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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계신 곳으로 (요 12: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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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집에 무남독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애지중지 귀하게 길러 시집을 보내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엇갈린 의견 때문에 이 딸은 중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동쪽에 사는 총각이 부잣집 아들이니 거기로 가길 바라고 어머니는 서쪽에 사는 총각이 비록 집은 가난하여도 사람이 좋으니 서쪽으로 시집을 보냈으면 하였습니다. 이 때에 딸은 태연하게 "동쪽 부잣집에 가서 먹고, 가난한 서쪽 사람의 집에서 자겠다"고 말하였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겠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이러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고 보여집니다. 마음은 서쪽에 두고 살기는 동쪽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생각과 몸이 함께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상과 현실이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율 배반적이요, 모순된 생활을 사는 사람을 이따금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같은 모양으로 변질되어 간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의 신앙과 그의 생활이 일직선상에 있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의 생활과 사회생활이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거룩함과 세속이 합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거룩함과 세속 생활이 결코 이질적 요소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양적인 차이와 양상의 차이는 있어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생활과 세상에서의 생활을 전혀 다른 이질적인 세계로 구분하려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마음과 몸이 다르게 움직이면 정신병자가 되듯이 신앙과 그 생활이 분리되면 그의 인격은 병든 것이며 그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한 소원이나 의지나 지식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곧 생명이며 생활입니다. 정신뿐이거나, 몸만도 아니며 마음만도, 생활만도 아닙니다. 전 인격, 전 생활적인 것입니다. 물질만 바치는 것도 아니며 마음만을 바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전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공동운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동일시되며 동일화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될 때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되고, 그가 미워하는 것을 나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에 그를 있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있는 곳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같은 목적, 같은 방향, 같은 방법, 같은 뜻으로 되어지며 같은 기쁨, 같은 슬픔에도 하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의 친구가 나의 친구가 되며 그의 원수가 나의 원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칼 발트의 행복론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행복이란 먼저는 서로 그리워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다. 나는 저를 보는데 저는 다른 사람을 본다면, 이는 짝사랑이다. 셋째는 서로 자기를 주는 것이다. 자기 마음도 몸도 생활도 주는 것이 사랑이요,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생활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룻기 1장 16절에 보면 룻이 시어머니에게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며 어머니의 백성이 곧 내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즉 운명을 같이 하며 생활을 같이 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일 것입니다.
믿음은 곧 그리스도와 생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운명도, 사랑도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생활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져야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을 알고 그 곳에 나도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뜻하며, 그를 섬기는 일은 곧 그가 계신 곳에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체적인 신앙을 말해줍니다. 지식이나 감상이 아니라 생명이며 생활 전체를 포함하는 전 인격적인 신앙을 뜻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관념일 수 없습니다. 신앙은 곧 생명력인 것입니다.
도마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 길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예수께서 계신 곳은 어디이며 가신 곳은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하셨지만 깨닫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예수께서 가신 길이 곧 우리가 가야 할 길이며 그가 살으신 생 자체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생이며 그가 계셨던 곳, 그 자체가 마땅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에게 뜻을 둔 자와 그를 믿는 자는 그를 따를 것이며, 그가 계신 곳에 그도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도 있고, 사랑도 있고, 뜻도 있고, 생명과 생활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가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먼저 그가 아니 계신 곳이 어디였던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셨던 곳은 당시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같지 아니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바라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곳에 계셨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 직접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 요한마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대하여 실망하고 옥중에서 사람을 보내어 묻기를 "오실 이가 당신이 오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서도 실망이 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곳은 결코 화려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말구유에 나셨으며 자라기도 목수의 아들로 나사렛 촌에서 자랐습니다. 이같은 일이 나다나엘의 기대에 어긋났던 것을 요한 복음에서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의 촌 사람됨과 그의 가난함이 많은 사람에게 거리끼는 바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은 권력이 있는 곳도 아니며, 명예가 높은 곳도 아니었고, 부귀와 영화가 있는 곳도 물론 아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바로 이점에서 실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이와 같은 기대는 그의 능력과 이적 기사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그렇게 화려하고 찬란한 곳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물론 왕권을 행사하는 보좌도 아니었습니다. 