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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창 1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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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이 계속 성장하기를 소원합니다. 퇴보하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히10:38).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이 계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입니다(시121:1-2).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살았던 아브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격려하신 모습을 봅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삼고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Ⅰ. 이 말씀은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본문 14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분가(分家)를 의미합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을른지 모르나 롯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성인(成人)이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식이 성장하면 부모를 떠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한 원리이기도 합니다(창2:24). 자식이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붙들어 두려고 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아브람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앞부분(창세기 13:1-13)을 보시면 그들은 서로 다투었습니다. 아브람과 롯은 골욕입니다. 친척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투고 싸웠습니다. 그것은 누가 좋은 목초지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많아진 양떼와 소떼, 약대떼로 인하여 그들은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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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말씀드리면 물질문제 때문에 싸운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서로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이 재산이 많아지면서 누가 그것을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다투는 일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약4:1-2).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작은 욕심 때문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해 관계에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할 때 이와같은 싸움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롯과 아브람은 그들 스스로의 재산을 잘 관리하고 늘리기 위하여 싸웠습니다. 좀 더 살찌게 하고 좀 더 잘 먹여 큰 부자가 되려고 하는 욕심, 더 좋고 더 넓은 목초지를 가지려고 다투었습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결별의 아픔을 가져 왔습니다.
결국 롯은 요단의 온 들을 택하여 아브람을 떠났습니다(창13:11).
롯은 자기 눈에 보이는 좋은 곳을 택하여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롯은 자신의 이익 문제에 있어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과 같은" 요단 온 들을 택하여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사람이 물질에 눈이 어두워지면 못할 짓이 없습니다. 롯은 그의 삼촌 아브람을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삼촌이야 어떻든 나 먼저 살고보자는 심산으로 훌쩍 떠나 버렸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조카에게 배신을 당한 그 때, 그 누구도 아브람을 위로하는 사람 없을 그 때에 마음이 상하여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그 때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Ⅱ.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 14-15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 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말씀을 하시는 인격적인 분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꿈이나 환상보다도 더 확실한 말씀으로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중대한 사건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창12:1-3, 7, 13:14-17, 15:1-10, 13-16, 17:1-8, 9-14, 15-22, 18:1-33, 21:12-13, 22:1-

2......).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실 때는 언제나 말씀을 주었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도 하나님은 찾아 오셨고 말씀하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
⑴ "너는 눈을 들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눈을 들라"(lift up your eyers)고 하였습니다.
아브람은 눈을 들어야 합니다. 물질 세계만을 보면서 살았던 눈, 현재의 것만 보았던 눈, 순간만을 보며 살아왔던 눈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려고,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위에 있는 것을 찾게 하고, 위에 있는 것만을 생각하게 하시려고 눈을 들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람을 도와줄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려고, 누가 아브람의 편인지를 알게 해주려고 눈을 들라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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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어느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하였습니다(시121:1-2).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눈을 들어 살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1-)
눈을 들지 않으면 먼 곳을 보지 못합니다. 눈을 들지 않으면 겨우 눈 앞에 있는 것만 보게 될 것입니다. 탄식과 슬픔은 눈을 높이 들지 못하는데서 생겨지는 것입니다.

⑵ "......너 있는 곳에서......"(from the place you are)라고 하였습니다.
현 위치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른 곳으로 가서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네 눈에 흐르는 눈물을 먼저 닦고 보라는 말도 아닙니다. 나중에 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지금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보라는 것입니다. 섭섭함과 괴로움,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요구는 언제나 지금입니다. 지금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마8:22, 4:19, 9:9). 지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막8:34, 마10:38, 16:24, 눅9:23, 14:27). 다른 사람과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요21:22).

