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1-10)

첨부 1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참으로 고독해하는 사람 엘리야를 만납니다. 그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오직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몹시도 고독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살고 싶은 본능이 있는 한편으로 죽고 싶은 본능도 있다고 합니다.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죽으려하는 의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오늘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주 재미있는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아합과 그의 왕후 이세벨이 대노하여 지금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까지 합니다. 이 사실을 통보받은 엘리야는 살기 위하여성경에 씌어 있는 대로 분명히 '생명을 위하여' 도망합니다. 멀리멀리 도망합니다. 그런데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자 이번에는 죽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살기 위하여 도망해 놓고, 이제 살게 되니까 죽고 싶어하는 이 심리가 말입니다.
사람들은 죽고 싶어하기는 하지만 죽임을 당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임 당하지 않으려고 도망 도망하며 갖은 애를 다 쓰고 발악하지만, 정작 안전하게 혼자 남았을 때에는 죽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기는 하나, 죽임 당하기는 싫다--이같은 인간의 모습을 엘리야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다이나마이트의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한테는 '백만장자 부랑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엄청난 사업을 경영하면서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는 대부호였지만 그에게는 집도 가정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내도 자식도 없이 고독한 만년을 보내다 쓸쓸히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고독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너무도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은 평생을 통하여 그리 여유 만만한 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기, 그렇게 절박한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는 죽임 당할까봐 걱정인 때가 있는가하면, 또 언제는 죽고 싶어서 걱정입니다. 이래저래 생명을 경각(頃刻)에 두고, 그 긴장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로뎀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도 되지 않는 억지 소원을 아룁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한 마디로 말해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죽고 싶을 만큼 고독해 합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소설가 헤밍웨이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써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 나는 전기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심히 고독하다……' 그는 훌륭한 소설로 뭇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높은 명성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실존적 고민, 이 고독 하나를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고독' 하면 먼저 육체적인 고독을 생각하게 됩니다. 병든다는 것은 고독입니다. 건강한 때에는 내가 나를 생각해도 내가 꼭 필요한 것 같고, 다른 사람한테도 내가 필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면, 그것도 중한 병이거나 장기(長期) 환자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쓸모가 없구나, 모든 사람에게 귀찮은 존재로구나, 아주 지겨운 존재로구나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인하고 고독하게 됩니다. 또한 늙는다는 것도 고독입니다. 무의무탁(無依無托)한 노인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반기는 사람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았는데 나이 들어감에 따라 차츰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듯이 느껴집니다.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다음은 정신적인 고독입니다. 무지함과 무능함을 느낄 때, 특히 나의 실패를 시인해야 할 때나는 인생을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가만히 돌이켜보니 전부가 실패요, 완전한 실패임을 시인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독이 밀려옵니다. 아무도 나를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강제로 엄마 젖을 떼게 된 어린 아기가 부모로부터 배신감을 느끼는 것과도 같습니다. 대화를 상실하고, 한계를 느끼고, 자폐증 환자처럼 자기 혼자만의 노예가 되면서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이와 같은 정신적 미아, 정신적 고아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지성인들 사이에 많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통계로 보면 의외로 보통사람들보다 지식층이나 지도층에서의 발생 건수가 훨씬 높다고 합니다. 미국 연합통신사의 보도에 따르면 남을 살리기 위해, 남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애쓰는 의사들, 특히 정신과 의사들 중에 자살하는 예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직업별로 볼 때 의사의 자살율이 가장 높다는 것입니다. 의사경제적으로는 거의 문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뭇 사람의 존경을 받습니다.
환자들은 의사를 붙잡고 나 좀 살려달라고, 마치 하나님께 매달리듯이 그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정작 의사 본인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어디 가서 선뜻 의논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40세 이전에 죽은 의사들의 사망 원인을 보면 25%가 자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히려 남의 문제에 대해서는 척척 잘 해결해 주는 사람이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의 문제에 부딪히면 어렵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병을 잘 찾아내고 잘 고치기로명성 높은 내과의가 있는데, 하루는 자기 부인이 하도 쿨룩쿨룩하고 기침을 해서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그랬더니 '폐결핵 3기' 라는 진단이 나오더랍니다. 이런 아이러니컬한 이야기가 우리들 주위에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유능한데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열등생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느끼는 절망, 허무이것이 정신적인 고독입니다.
육체적 고독, 정신적 고독과 더불어 영적인 고독이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욥의 부르짖음(욥 13:24)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고독, 하나님께로서 버림받았다고 하는 고독이야말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잃고, 가정을 잃고, 친구를잃고, 명성을 잃고…… 다 잃는다 해도 하나님의 인정(認定)이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마저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
D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