헤롯의 보좌나 가이사 황제의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속적인 왕이 되어 주기를 바랬으며 권능있는 왕으로서 세속적인 주권을 회복시켜줄 것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는 유대나라 왕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의 왕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사마리아 성에 들어오시는 것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요한의 증거대로는 억지로라도 왕을 삼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형제들까지도 어찌하여 시골에 머물고 있느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재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어떤 때는 건물을 보이면서 "보시옵소서"라고 한 것은 모름지기 "이만하면 메시아 되신 왕께서 계실만한 곳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은 말이라 생각됩니다. 더욱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끈질기게 물었습니다. "나라 임하실 때가 이 때입니까"라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세속적인 기대와는 달리 고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따라서 46년간에 걸쳐 지었다는 장엄한 헤롯의 성전에도 머물지 않고 오히려 강도의 굴을 만든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은 어디입니까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신 후 맨 먼저 가신 곳이 광야였습니다. 버려진 땅에 가시어 기도하셨고 그리고 바닷가에 나가셔서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 어부들을 불렀습니다. 들과 산 그리고 한적한 곳(막 1:35)이 예수님께서 계셨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하여서는 그리로 가야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셨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때마다 제자들은 함께 있지 못하였습니다. 40일의 광야기도에도 같이 하지 못하였고 벳세다 뜰의 기도, 가버나움 한적한 곳에서의 새벽기도 등 성경에 나타난 것으로도 그때마다 제자들은 같이 있지를 못하였습니다. 변화산과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함께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이들은 자고 말았으니 그때에도 함께 있는 것은 못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더욱 더 기대와 어긋나게 사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무쪼록 속히 고관이 되며 왕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또 이렇게 되기 위하여는 가능한 한 고관들과 사귀게 되기를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 교인들 등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과 사귀며 친하게 되기를 기대하였던 것인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언제나 가난한 사람, 병든 자, 낮은 사람들과 사귀신 것입니다. 건강한 자가 아닌 병든 자, 의인이 아니라 죄인, 유식한 자가 아닌 무식한 자, 유명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소외당한 자와 만나 가까이 하시고 사귀었습니다. 가까이하실 뿐 아니라 교제하시고 너무나 친근히 사귀었습니다. 이 때문에 "죄인의 친구", "세리의 친구"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명예도 얻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유명한 고관 중에 한 사람인 니고데모는 예수를 정정당당하게 낮에 찾아보기를 꺼려하여 밤에 찾아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께서는 죄인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세리와 창기들까지 가까이 사귀었습니다. 요세푸스의 말에 의하면 당시 세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미움을 받고 큰 죄인으로 취급당했던지 거지들도 세리가 주는 돈은 받지 아니하였으며 심지어는 모르고 받았다가 뒤에라도 누가 일러주어서 알게 되면 받았던 돈을 담장 너머로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같이 멸시받는 세리였었고, 창기라면 그야 말할 것도 없이 현장에서 잡히면 돌을 들어 쳐죽여야 하는 가장 천한 죄인이며, 살았다고 할 수도 없는 인간으로 완전히 소외당한 부류에 처한 사람이며 멸시와 소외당한 자의 대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을 높였습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의 외식과 위선을 책망하시는 것까지도 좋고, 세리와 창기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바리새 교인을 세리보다 낮추고 창기를 서기관보다 높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이 말씀은 굉장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이 같은 말을 하시고 나서 당시 그 사회 안에 살아 남아 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곳이 예수께서 계신 곳입니다. 예수께서 여기에 계셨습니다.
어른들은 어린이를 꾸짖었으나 예수께서는 꾸짖는 어른들을 꾸짖으시고 오히려 어린이를 어른들보다 더 높으시면서 천국 백성의 그림자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이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소외지에 계셨습니다. 버림받은 자, 가난한 자, 눌린 자, 약한 자와 함께 계셨고 그들의 편이 되셨으며 잃어버린 자는 친히 찾으셨습니다. 언제나 낮은 곳에 계셨고 외로운 곳에 계셨습니다.
지금도 바로 그 곳에 계십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고 자신을 소개하시는 중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의 복음은 만인이 받아야 할 복음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고 있으며 그들만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실제적인 면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난한 자의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사실은 우리에게 적중되고 있음을 경험을 통하여 매일같이 시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예수는 사랑을 받는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한 곳에 계셨습니다. 그는 항상 사랑하셨을 뿐 사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고독한 자의 친구로서 살으셨으나 그는 계속 고독해야 했고 외롭게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은 예수에게 병 고침을 받은 자와 떡을 얻어먹은 가난한 자들의 모임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자 요셉이 담당하였던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하신 일이 있는데 이 말씀은 보답과 감사가 없는 세대를 향한 개탄의 말씀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받고자 거기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사랑이 필요하기에 거기 계신 것입니다. 오해가 있고, 배신이 있고, 핍박이 있는 곳, 그리고 원수와 십자가가 있는 곳에 우리도 함께 있어야 하고(눅 9:51) 안전한 곳이 아니고 위험한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 곳에 예수님께서 계셨고 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필요한 곳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하고 그리로 가야 합니다.
만일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가 그 곳에 가지 아니하면 언젠가는 그리스도께서 억지로라도 가게 하실 것입니다. 내가 부자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떠난다면 그리스도께서 나로 하여금 가난하게 하여서라도 그 곳에 가도록, 갈 수밖에 없도록 하실 것입니다. 교만하여 소외지에 가지 아니한다면 겸손할 수밖에 없도록 나를 쳐서라도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자에게로 나를 보내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나 있는 곳에 있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그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바로 거기에 나도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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