⑶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동서남북을 바라 보라"고 하였습니다.
동으로는 요단강과 요단 계곡, 서쪽으로는 지중해와 그 연안, 남쪽으로는 아브람이 전에 내려가 보았던 남방 네겝까지, 북쪽으로는 우뚝 솟은 헬몬산까지 모두 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욕의 눈으로 보면 안됩니다. 탐욕의 눈으로 보면 안됩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만으로 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⑷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하였습니다.
"보이는 땅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은 믿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눈 앞에 보이는 좋은 땅을 다 빼았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많고 더 넓고 더 크고 더 놀라운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잃으면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버린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더 큰 것으로 보상하여 주십니다. 아브람은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 즉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그 거룩한 이름이 그들의 입에서 더렵혀질까하여 롯에게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잃은 것이 아니라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얻었으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얻었으며 자손들을 얻었습니다. 영원히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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⑸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을찐데 네 자손도 세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땅의 티끌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실 구속 언약의 백성들의 수를 말한 것입니다.
땅의 티끌을 셀 자가 누구입니까 구속받은 아브람의 자손들의 수를 셀 수 있는 자는 이 땅에는 없습니다.

⑹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황으로 행하여 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눈을 높이 들기를 원하였습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네 자손을 땅의 티끌같이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일어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고 하였습니다. 발로 밟는 것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바라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다녀 보라는 것입니다. 발로 밟아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실천입니다. 실제적인 것입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된 것이라야 바른 믿음입니다(약2:14-26).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자입니다. 가장 좋은 것들을 주시는 자입니다(약1:17, 롬8:34). 그는 해와 달을, 별들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이슬과 단비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숨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습니다. 그가 지은 산과 들판을 주셨습니다. 봄과 여름을 주시고, 가을과 겨울도 주셨습니다. 가정을 주셨습니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착하고 귀여운 아들과 땅을 주셨습니다. 이것들만 주셨습니까 지혜도 주시고 각종 좋은 은사들도 주십니다(약1:5, 고전12:1-11).
그는 이 모든 것 위에 더 좋은 것,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아낌없이 주셨습니다(롬8:34, 요3:16). 그것은 우리 모두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Ⅲ. 말씀을 받은 아브람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본문 18절에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기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롯은 소돔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수풀로 갔습니다.
롯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육신적 신자와 영적 신자의 차이점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는 것은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신뢰한다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예배는 믿음의 반응, 믿음의 표시입니다.
롯은 아브람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친척은 아브람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기억해 주었습니다. 골욕은 아브람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리지 않았습니다(히13:4). 형제는 그의 편이 되어 주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람은 그를 위해 주지 못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그를 위해 주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되게 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브람은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롯이 아브람을 떠났을 때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아브람이 상상도 못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그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1996년이라는 시간이 우리들 곁을 훌쩍 떠나 버렸습니다. 1996년을 떠나 보낸 것이 못내 아쉬운 분이 있습니까 그리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1997년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 1997년이라고 하는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첫 주일 아침에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는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대한 오늘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동서남북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축복의 기업입니다.
그 기업 속에는 땅도 있고 자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축복의 기업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축복의 기업이 무엇입니까
주님 뜻대로 살고자 받은 사업장, 주님 뜻대로 가꾸어 가는 가정, 주님 뜻대로 일구어 가는 학업, 주님 뜻을 이루기 위해 애를 쓰는 우리의 모든 노력입니다.
더욱 하나님이 주신 경향교회, 하나님이 주신 조국과 조국의 교회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경향학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계 선교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민회 등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기업들입니다. 경향 학원 터 위에 짓고 있는 교회당 건물, 그리고 그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운집된 하나님의 백성들, 우리의 믿음의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가 바라보고 밟아야할 축복의 대지요, 축복의 기업입니다.
그렇게 믿고 바라보는 자에게 하나님은 영원히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람의 하나님은 곧 우리 하나님입니다. 믿기를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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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791/801 등록자:KHMB 등록일시:97/01/05 09:43 길이:67줄
제 목:즐거움으로 사는 해-석원태목사

199

7.

