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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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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9장 마지막 부분에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20장 초반에 "마치 천국은 이와 같다"라고 하시면서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성경말씀의 비유 가운데 많은 부분이 천국에 관한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의 배경을 보면 19장 16절 이하의 말씀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부자였고, 젊은이였으며, 다른 성경말씀에는 관원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에 있는 여러가지 계명들을 이야기해줍니다. 아마 십계명을 중심으로 말씀을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이 사람이 "내가 어려서부터 이것을 다 지켜서 행했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유대 사람들의 관례에 의하면 6살이 되면 교회당에 보내서 그 때부터 율법공부를 시작하게 합니다. 어릴 때부터 율법공부를 시작하고 지켰으니 이 사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서 나를 쫓으라."는 말씀을 하시자 부자 청년은 돈이 많은고로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이 돌아간 다음에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그리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제자들 가운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논란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우리의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즉 무엇을 얻으리이까" 물었습니다. 재물을 많이 얻을 사람도 구원을 못 얻는다면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고 봅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만 재물에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먼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영토를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린 것에 대해 어떤 도움을 받고 싶어할 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20장에 있는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 데 유의할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귀절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른 아침에 온 사람과 마감하기 한 시간 전에 온 사람이 같은 품삯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불합리한 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경제원칙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비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성경말씀을 합리적으로 해석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세속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사고를 합리적으로 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서는 합리적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토툴리안이라는 학자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합리적인 것 같으면 믿음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불합리한 비유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18,19세기에 합리주의 운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심지어는 성경말씀의 해석까지도 합리적으로 해야한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오히려 잘못 해석한 예들이 빈번하게 있었습니다. 합리적인 해석의 하나는 "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에게 한 달란트 더 주려고 했었는데 일은 하지 않고 꾀만 부려서 한 달란트만 주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는데 일찍 온 사람들은 금으로 만든 것을 주었고, 늦게 온 사람은 동으로 만든 것을 주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해석 방법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했다면 불평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만족하지 않고 불평했다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을 볼 때에 본문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벗어나서 지나치게 합리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오히려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경제 상황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절박한 상태였습니다. 장터에는 아침부터 품팔기 위해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먹고 살 만큼을 벌면 만족하는 경제적인 형편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품삯을 벌지 못하면 굶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공정한 임금을 측정하는 경제학적인 원칙문제가 아니라 고용주이신 하나님의 절대 선과 은혜를 뜻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풍경을 보는 것 같은 비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번째, 예수님의 마음은 일찍 온 자나 늦게 온 자나 동일한 일할 권리와 대가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지방은 포도를 따는 계절이 우리 나라와 비슷해서 9월 중순 전에 포도를 모두 딴다고 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가 낮이며 이 시간에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3시(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6시(정오)에, 9시(오후3시)에, 11시(오후5시)에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의 노동시간은 일반적으로 10시간이라고 하는데 11시게 온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등있게 포도원에 들어왔지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3절에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말라."고 하신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주인이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또한 보충 설명하는 말씀으로 신명기 24장 15절에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두렵건데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약적인 말씀을 통해서 그 당시에는 해가 지기 전에 품삯을 지불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품삯을 받고나서 먼저 온 자들이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 내가 너와의 약속을 지켰다.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고 말합니다. 또한 주인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옳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일찍 온 자나 늦게 온 자나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이 아닌 질을 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많이 일했다고 해서 항상 하나님께서 옳게 보시는 것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이 한 자나 적게 한 자나 일한 댓가는 마찬가지로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른 아침에 온 사람만이 불평을 합니다.

