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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눅 12: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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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하는 자기에 대한 평가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평가가 바로 되어야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도 있고 또 진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지, 또 어느 정도의 사람으로 평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평가 기준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한번 가정하고 생각해보십시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그 평가보다 다른 사람들이 너를 평가해 주는 그 평가가 적을 때 나는 몹시 불만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평가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이 보다 클 때, 보다 높을 때 우리는 불안하게 됩니다. 어차피 불만도 불안도 고통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번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바로 평가하기가 어려운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서 나를 바로 평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이 인간 관계나 혹은 자기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많은 고민과 번민을 안고 살게끔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너무 높이 평가하면 우상이 됩니다. 자기를 우상화해 가면서 자기 우상에 빠져 고통 중에 사는 불쌍한 사람을 많이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학 행위를 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를 학대합니다.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구제 불능한 인간이라고 자기를 항상 꾸짖으면서 사는 그런 비참한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자기 평가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어떤 이상을 지니고 살아왔는지, 그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가정교육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너무 그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해서 너는 훌륭한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이 꼭 되어야 한다. 너는 남의 아이와 다르다, 다른 아이와 다르다 해서 자꾸만 높이 많은 청구를 하게 되면 마침내 이것이 가상적인 이상이 되어 버려서 너무 높은, 너무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을 가진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이런 아이의 경우에는 여기에 다소라도 부합하게 살 수 있으면 좋고, 그렇지 못하면 아주 자기를 포기해 버리고 마는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 이상이 낮아서 현실 이하로 생각하고 사는 것도 걱정이지만 너무 높은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은 위선자가 되고 허위의 사람이 되기 쉬운 가능성을 말해주고, 또 때로는 절망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자기 능력, 자기 지식, 혹은 어떤 가능성과 무관한 이상이라는 것이 자기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자기 평가입니다.
이것은 자기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또 어떻게 요구하는가, 그래서 부모님의 요청 혹은 이웃의 요청 또는 친구들의 어떤 시선을 느껴 가면서 여기에 부합하게 사느라고 자기가 없는 그런 생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참 어려운 일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나야 나를 어떻게 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그 문제에 가장 귀한 착안을 합니다. 내가 나를 필요치 않다 하고, 이웃도 나를 필요치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필요하다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내게 지불해 주신 십자가의 엄청난 그 은총 안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 하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복수로 볼 때는 적은 무리, 곧 수적인 뜻이 되겠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작은 사람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어쨌든 수적으로 적은 것, 또 사람으로 보면 나약한 존재, 능력이 없고 권세도 없고 볼품도 쓸모도 없는 그런 사람, 관심 밖에 버려진 사람, 소외된 소수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저들은 적은 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그 앞에는 모름지기 열두 제자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열세 사람입니다.
그것도 갈릴리 촌사람입니다. 아무 지위도 권세도 그리고 명예도 없는 사람들, 사나 죽으나 별로 누가 관심을 쏟을 그런 값어치의 사람들이 못 됩니다. 이런 초라한 사람 열세 명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린다고 해서 누구 하나 특별히 관심 있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하잘것없을 만큼 초라한 무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 너를 박해하는 자도 없고, 너의 가는 길을 막을 자가 없다. 그런고로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되겠습니다. 또 한편으로서는 자신을 적게 여기지 말라. 지식이 없다고, 명예가 없다고, 권세가 없다고 혹은 수가 적다고 해서 자신을 적게 여기지 말라는 그런 말씀인 줄로 압니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말을 듣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십니다.
"백합화를 보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누가 입히고 누가 먹이느냐" 우리는 백합화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고, 새를 보면서 또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돌보심, 그 속에서 자신을 보란 말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한 조각배가 풍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속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노를 저으려고 애를 쓰다가 풍랑이 심해질 때 완전히 손을 들고 맙니다. 그리고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적게 믿는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적게 믿는 자여,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주장하시고, 하나님이 이 적은 무리를 통하여 이루실 엄청난 역사가 앞에 있지 않느냐.