1. 12
즐거움으로 사는 해(에스라 6:13-22)
-새 성전 완공의 해-

I. 역사

기독교 역사란 인간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는 역사의 실체 그 자체입니다. 기독교의 사건은 실제적으로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일이요, 또 그 사건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역사를 기록이란 문자를 통하여 영원히 살아 있어서 말하도록 하고, 또 교훈 하도록 하였습니다. 마치 그것은 오늘날에 타임 캡슐(Time-Capsule) 속에 보관된 신문이나, 기타 문화적 제품들이 몇 백년 후에 꺼내 보는 듯한 생생함 같은 것입니다. 역사의 기록이란 그런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기록은 이스라엘의 역사인 동시에, 그것은 또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상에 주어졌던 두 번째 성전 역사(役事)가 완공된 후 저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민족적, 국가적, 대축제의 한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성전은 세 번 건축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솔로몬 성전(B.C. 95

9. 왕상 6:1-38)이고, 그 두 번째가 스룹바벨 성전(B.C. 516. 스 6:15-18)입니다. 그 세 번째가 신약 시대의 헤롯 성전(B.C. 20-A.D. 6

3.)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본문의 제2성전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70년간의 포로에서 돌아온 후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파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한 후 당시 바벨론 치하에 압제를 당하던 모든 속국들을 해방시켜 주는 해방령에 따라, 유대인들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에게 고국으로 되돌아가는 해방령과 함께 성전 재건의 명도 내렸습니다. 그래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제1차로 귀국하게 되었고, 귀국하자마자 성전 지대를 놓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귀국한 후 2년 되던 시브월 곧 태양력으로 5월이었습니다(B.C. 536. 스 3:8).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엔 사마리아인들이 저들 성전 재건 공사에 함께 참여하려 했으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 거절 이유는 ① 이방인들이었다는 것과 ② 일부 이스라엘인 가운데도 포로 기간 70년 어간에 이방인들과 통혼하여 혼혈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격분한 사마리아인들은 직접적으로 성전 공사를 방해하고, 간접적으로 파사국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어 유대인의 성전 공사를 정치적으로 악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성전 공사는 파사 왕 고레스 4년(B.C. 536.)에서 다리오 2년(B.C. 520.)까지 약 16년 간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 어간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에 낙심해 버리고, 자기 집을 짓고, 재산을 축적하는 이기주의적 삶으로 기울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난국적 역사의 현장에 숨쉬고 살았던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백성들을 책망하고 일깨웠습니다. 그리고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를 재건하게 되었습니다(스 5:).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유대인들이 성전 재건 역사를 개시했다는 소식을 들은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그 동료들이 이 사실을 당시 파사왕 다리오에게 문의하였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성전 재건 공사의 적법성 여부였습니다. 이때 다리오 왕의 답변(조서)은 고레스 왕 원년의 역사적 기록을 좇아 합법이라고 통고했습니다(스 6:1-12). 뿐만 아니라 성전 재건을 허락함은 물론이고, 유대인들이 내는 세금과 건축 경비까지도 원조토록 하였습니다. 그때가 다리오 왕 즉위 2년 즉 B.C. 520년이었고, 공사가 재개된 지 4년만인 516년, 즉 다리오 왕 6년 아달월에 성전 재건이 완공되었습니다(스 4:24, 6:15).
그래서 두 번째 스룹바벨 성전은 첫 번째 성전인 솔로몬 성전 파괴 이후 70년만에 재건됨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축복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Ⅱ. 성전 완공은 즐거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라 6장 16절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전 봉헌식을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에스라 6장 22절에 보면 "즐거우므로 칠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즐겁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즐거움은 성전 재건을 완공함에 있었습니다. 그 성전 완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축복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즐겁게 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어떻게 즐겁게 했는가
첫째는 그의 약속대로 유대인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심으로 즐겁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룻밤 동안에 메대와 파사(페르시아) 연합군에게 바벨론이 망하게 하시고, 파사의 군주들에게 천하제국의 통치권을 옮기고 말았습니다(단 5:30-31).
둘째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해방령을 내리게 하시고 성전 재건령을 내리게 함으로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스 6:2).
그것은 이미 선지자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해 놓으신 예언 성취였습니다. 파사왕 고레스가 이 심부름을 들게 하고 나중에 다리오 왕이 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게 함으로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를 재개하게 하신 것입니다. 에스라 6장 22절 하반절에 "앗수르(파사)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 통치의 주권이 이방 군주의 마음을 주장하사 선민의 해방과, 성전 재건을 적극 돕도록 그 수단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에스라 6장 13절에는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그 동료들이 신속히 준행한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관리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적극적인 협력을 하도록 섭리하셨음을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즐거움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는 합당한 영의 지도자들을 주심으로 즐겁게 했습니다.
에스라 6장 14절에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파사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정치적 지도자는 스룹바벨이었습니다. 종교적 지도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였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성전 재건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습니다(학 1:12-15).
저들은 참으로 깨어 있는 영적, 정치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모처럼 주어진 선민 회복의 역사를 찬란하게 꾸민 빛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70년만에 잠깐 받은 평화의 때를 의미 있게 받아들인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저들이 받은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시대적 사명과 자각심, 그리고 저들의 존재 의미와 목적과 가치와 방향을 바로 알았던 자들입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를 바로 깨달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을 깨우치고 생존 의미와 목적을 깨우쳐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 데 삶의 승부를 걸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저들 백성에게 즐거움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넷째 성전 봉헌식과 함께 유월절(무교절) 절기를 지키도록 함으로 즐겁게 하였습니다(스 6:16-21).
하나님은 저들에게 성전 재건의 완공과 함께 저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저 유명한 유월절을 도로 찾아 주었습니다.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원의 감격과 함께(과거), 현재 저들이 바벨론에서 해방을 받고, 저들 조상들이 지켰던 유월절을 지키게 함으로 저들의 즐거움이 하늘에 사무치게 하였습니다.
사로잡혔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과, 그동안 이방인과 혼혈되어 잘못되게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새 성전 안에서 새로운 선민 공동체로 출발시키는 실로 극적인 축복의 장면이었습니다.
저들의 조상들이 종되었던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새로운 출발의 기점으로 삼았던 유월절을 새 성전에서 지킴으로 저들의 인생과 역사도 새출발시키는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드리는 성전 봉헌식은 이스라엘 역사의 새 동맥이 된 것입니다.

