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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의 언약 (겔 34: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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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을 한 사자가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습니다. 지금 막 한 생명을 죽이고 그 고기를 잔뜩 뜯어먹어 만복(滿腹)이 된 채 잠이 든 것입니다. 숲속은 한동안 고요할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무서운 싸움터에서 사자는 바야흐로 강자(强者)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강자가 사나운 힘을 발동하고 있는 동안에는 온 숲속이 숨을 죽입니다. 이제 강자가 잠들었으니 다른 짐승들은 당분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이 평화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 또하나의 평화로움이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입니다.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동산입니다. 햇빛도 좋고 향기도 좋고 평온해 보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게 평온한 것만도 아닙니다.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도 쉴 사이 없는 생존경쟁이 있습니다. 윙윙대며 날아다니는 벌들이나 한가로워 보이는 나비들도 실은 꽃가루와 꿀을 옮기는 데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벌과 나비는 저들에게 필요해서 그렇게 수고하는 것이지만 꽃은 벌과 나비가 그렇게 수고를 해 줌으로 결실을 하게 됩니다.
사자가 군림하는 숲속의 평화와, 벌과 나비와 꽃이 어우러진 꽃동산의 평화이 두 개의 장면에서 우리는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그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의 편의를 위해서 평화의 개념을 세 가지 규범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로마 사람들이 주장하던 평화입니다. '로마의 평화' 곧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팍스(Pax) 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소위 평화의 여신입니다. 영어의 'peace'는 이 Pax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팍스 로마나는 힘으로 세계를 정복했을 때의 승리감 내지 평정 상태(平靜狀態)로, 물리적이요 물량적이요 힘으로 지배된 정치적 평온을 가리킵니다.
힘이 있는 동안에는 모든 질서가 고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동묘지의 고요함과도 같은 것입니다.
제가 마침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암살당했습니다. 이 사건이 보도될 때에 저는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그 장면을 시종 지켜보았습니다. 기자들이 잔인하다고 할까 짓궂다고 할까, 슬픔을 당하여 경황이 없는 미망인에게 몰려들어 한말씀 하라고 마이크를 들이댑니다. 그러자 이 케네디의 미망인이 꽤 훌륭한 대답을 합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때가 되어야 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멋진 대답입니다.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으로 망합니다. 강팍한 자는 강팍으로 망하고, 권모술수는 권모술수에 당하고 맙니다. 이 엄연한 진리를 어느 때에나 깨닫게 될까 참 귀한 대답이라고 느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올시다마는 불가능은 없다고 호기를 부리던 영웅 나폴레옹이 한창 득세하고 있던 때입니다. 어떤 기회에 병사 하나가 나폴레옹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장군께는 어느 때가 가장 무서운 때입니까" 그러자 나폴레옹은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이발사를 불러다 면도를 할 때가 제일 무섭다네. 이놈의 면도칼이 목줄기를 훑을 때는 으스스하기 짝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부하를 시켜 이발사의 아들 하나를 끌어다 놓고 그 아이의 목을 잡고 있게 한다네. 이발사가 내 목을 베는 날에는 그 아들녀석도 목졸려 죽는 거지 뭐."이런 상태가 힘의 긴장 관계입니다. 요란한 소리도 없고 치고받는 것도 아닙니다. 겉보기는 평온하지만 이런 상태는 결코 평화가 아닙니다. 마치 장이야 하면 멍이야 하고, 이걸 먹으면 저걸 먹히는 장기를 둘 때처럼 팽팽한 긴장 상태로 사는 것은 평화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날마다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힘과 권력과 폭력에 짓눌린 평정 상태일 뿐, 전쟁이 없고 소리가 없다고 평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는 절대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힘있는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헬라적인 평화가 있습니다. 헬라말로는 '에이레네'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마음의 평화요, 정신적인 평화입니다. 다분히 개인적 심리적인 것으로, 세계를 원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변증법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데서 오는 평화라고나 할까요. 플라토닉한 평화라고도 하겠습니다.
셋째는 히브리 사람들이 말하는 '샬롬(shalom)'이라고 하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화평의 상태로서, 조화로 충만한 것입니다. 정신적이면서 물질적이요,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요, 종교적이면서 세상적입니다. 온전함(whol-eness)의 상태를 말합니다. 원수가 죽어 없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원수와 화목하는 평화입니다. 정의와 자유와 번영과 신앙이 종합적으로 조화를 이룬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에서의 평화를 다 포괄하는
온전한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평화의 진리를 찾아 헤맨 한 순례자의 길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입니다.