그들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뿐입니까 그리스도가 여기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이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말씀이 "적게 믿는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나 혼자가 아닙니다. 고독은 죄입니다. 믿음 안에 고독이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시고 그리고 내 가치를 평가하시고 당신의 십자가로 사랑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지불된 값이 여기에 있고, 보장된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사신 그 존재를 어떻게 평가하실 것입니까 십자가 만한 값으로 이미 지불한 그 엄청난 값으로 평가하고 그리고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수"는 수학적인 수가 아닙니다. 이것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비록 수십만 명이 모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만의 모임이라면 적은 수입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적은 무리, 이것이 큰 숫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 왕이 그 나라를 평정하고 보좌에 앉았을 때 그는 그 나라의 위엄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만일 전쟁이 난다면 군인으로 동원될 사람이 몇 사람이 있나 보자고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활을 메고 적하고 정말 싸울 수 있는 사람, 창을 들고 방패를 들고 나가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 있나 보자 해서 많은 사람을 헤아렸습니다. 전체 인구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왜 전쟁에 이기고 지고는 하나님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달린 것이지 숫자가 많다고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미안한 말씀이지만 그래서 저는 교회 주보에 교인 숫자를 싣지 않습니다. 여기에 몇 천 명이 모였다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사람이 모였다고 하는 것이 문제지 어중이떠중이로 왔다 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이 가운데 친구 만나러 온 사람도 있고, 어쩌나 보자 해서 온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숫자가 얼마냐 이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적인 어떤 수의 개념, 이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혼자라도 이것은 큰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것은 질적인 문제입니다. 죄인 만 명과 의인 한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인구가 얼마였는지 확실히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수만 명과 의인 열 명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거리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 한 사람을 만나라. 그리하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사람이 얼마든 간에 의인 한 사람과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죄인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수가 아닙니다. 의로운 수 하나, 이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에 선 사람, 선에 속한 사람 그리고 의를 행하는 사람이 더욱 강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서 전쟁에 나가기 위하여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3만 2천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합지졸입니다. 지금 방금 모집해 놓은 군인입니다. 저쪽은 수십만 명입니다. 이 전쟁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수가 너무 많다. 줄여라" 하십니다. 기드온은 기가 찼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부득이 줄였습니다. 만 명으로 만들었습니다. "만 명은 너무 많다. 열 줄여라." 결국 3백 명을 만들었습니다. 기드온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3백 명 군인, 이것이 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큰 숫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돈도 그런 것 아닙니까 그저 어쩌다가 쉽게 번 돈은 아무리 많아도 나를 행복하게 못합니다. 땀 흘려 번 적은 돈이 나와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한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어쩌다가 출세한 것, 그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때로는 천대를 받아도 여기에 공정한 강함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의와 함께 부자로 사는 것, 그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진리와 함께 의와 함께 가난하게 살아도 여기에 더 큰 행복이 있고, 더 놀라운 강함이 있다고 하는 이러한 질적 수의 개념을 알아야겠습니다.
소년 다윗이 작은아이로서 전쟁에 나갔는데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장)고 그는 말하면서 큰 키의 장수 골리앗 대장을 물맷돌 몇 개로 때려눕힙니다. 이것은 그의 육체가 아니라 그의 정신이요. 그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진 이 무서운 소년, 그 신앙에 강함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생명은 강한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뚫고 비칩니다. 소금은 적은 것이지만 전체를 짜게 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적은 것이지만 전체를 썩게 할 수 있습니다. 많다 적다 말하지 맙시다. 부하다, 가난하다 그것도 말하지 맙시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 생명적인 신앙만 있으면 산을 옮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부하냐고 묻기 전에 외로웠느냐고 물어 보십시다. 얼마나 벌었느냐고 묻지 말고 얼마나 진실했느냐고 물어 보십시다. 어떻게 출세했느냐고 묻지 맙시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직했는지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생명은 미래 지향적인 것입니다. 보세요, 여기 열두 제자가 있습니다. 비록 적은 것이고 초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하여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 가운데서 열한 제자가 다 순교합니다. 이렇게 썩어지는 밀 알이 되면서 온 세계의 수십억, 수백억의 많은 성도들이 구원받게 되는 거룩한 역사가 저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놀라운 신앙입니다. 믿음은 적은 씨앗에서 봄의 소리를 듣습니다. 꽃 냄새를 맡습니다. 가을에 추수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조그마한 씨앗 하나를 들고 새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여리고 성과 같은 큰 아성이라 하더라도 죄악의 도성인 경우에는 바로 눈앞에 있는 멸망을 보면서 슬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온 세계에 충만하게 큰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로 임하게 하는 그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보면서 저 먼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약속된 미래, 이 결정된 미래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나갈 때마다 두 가지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었다. 이 땅을 내게 주었다. 혹은 내 발로 밟는 땅을 하나님이 다 내게 주었노라는 확신이요, 또 하나는 "다 내 손에 붙였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과거사입니다. 아직 전쟁은 시작도 안 했습니다. "내게 주었다" "내 손에 붙였다" 하는 말만 떨어지면 전쟁은 끝난 것입니다. 그저 뒤처리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승리는 결정된 것입니다. 궁극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승리합니다. 그런 위대한 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세상을 보십시다. 이 복잡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넘어서 현실에 매여서, 발 밑에 걸린 이 돌 하나에 매여서 아무 일도 못하고 그대로 손이 풀어지는 이런 나약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거친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던 것처럼 그런 커다란 꿈, 그 같은 환상, 그 같은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적인 미래, 하나님의 엄청난 세계를 바라보면서 예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기까지는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 일은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시던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기에 주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주님은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함께 계십니다.
이 귀한 신앙에 근거하여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런고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기도: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여 주시옵소서. 적은 무리에서 큰 무리를 보며, 고난과 실패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볼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 모든 역경과 좌절의 담을 넘어서 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에 축복이 있음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시며, 내가 처한 이 현실을 통하여 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주와 함께 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담력과 용기와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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