Ⅲ. 바로 1997년은 우리 경향인들에게 즐거움으로 사는 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로 즐겁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세계 역사의 판도도 하룻밤 동안에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의 멸망이요 신흥 제국 파사(페르시아)의 등장입니다.
하나님은 신흥 제국의 통치자 고레스와 다리오로 하여금 선민 유다의 해방과 성전 재건의 역사의 심부름을 하도록 섭리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저들의 시대를 이끌어 갈 합당한 정치적 지도자 스룹바벨과 종교적 지도자 여호수아 제사장 그리고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주심으로 저들 삶의 등불이 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완공된 새 성전 안에서 이스라엘 본연의 역사로 새롭게 출발시키는 공동체적 축제를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즐겁게 한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기록은 오늘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라는 이름으로 재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존재하는 세계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무대요 존재하는 세상의 역사와 문화도 하나님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도구(수단)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저들이 지은 성전 안에서 봉헌식과 함께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새롭게 뭉쳐지는 공동체 의식을 새롭게 출발시킨 이 일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구심점이, 동맥이 하나님의 교회 중심이어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구원사적 예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받은 경향의 1997년은 '하나님이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 해'가 됩니다. 바로 금년은 우리 생애 중 꼭 한 번만 만나고, 보고, 느끼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새 성전 완공의 해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 서울을 살아 갈 우리의 후손들도 세계적 복음의 센터가 될 이 역사적 건축의 실물의 현장은 볼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사진으로 볼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으로만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이 역사의 현장에 직접 참여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고, 함께 모이고, 함께 땀 흘리고, 함께 연보하고, 함께 희생하는 역사 창조의 현장인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즐거움은 영적임은 물론이고 그것은 시각적이고, 피부적이고, 감각적이고, 체험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하에 흙 파는 현장을 목도한 목격자들이요 그 깊은 공간 속에 우람하기 짝이 없는 주차장과 체육관과 성전의 기초 모습으로부터 이 서울의 한 공간에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가는 성전의 종탑까지도 친히 보는 역사 현장의 목격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년에 우리 경향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즐거움으로 사는 해'가 되는 것입니다.
경향아!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경향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다고......
그 분만이 피곤한 경향인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그 분만이 무능한 경향인들에게 힘을 더하실 것입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집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경향인들은 새 힘을 받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그 날개로 바람을 받아 푸른 창공을 올라감 같을 것입니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며,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경향인들을 즐겁게 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즐거움이 무엇인가 바로 '새 성전 완공의 해'란 축복과 승리의 깃발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 당신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우리 경향인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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