랍비의 비유에 보면 늦게 온 자는 일찍 온 자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기 때문에 똑같은 댓가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자 문제가 아니라 포도원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랍비의 비유와 예수님 비유의 차이점이라고 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는 시간이 빠르고 늦음이 없기 때문에 동일한 권리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믿었는냐는 것보다 얼마나 열심히 믿었느냐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계시록 21장 말씀에는 거룩한 성 사면에 각각 세 문이 있다고 말합니다. 윌리암 버클레이라는 학자는 "동편문은 아침 일찍 하나님과 교제하러 온 사람들이고 서쪽문은 황혼 시기에 들어와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다"고 말했습니다. 초대 교부들 가운데 시간을 억지로 해석하려는 분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유래니우스라는 분이 말하기를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은 노아 이전의 사람들이었고, 9시에서 12시 사이에 온 사람들은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에 왔던 사람들이었으며, 정오에서 오후 3시 사이에 온 사람들은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의 사람들이었고, 3시에서 5시사이에 온 사람들은 모세에서 그리스도까지의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오후 5시 이후에 온 사람들은 승천과 재림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된 사람들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른 사람과 늦은 황혼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시기적으로 구분하여 해석하는 것도 잘못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동일한 권리를 주신 것은 모두에게 일할 권리가 있다고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것은 좋은 특권입니다. 11시에 만난 품꾼들은 주인에게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라."라고 말하면서 종일 서 있었습니다. 한 시간밖에 일할 수 없는 이 사람들에게 주인은 한 시간 일할 권리를 부여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린 사람은 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하는 것과 잠자고 쉬는 것의 균형이 맞도록 해주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말씀에 한편 손마른 사람의 치유에 관해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석수였는데 오른손이 마비되어 일을 하지 못하고 가정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낫고나서 얼마나 기쁜지 일하는 즐거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초점은 먼저 온 자들의 즐거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초점은 먼저 온 자들의 잘못된 동기를 나무라고 많이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며 바라고 따르는 자세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기의 잘못된 기도를 회개하는 기도문이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25년동안 교회에서 일했고 봉사했습니다. 집사로서 장로로서 봉사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수를 열심히 믿었습니다. 모태때부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금까지 예수 믿은 것으로 보아서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금까지 예수 믿은 것으로 보아서 이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고, 율법주의적인 생각이며, 공로주의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기 바란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유대 사람 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타이르고 계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두번째, 일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온 자들과 마지막 11시에 온 자들 사이의 비교로 먼저 온자들이 불평을 합니다. 중간에 온 자들은 불평이 없었습니다. 항상 먼저 일하고 믿은 자들이 불평이 많습니다. 그것은 일하는 것을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감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할 수 있도록 건강과 여건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 봉사할 때 우월감은 방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얼린을 제작한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음악가에게 음악적인 재질을 주셨는데 내가 그들에게 악기를 줄수 있다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봉사정신이며 이러한 장인정신이 있을 때 명기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것을 주셨다면 우월감보다 감사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흥정하는 의식보다 감사하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온 자들은 주인과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흥정한 후 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도록 선택되었다는 감사의식보다 흥정의식이 먼저 있을 때 항상 불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고 선택된 것에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적절하게 보상을 주신다고 봅니다. 우리의 땀의 댓가를 주님께서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어도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고 다 기억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갈 어떠한 댓가를 바라고 흥정을 하는 것은 참된 봉사정신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노사문제도 일어난다고 봅니다. 뒤에 온 사람은 조건조차 제시하지 않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심정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된 동기는 그런 마음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다 버리고 먼저 따랐으니 다른 사람보다는 더 보상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비교의식보다는 공동체의식으로 일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볼 때 상대적으로 먼저 온 사람의 댓가가 적기 때문에 비교해서 볼 때 상대적으로 먼저 온 사람의 댓가가 적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의 거의 정해진 하루 품삯입니다. 따라서 10시간 일한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면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시간만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으니까 상대적으로 내 것이 적어보여서 불평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의 정당한 댓가를 받았으면 되었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열등하게 생각하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다한 욕심은 결국 어리석은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빈부 차이가 격심해지는 이유는 공동체의식보다는 비교의식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장 말씀에 탕자와 탕자의 형이 나옵니다. 형은 아버지께, 나는 아버지와 함께 일했고 일도 많이 했는데 나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아우에게만 주느냐고 불평합니다. 자기의 몫을 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우와 비교해서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교의식 속에서 불평이 나오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사이에도, 한 민족 사이에서도 많은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죤 번연은 "이상하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 할 성도가 자기들끼리 싸우다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들끼리 싸운다는 것은 힘의 손실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보다는 내 일의 정당한 댓가를 받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채권의식보다는 채무의식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습니다. 10절 말씀에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줄 알았더니"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더 생각했습니다. 이 공로의식이 곧 채권의식 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 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채무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 우리 사회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공로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율법적인 행위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먼저 온 품꾼들도 공로적인 생각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준 것을 기억하지 않는 자와 받은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억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권리를 주장하고 불평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인의 무조적인 선함에 대해서 자신들의 조건적인 이기심으로 대항하는 일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벵겔이라는 학자가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은 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잘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악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분이므로 결단코 우리들에게 잘못하시지 않습니다.

세번째,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의 은혜입니다.

주인은 언제나 공평한 정의와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했습니다. 당시에 익숙한 공로교리에 대해서 주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공급을 말합니다. 주인의 행위를 보면 자기 하인들을 시켜서 품꾼을 데리고 올 수도 있지만 친히 나가서 품꾼들을 모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능동적인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전에 온 품꾼들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은혜받을 가치도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약에 의하지 아니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선에 기인하는 것이고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인의 포도원에 부름받은 품꾼들입니다. 역사적인 긴 시간으로 볼 때 우리들은 11시에 부름받은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시간에서 볼 때 이른 아침에 온 사람도 있고 저녁 늦은 시간에 온 사람도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품꾼된 다세는 일에 충실하고 주인에게 전적으로 분배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시는 것은 주인의 뜻이고 은혜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품삯에서부터 사명으로 돌리고, 근면하게 봉사하고 받은 것에 만족하는 품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평하심을 생각하고 마지막 시간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기쁨과 여건을 허락하시는 사회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될 줄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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