는다고 하는 것이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사람은 웃는다는 웃음이 아주 고귀한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반응과 응답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반응이란 영어로 리액션(reaction)이라 합니다. 응답은 리스판스(response)라고 합니다. 리액션과 리스판스는 같은 게 아닙니다.
동물은 다만 반응으로 삽니다. 사물에 대한 즉각적인 반사 작용을 나타내고 삽니다. 춥다, 덥다, 배고프다, 아프다, 이것은 반사이며 하나의 반응입니다. 어떤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응답이란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고 또 마음에 새기고 그 다음에 자기 것으로 이것에 대해서 응답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율적 응답입니다.
동물에게는 배고픔과 아픔이 있습니다. 어떻게 좀 다치면 "아야!"하고 꼭 반사를 냅니다. 이런 일은 동물과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픈 것과 고통은 같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픈 것은 반응이요, 고통은 응답입니다. 배고픈 것은 반응이요, 슬픈 것은 응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과 동물은 크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동물은 사물에 반사하며 살고 반응으로 살아가고 조건 반사로 행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적 반응 이상으로 깊이 생각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결단하고 그리고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응답입니다.
감사란 응답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 응답하는 이것은 결코 반응이 아니요 응답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면 원망하고 나으면 감사하고, 또 아프면 또 원망하고, 마지막에 죽을 때는 무어라고 하고 죽을 겁니까 이것은 단순한 반응 작용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려울 때 깊이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오히려 일이 잘 될 때 또 한 번 생각하고 겸손합니다. 또 한 번 생각하고 회개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응답입니다.
내 신앙이 응답이냐 단순한 반응이냐를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본문에 다니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갈 때 억울하게 붙잡혀 가게 된 포로 청년입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 갑니다. 그 노예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비참한 노예 생활 가운데서도 신실하고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아서, 마침내 그는 왕에 의해 기용되고 높이 등용되어 이제 메대 파사 나라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다리오 왕이란 메대 왕은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방백 120명을 두고 그 위에 그들을 다스리는 총리 3명을 두고 자기는 그 위에 앉아서 정치를 하는 구조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중에 다니엘이 더 출중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다시 더 올려서 다니엘로 하여금 온 백성을 다스리게 할 그런 생각을 다리오 왕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방백들이 그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마침내 음모를 꾸미게 되어 어찌하든지 다니엘을 완전히 잡아 없애려고 하는 계획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원체 결백하고 온전한 인격의 사람이기 때문에 무흠해서 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른 어떤 방법으로 그들은 계책을 꾸밉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어서 이것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다리오 왕에게 충성을 가장한 조서를 올렸습니다. 그 조서 내용은 이렇습니다. "앞으로 30일 동안 누구를 막론하고 왕 이 외에 다른 신에게나 혹은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잡아다가 사자굴 속에 집어넣어서 죽이도록 합시다." 가히 충성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다리오 왕은 일단 조서에 어인을 찍어버렸습니다.
오늘 내용은 그것입니다. 다니엘은 이것이 무엇 때문이고 누구 때문이며 자기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전과 같이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걸고 오늘 본문대로 말한다면 "감사하였더라" 했습니다. 그의 감사는 참으로 위대한 감사였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죽을 줄 알고도 그는 감사했습니다. 자기 운명이 얼마나 비참해지고 억울하게 사자굴 속에 들어가서 사자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절대적 감사입니다. 이건 조건 반사가 아닙니다. 이건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요, 성공한다 실패한다는 문제도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아주 넘어선, 아주 초연한 절대적 감사를 드렸습니다. 상대적 감사를 드리는 자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사람을 보고 감사를 하는 사람은 다시 사람을 보고 원망하게 됩니다.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이 용돈을 너무 많이 써서 남들은 2만원을 쓰는데 너는 왜 5만원을 쓰느냐고 말했더니 아들이 대답하는 것을 보세요. "내 친구는 십만원을 쓰는데요" 하더랍니다. 이게 상대적인 선입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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