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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를 받은 자 (눅 01: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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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들이 한가하게 모여 앉아서 나름대로의 신앙적인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나는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성경을 읽어보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내 마음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부분이 많다. 초자연적인 이적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지성으로써는 흥해가 갈라졌다느니 오천 명을 먹였다느니 바다를 고요하게 했다느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영 마음에 걸려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적들이 마음에 걸려서 성경을 가까이할 마음이 없어진다고, 솔직하게 지성인으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토로합니다. 그런데 유독 말이 없이 듣기만 하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내 개인의 경험으로는 이렇다. 나같이 못된 놈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기적이다. 다른 기적은 얘기할 것도 없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니 성경 어디에 있는 기적일지라도 내게는 조금도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라고 고백하더랍니다.
여러분,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가 이적의 말씀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충만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디서 성경을 믿고, 어디서 예수를 믿겠습니까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제일 놀라운 기적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는 기적입니다. 여러분, 구제불능의 죄인 하나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크고 놀라운 기적입니다. 솔직히 생각해보십시오. 나 하나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사람이 되시고, 말씀이 육신 되시고,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기적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이것이 먼저 있고야 죄인의 구원받는 역사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 기적은 당연히 살아날 자가 죽는 기적이 먼저 있고야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주제요, 성경의 중심 진리입니다. 이렇듯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와 우리 인간의 만남의 관계를 드라마틱하게, 가장 대표적으로 전형적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마리아에 얽힌 사건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짧은 내용이지만 성경 전체를 함축한 귀한 진리의 핵심이랄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대저 하나님은 누구시며 우리는 누구며, 하나님께서는 무슨 역사를 이루셨으며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를, 나아가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자세하고도 명료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바로 이 큰 사건을 통하여 은혜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그 자체가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율법과 대칭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죽어야 합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고, 율법의 심판과 율법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그 마음에 율법이 있습니다. 모두가 이 심판과 이 무서운 저주 바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율법적 관계에서 벗어나 은혜의 관계로 그 관계를 개선하는 데에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를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죄인입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런 죄인이 구원받는 사건이 있다면, 이에 관계된 모든 사건 그대로가 통틀어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사랑이라는 말과 은혜라는 말은 다릅니다. 물론 다 같은 사랑입니다 마는 자격이 있어서 받을 수도 있고, 자격이 없는데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자격이 있어서 받는 사랑은 자랑이요, 자격이 없는데 받는 사랑은 은혜입니다. 전혀 무자격한 가운데서 베푸는 사랑, 받는 사랑이 은혜입니다. 이것을 은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가만히 보면, 은혜로 사느냐 사랑으로 사느냐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한다 해놓고는 그 사랑이 좀 빗나가면 질투하고, 그 시름으로 사람을 참 많이 괴롭힙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게 되면, 시원찮은 남자와 함께 사는 것도 은혜로 여기게 됩니다. 자격이 없는 내가 이 귀한 여인의 사랑을 받고 사는 것 역시 은혜입니다. 이렇듯 모든 관계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떠날 때에 시비와 원망과 불평이 많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역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건 자체가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하나님은 전부가 찾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탕자비유를 제외한 예수님의 모든 비유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탕자비유'에서 그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끝까지 기다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마는 그 밖의 비유말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 찾으러 헤맵니다.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등불을 켜들고 찾습니다. 끝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름 없는 자는 의를 주어서, 선 없는 자는 선을 주어서, 거룩함 없는 자는 거룩함을 옷 입혀서 사랑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은혜로 성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은혜로 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꿈에 나타나 그녀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깊은 의미가 담긴 말씀입니다. 이 큰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 은혜요, 구원 사역에 쓰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허물 있는 죄인입니다. 칼 바르트(Karl Earth)는 "마리아는 흠 있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수용하는 여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보통사람들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큰 은혜 사건에 지금 이렇게 들리어 쓰이고 있습니다. 고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혜를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아무 자격도 없지만 선택되어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감사하고 감격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요, 죄인의 괴수요, 핍박 자요 포행 자인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복음을 위하여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맞는 것도 은혜요, 감옥에 가는 것도 은혜요, 나아가 순교하는 것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10절)"라고 결론지어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사건을 은혜로 수용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를 바라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난 사건은 그 자체가 고난이요 십자가요 고통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주위에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우리가 은혜로 수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은혜를 은혜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아주 위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보십시오. 마리아는 스스로 죄인이므로 두려워합니다.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하며 불안해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31절)"라고 말씀합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절)"라고 응대합니다. 