야곱은 축복받으려는 소원으로 남달리 극성스러웠던 사람입니다. 당초 그에게 있어 축복의 개념은 물질에 있고, 그리고 가정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서라도 축복만 받으면, 그래서 부자만 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쫓겨나 타관에 나가서도 20년 동안이나 갖은 고생 다하면서 큰 부자가 되었고, 네 여자의 남편으로, 열한 자녀의 아버지로, 또한 큰 족장으로, 이른바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없었습니다. 형을 만나러 가다가 얍복 강변에서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는지 모릅니다. 재산과 가족들을 다 건네 보내고 홀로 남아서 밤새 천사와 씨름을 하며 기도를 합니다. 기도 제목은 오직 하나, 화평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을 이기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요 화목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의 은혜로 형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참평화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세겜 땅에서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말미암아 큰 형벌을 받고 어려운 처지에 빠집니다. 회복되어 정신을 차리게 되자 모든 재산 다 잃고 우상 다 내버리고 빈 손으로 가족들과 함께 벧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원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무릎꿇고 제사 드린 연후에야 화평의 길을 가게 됩니다. 130세에 바로 왕을 만났을 때 한 말은 그의 길고 어려웠던 순례의 길을 단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야곱이 처음부터 하나님과 화평하고, 형님과 화평하고, 그리고나서 세상을 살았더라면 그 일생이 그토록 눈물겹고 쓰라린 세월이 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가장 중요하고도 먼저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깨닫지 못했던 탓입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화평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화평의 언약'이라고 하는 말씀의 계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바벨론 포수(捕囚) 당시에 주신 계시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저들은 바벨론에 포로되어 갑니다. 이후 70년에 걸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합니다. 그런 고생과 어려움 속에서 이 음성을 듣게 됩니다. 특별히, 바벨론 사람들이 "너희들 노래 잘한다고 하던데 노래 좀 해 보라"고 하면서 비웃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예루살렘 쪽을 바라보면서 무릎꿇고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했습니다. 그 모든 시련 속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모처럼 진실을 찾았을 때,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화평의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약속해 주십니다. 저들에게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건이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구제불능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상상도 못할 일인데 일방적으로 귀한 언약을 세우십니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25절)'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26절)' '그들이 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며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30절)'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31절)'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미래지향적입니다. 바벨론 포수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을 다시 수축하게 될 미래의 그날을 예고해 주시는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에 대한 바른 응답을 원하십니다. 바른 믿음으로 받아 믿고 순종해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 언약은 창조적인 것입니다. 창조적인 화평인 것입니다.
화평이라는 것을 질적인 차원에서는 세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적인 화평입니다. 종속적인 것이지요. 다른 사람이 화평하면 나도 화평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쁘면 나도 기쁩니다. 정세가 좀 나아지면 증권 시장의 주식값이 오르고, 주식값이 오르내림에 따라 주식을 산 사람들의 낯빛이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과도 같은 현상입니다. 이와 같이, 형편에 따라 종속적으로 끌려다니는 상대적인 화평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절대적인 화평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돈도 많고 명예도 있지마는 마음에 평화가 없는 회의주의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삶이 어는 날은, 아주 가난하게 살아가는 농부 한 사람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농부는 감자 한 자루를 짊어지고 가면서 즐겁게 찬송을 부릅니다. 하도 즐거워 보여서 "이 사람아, 자네는 뭐가 그리 기쁜가" 하고 물어 보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서 즐겁고 기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구원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하고 다시 물어보자 그 농부는 감자 보따리를 땅바닥에 내려놓더니 "내가 감자 보따리 내려놓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아, 그야 자네 어깨가 편하겠지" 하고 그 사람이 대답하자 농부는 말합 니다. "내 마음이 편안하니까요.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죄를 사함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당하는 고난이나 가난은 어떤 것이든 모두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쁩니다." '그가 나를 의롭다 하시면 누가 나를 정죄하겠느냐'고 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구속받은 자유의 감격 안에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 화평입니다. 누구도 어떤 환경도 이 화평을 저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얼굴은 천사와 같습니다.
세 번째는 창조적 화평이 있습니다. 내가 화평하고야 남을 화평케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편하고야 남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적 화평으로 그것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을 하나로 만들어서 십자가로 화평을 성취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시며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신다(엡 2:16)"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시고 회개케 하시고 용서하시고 화해하십니다. 기다림과 용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한 역사를 창조하고 계십니다. 화평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늘도 역사는 그 방향으로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하여 축복을 주십니다. "장마비를 내리리라, 그 소산(所産)을 내리라" 하심은 경제적인 화평이요, "멍엣목을 꺾겠다" 하심은 억압과 약탈로부 터의 자유 곧 정치적인 화평을 의미합니다. 또한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하심은 심리적, 영적인 화평을 의미합니다. 증오에는 고요함이 있는 것 같아 보이나 화평은 없습니다. 사랑만이 화평이요, 의와 진리 안에만 참된 화평이 있습니다. 이 화평으로 오늘도 하나님께서 그 크신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바로 며칠 전에 어느 기업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근로자들의 파업 농성으로 작업이 중단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사장은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회장이 이러한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나" "대단히 강경합니다." "어떻게 할 참인가" "양보하지 않겠습니다. 주동자들을 전부 책벌(責罰)하겠습니다." "아하, 그러면 안 되네. 회사의 사정이 실제로 어렵지 않은가. 그 어려운 사정을 알아듣게 설명해 주어야지. 그리고 사정이 나아지면 월급을 올려 주겠다고 할 일이 아닌가. 회사가 어디 우리들만의 것인가. 모든 종업원들의 것임을 납득시켜서 합의를 봐야지, 책벌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게나." 이렇게 말하는 것을 전화 교환수가 엿듣고 파업 주동자를 찾아가 귀띔을 했습니다. 회장의 이 사랑의 마음을 알고 감동한 나머지 근로자들은 그날로 파업을 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마음은 고요합니다. 의로운 자의 마음은 언제나 화평합니다. 또한 화평을 창조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며 그들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겔 34:30)." 그리고 엄청난 선교적 사명을 맡기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고난 중에서 이 귀한 화평의 약속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화평-이것이 근본입니 다. 화평의 문제는 힘의 문제가 아니요, 소유의 문제가 아니요, 번영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의 문제입니다. 화평의 문제는 안정의 문제가 아니요 이해(利害)나 타협의 문제가 아닙니다. 의(義)의 문제입니다. 힘의 균형의 문제가 아니요 회개와 겸손과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화평의 언약을 믿는 믿음을 가진 그 용기가 아니고는 화평의 역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문제요, 십자가에 대한 확실한 신앙의 문제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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