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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길을 예비하라 (눅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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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라는 시점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거에 매달려 오늘을 사는 사람과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사람-이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해당합니까 은행 창구에 돈을 내놓는 사람들을 봅니다. 한쪽은 예금하기 위해 돈을 내놓는 사람들이요, 또 한쪽은 빌려 쓴 돈을 갚거나 이자를 물기 위해 돈을 내놓는 사람들입니다. 양자 모두 은행에 돈을 내고 있다는 그 사실은 똑같지만 마음과 기분은 전혀 다릅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기다릴 대상이 있다는 것, 기다릴 자격이 있다는 것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은 다시없습니다. 행복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소망적인 기다림을 가진 사람-약속 받은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625 동란 때의 일입니다. 압록강변에서 중공군과 맞서 싸우다 부상을 당한 미 해병대 대원들이 폭격 맞은 트럭 옆에 기대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벌겋게 부어오른 상처를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영하 42도의 혹한 속에서 싸늘하게 얼어붙은 깡통을 뜯고, 그것으로 주린 배를 채워 볼뿐이었습니다.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파견된 한 미국인 기자는 그 모습을 보고 너무도 기가 막혀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어라고 한마디쯤 위로를 해야 하겠거든요. 그는 생각다못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신(神)이라면 당신들은 내게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주면 당신들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무표정한 얼굴들로 앉아 있던 미군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들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확실한 내일을 보여 주십시오." 보장된 내일, 소망적인 기다림만 있다면 현재의 고난은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다는 뼈아픈 고백이었습니다.
2천 년 전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던 유대 땅은 말할 수 없이 어둡고 암담한 현실 속에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헤롯왕이 제수(第嫂)를 취해 자기 아내로 삼을 만큼 도덕과 윤리는 땅바닥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도처에 강도의 출몰이 잦고, 온갖 부도덕한 행위들이 만연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세속화(世俗化)의 경향이 짙어졌습니다. 의식(儀式)만 남고 알맹이는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어둡고 혼란한때였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2천 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온 메시야 대망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나라 잃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녀도, 어느 곳에서 어떤 고생을 겪어도 저들이 끝까지 지키고 간직한 것 한 가지, 그것이 곧 메시야 대망 사상이었습니다. 메시야의 나라를 대망(待望)하는 그 간절한 기다림-이것만은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르고 아무리 많은 어려움 앞에서도 희석되거나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강하고, 이것 때문에 이기고, 이것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메시야를 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4백 년 동안이나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광야에서 오늘 다시 전해집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복음을 전하자,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선지자의 외침을 듣기 위해 광야로 모여듭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외쳤습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옛날에는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마다 길을 닦았습니다. 길이 없는 곳에는 왕의 행차를 위해 일부러 길을 만들었습니다. 구부러진 길을 바로잡고(지금도 더러 고위 관리의 지방 순시가 있을 때면 이런 일을 합니다마는)더러워진 길은 깨끗이 청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길을 왕이 행차했다 해서왕도(王道)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의 길'이란 바로 이 왕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외침은 곧 "메시야를 맞이할 길을 예비하라. 그리고 그 길로 왕을 모셔들여라" 하는 메시지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는 4부 예배를 드립니다. 1, 2, 3, 4부 예배를 다 마치고 나면 대강 3시 10분쯤 됩니다. 지난 주일에는 제가 4부 예배를 마친 후 목포에 가서 또 저녁 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하루에 서울과 목포 사이를 왔다갔다할 수 있었던 것-길이 좋아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차를 몰고 새로 만들어진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보니 4차선으로 아주 잘 닦여 있었습니다. 좋은 길, 잘 뚫린 길, 그 편한 고속도로가 제게 복음의 길을 열어 준 것입니다. 중국은 우리 나라보다 땅도 넓고 역사도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돈만 생겼다 하면 성 쌓는 데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방 돌아가며 성을 쌓고 담장을 높입니다. 자꾸 막아 버립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서 갇혀 사는 것입니다. 이러니 발전될 턱이 있나요. 만리장성, 하나도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 특히 미국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어디를 가든 길을 닦습니다. 집을 짓기 전에 먼저 길부터 훤하게 닦고 철도부터 놓습니다. 그래서 미대륙같이 넓은 땅을 철도와 고속도로로 횡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가 미대륙의 양끝이라 할 수 있는 뉴욕에서부터 로스앤젤리스까지 한번 버스를 타 보니 사흘 낮 사흘 밤을 달립니다. 비행기로도 6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어지간히도 먼길입니다. 그렇게 긴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넓은 고속도로로 깔아 놓은 것입니다. 인적 없는 광야에도 길은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발전이 있고, 그래서 강한 것입니다.