사내를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아들을 낳겠다니, 이성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더구나 마리아 스스로 자신의 죄인됨을 생각한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 시각에 하나님께서는 가브리엘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35-37절)." 하나님께서는 마리아가 당신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하심대로 그 말씀을 온전히 믿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실로 세상에 은혜 아닌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을 자주 왕래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어느 가정을 가든 어디를 가든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모두 남자입니다. 너무도 신기하고 이상해서 지난번에는 직접 사진까지 찍어가며 확인을 했습니다. 어느 농촌 마을을 지나다가 아무 집이나 들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어김없이 남자가 음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중국의 11억이나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모든 음식은 남자가 담당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직장에 갔다와도 여자는 가만히 앉아 있고, 남자가 시장도 보고 음식도 만듭니다. 아내는 안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앉아 있다가 남편이 음식을 차려놓으면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고 잔소리를 합니다. 어떤 집은 갔더니 아예 남자는 음식을 밖에 나와서 먹더군요. 여자는 안방에 앉아서 아이들과 먹고요. 이것을 지켜보느라니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잘못 삐끗해서 그곳에 태어났었다면 내 꼴이 어찌되어 있을까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의 남자들은 아내가 차려준 음식을 제왕처럼 앉아 받아먹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고마워할 줄 모릅니다. 오늘부터라도 감사하세요. 앉아서 대접받는 것이 온 세계의 같은 문화는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만이 가진 특별한 문화입니다. 그런데 언제 한번 그것을 고맙게 생각해보기라도 했습니까 은혜를 은혜로 안보니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고, 은혜로 받고, 은혜로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리아를 보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는 그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 말씀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성의 판단으로도 그렇고, 자기의 경험으로도 그러했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만일 일이 그렇게 된다고 하면 자신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만일 임신을 한다고 하면 정혼한 남자 요셉과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더욱이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의문의 임신을 했을 때에 관계한 남자를 밝히지 못하면 창녀취급을 받아 돌에 맞아죽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이 말씀이 사실대로 나타난다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묻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수용할 뿐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마리아는 그 일로 말미암아 앞에 다가올 불이익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방관할 수 없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 일로 말미암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바로 밑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지극한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받고, 은혜로 믿었습니다.

나아가 오늘의 본문말씀은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기희생과 신실한 자기봉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회퍼(Bonhoeffer)는 "우리는 너무 값싼 은혜를 구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싸구려 은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은혜에 응답하는 자기실천이 필요합니다. 자기봉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제 개인적으로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한 번에 넘기지 못합니다. 여러 번 읽고 읽으면서 마음에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절)."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비상한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내 운명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장차 어떤 일이 있을 것입니까 하는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며 순종할 따름입니다. 자기 운명을 그대로 바치는 시간입니다. 진실한 자기봉헌의 시간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희생을 통하여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바로 이런 희생의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되고 있습니다. 말씀 앞에 자기 생명과 운명을 바치는 시간이 있고야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될 수 있습니다.
625에 얽힌 실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625전쟁 당시 한국에 나왔던 선교사 부부에게 입양되어 미국으로 간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몰랐는데 자라면서 차츰 부모님과 자신의 다른 점을 발견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은 하얗고 머리카락은 노랗고 눈은 파란데, 자신의 얼굴은 누렇고 머리카락과 눈은 까맣습니다. 자신은 이 부부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철이 들면서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엔가 그녀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그 부모님은 "한국에 선교사로 갔을 때에 우리가 너를 양녀로 삼게 되었다"라고 대답합니다. 큰 충격을 받은 소녀는 도대체 우리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나를 낳아서 버렸단 말인가 하는 불만을 품게 됩니다. 원망이 쌓여갑니다. 이러한 원망과 불평 속에서 대학을 졸업합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양 부모님이 마침내 그녀에게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이야기해줍니다.
'14후퇴 때에 강원도의 어느 지역인가를 지나는데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차를 멈추고 가보니 다리 밑에 어떤 여인이 방금 낳은 아기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날씨는 추운데 기저귀도 없고 아기 옷도 없고 해서 여인은 자신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서 아기를 싸고 또 쌌다. 옷을 모두 벗어 아기에게 입히고는 그녀 자신은 추위에 얼어죽고 말았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바로 너다. 그래서 우리가 너를 양녀로 삼아 오늘까지 키워왔다'하고 말해줍니다. 이런 사연을 들은 소녀는 꼭 한번 한국에 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마침내 양 부모님과 한국에 온 소녀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무덤을 찾습니다. 때마침 눈이 많이 오는 추운 겨울날입니다. 눈이 쌓인 무덤 앞에 서서 그녀는 옷을 벗습니다. 무덤에 옷을 하나씩 벗어서 덮어놓습니다. 알몸이 되도록 옷을 다 벗어서 무덤에 올려놓고는 조용히 입을 엽니다.
"그날,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습니까"
여러분, 한 생명이 산다는 것, 한 생명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그렇게 헐값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죄인의 구원이 그렇게 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엄청난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고야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기적 속에 내 생의 기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사건--최대의 기적이요 최대의 은혜 사건입니다.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마리아의 자기봉헌이 있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순간, 비로소 은혜가 은혜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은혜 안에서 새로운 생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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