길을 닦아야 합니다. 좋은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곧은 길이 필요합니다. 구부러진 길은 효율이 없습니다. 평탄한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튀어나온 곳은 깎아 내고, 낮은 골짜기는 메우고, 높은 산에는 굴을 뚫고, 강에는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달리다보면 이것이 골짜기인지 다리 위인지 육지인지 알 수 없게 그대로 죽 평탄하게 가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고속도로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마음에도 이같이 곧은길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왕의 길을 만들라! 왕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즉 고속도로를 만들라는 말입니다. "메시야를 모셔들일 마음의 길을 예비하라!"마음에 도로 공사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 회개는 감상적인 눈물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마 3:8). 구체적인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면서 사위더러 한 말입니다. "부디 내 딸을 사랑해 주게. 그리고 이 애가 혹시 우는 일이 있더라고 왜 우느냐고 너무 캐묻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게. 여자가 우는 데에는 꼭 무슨 이유가 있어서만이 아니니까……" 여러분, 눈물의 가치를 과대 평가하지 마십시오. 회개의 증거가 눈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사람의 눈물이란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아무런 깨달음 없이 그저 답답해서 우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회개와 눈물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뒤로 돌아서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감상(感傷)이 아닙니다. 값싼 눈물이 아닙니다. 뒤돌아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낡은 영겁(old aeon, old age)과 지나간 인연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지난 일들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끊어야 하고, 부정해야 합니다.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 이전에 버릴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1년 동안 무엇을 얻었는가 하고 셈하기 이전에 무엇을 버리지 못했는가 하고 자문(自問)해 보아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고, 그 많은 은혜의 시간에 은혜 받지도 못하고, 그 많은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도 마음에 주님을 모신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 아직도 못 버린 것이 무엇인가, 끊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죽여 버리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은 모든 굽은 것이 바로 되어야 한다, 어두워진 것, 구부러진 것들을 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화해하는 데 방해되는 것들, 이웃과 내가 하나되는데 방해되는 것들-이 구부러진 것들을 다 제해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부러진 마음, 비뚤어진 마음이 그대로 있는 동안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몇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사람이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이것으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대꾸하기를,"하나님은 도둑이구먼! 왜 남자를 잠재워 놓고 갈빗대를 훔치누"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런 도둑이라면 매일 들어도 좋겠다. 갈빗대 하나만 가져가고 대신 여자를 남겨 주었으니까." 마음이 구부러진 사람 눈에는 모든 것이 비뚤고 구부러지게 보입니다. 매사에 비판적이고 비관적입니다.
칭찬은 아첨처럼, 충고는 멸시처럼, 위로는 조소처럼 들립니다.
또 구부러진 마음에는 말씀의 빛이 굴절 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깨진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듯 말씀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도 이상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모두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를 영접할 수 없었고, 결국은 그토록 간절히 기다려 온 메시야를 자기들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맙니다. 왜 그들은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구부러진 마음을 바로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 교만의 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명예, 자기 존중, 자기 우월감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볼 수도 없었고 영접할 수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 관원 니고데모를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께 찾아온 것은 기특한 일이었다 할 수 있으나 그에게도 역시 교만의 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이것은 특별히 니고데모 한 사람을 지적하여"너는 중생(重生)해야 하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체면과 위신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식꾼들이고, 예수님의 친구들이 세리들이기 때문에 대낮에 찾아갔다가는 자기체면이 말이 아니겠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그런 교만한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중생해라." 체면, 위신, 그 불필요하고 교만한 마음을 끊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중생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없고 말씀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높은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야 합니다.
마음속의 골짜기는 죄와 실패와 낙담과 절망과 불신입니다. 베데스다라는 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사실, 환자더러 낫고 싶으냐고 묻는 것은 얼마나 실례되는 일입니까 어느 환자가 낫기를 원치 않겠습니까 그러나 38년 된 이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그 같은 질문을 하신 데에는 심각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38년을 누워 있으면서 그 병자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고 절망했겠습니까 무슨 희망이 그리 많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못 물이 움직일 때에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의 불쌍한 처지를 자기 일보다 더 급하게 여겨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일도 다 체질화되어 버려 기대도 배신감도 체념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신 것입니다. "아직도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여러분이 질문을 여러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해보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대답해 보십시오. 지금은 마지막 소망을 예수님께 바로 고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아무리 많은 배신을 당했더라도 예수님만은 믿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실망하고 절망했어도 성경말씀만은 믿어야 하고, 여기에 소망을 걸어야 합니다. 나는 망했다, 나는 무자격하다, 나는 구제 불능이다 하고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거나 쓰러지지 마십시오.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격은 주님께서 나를 구속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말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15:21)."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볼 때 너무 부끄럽고 겸연쩍어서 괴로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듯 기뻐하며 그를 영접합니다. 이제 탕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이같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도망해야 합니까 사양해야 합니까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면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의(義)도, 용서받을 자격도, 내 생의 가치도 십자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무저갱(無低坑)처럼 깊어진 절망의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한도, 분도, 증오의 골짜기도 메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시는 새로운 가치, 완전한 가치,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여 깊은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롭고 탄탄한 마음의 고속도로를 만들어서 주님을 영접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주의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과거와 미래가 모두주님의 손에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하며 나는 장차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묻지 않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이 같은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양하지도 않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이것이야말로 넓은 고속도로입니다. 깨끗한 마음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의 응답입니다.
마태복음 8장 5절 이하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종의 병을 고쳐 주십사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을 만류하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제 집에 오심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만 말씀만 하십시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제 손이 모자라면 부하를 시키겠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즉각적으로 실천하겠나이다." 이 얼마나 귀한 믿음입니까 버리라면 버리고, 끊으라면 끊겠다는 철두철미한 충성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러분, 평탄하고 곧은 주의 길, 마음의 길을 준비해 가지고 주님을 만날 때 거기에 은혜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말씀 한마디를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준비하지 못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시키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골짜기를 메우십니다. 산을 헐어 버리십니다. 굽은 길을 바로잡아 놓으십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습니다.
전쟁이 있고, 기근이 있고, 재난과 질병, 실패가 있습니다. 갖은 어려움과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까지 우리를 낮추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까지 진실하게 만드십니다. 내가 나를 부인하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부인하게 하시고, 내가 나를 끊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끊도록 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 무서운 역사(役事)가 시작되기 전에 마음 문을 활짝 여십시오. 그리고 마음의 도로 공사를 시작하십시오. 높은 산을 낮추고, 골짜기를 메우고, 굽은 길을 바로잡아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님을 영접할 때에 주님의 평화와 능력과 은혜와 영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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