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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역사 (딛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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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의롭다 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역사하시되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물체에 관한 것을 중심하지 않고, 인격 하나를 완전하게 이루어 놓은 것을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완전히 역사하신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생이라도 완전하게 만들어 놓은 것을 완전 역사라고 한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역사보다도 만물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 하나를 완전히 만들어 놓은 것이 하나님의 제일 크고도 완전한 역사이다. 이제 의롭다 함을 얻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중생케 하는 역사 (5상반)
중생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범죄를 용서해 주는 역사이다. 예를 든다면 더러워진 의복을 깨끗하게 씻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의가 필요없이 깨끗해지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의라는 것은 깨끗해지는 일이 아니요, 깨끗하지 못한 마음이 있어도 깨끗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노력이 따른 것뿐이다. 그러나 중생이라는 것은 사람이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깨끗하게 살아 보려는 것이 아니요, 도덕을 초월해서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가 없고, 깨끗해진 사람으로서 자동적으로 생활의 열매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중생의 역사라고 한다. 만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마음에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깨끗하게 살아 보려는 마음만 있다면, 신령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깨끗함을 받은 사람끼리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어 찬송하고 기도할 때에 그 예배를 통하여 깨끗한 사람으로서 일할 수 있는 역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내리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 의의 역사라는 것은 행하라고 하는 법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놓는 것을 목적한 것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중심에 성결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도덕적으로 사람에게 바로 보이려고 하는 것만 있다면, 자동적으로 교회의 모든 일을 외식으로 행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시게 된다. 이것은 당신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보다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므로,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상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목적하고, 하나님을 향하여야만 된다.

2. 새롭게 하는 역사 (5하반)
성신은 항상 새롭게 해 주는 역사를 하신다. 예를 든다면 푸른 나뭇가지에는 항상 새로워지는 일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이 산 믿음을 가지게 될 때에는 예배를 드리든지 기도를 하든지 항상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를 이루듯이 산 믿음을 가진 자는 성신의 새롭게 해 주는 역사에서 큰 발전을 보게 된다. 생명이 있는 종교라는 것은 성신의 새롭게 해 주는 역사가 있으므로 최후 승리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성신의 새롭게 하는 역사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체험이 있게 된다.
첫째:항상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게 된다.
둘째:항상 말씀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게 된다.
셋째:항상 생활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게 된다.
인간이 볼 때는 뚜렷한 역사가 없다 하여도 마음이 새로워지고, 말씀이 새로워지고, 생활이 새로워지므로 완전 인격과 완전 지식과 완전 생활의 열매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복된 가정과 복된 교회와 복된 나라를 이루게 되는 열매는 인간의 힘을 초월한 성신의 새롭게 하는 역사에 있는 것이다.

3.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 (6-7)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하나님께 받으셨으므로 그로 말미암아 우리도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게 된다. 모든 사람이 같은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체험한 자는 많지 못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는 자기 개인적인 신앙 하나를 위하여 노력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서는 종들에게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분량이 각각 다른 것이다. 강단에 서는 종이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지 못한다면, 그 교회를 부흥시킬 수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강단을 통하여 모든 피곤한 영들이 소성을 받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가 점점 더 부패되어 가는 것은 강단에 서는 종들이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풍성한 은혜를 받지 못하고, 강단에 서게 될 때에 넘쳐흐르는 역사가 없으므로 은혜를 갈망하던 양떼들이 실망을 하고, 세속으로 치우치는 일이 있게 된다. 나의 체험으로 말한다면 강단에 서는 종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풍성히 받지 못할 때에 설교하는 자의 자신부터 복잡한 마음으로 생활하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으면서 강단에 서는 종이 된다면 평강에 평강을 누리는 생활에서 모든 일이 다 자유로운 열매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것은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음으로만 해야 할 의무를 완전히 다하게 된다. 누구든지 풍성한 것을 받지 못한다면 자동적으로 의로운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불행을 가져오는 부패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풍성히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한 직업에 불과한 일이 되고 말 우려성이 많다. 오늘의 교회가 목사의 직업소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 것은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지 못하고 강단에 서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생활에서 의로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4. 선한 일을 힘쓰게 하는 역사 (8)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직접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사람을 들어서 하게 하시되 성신으로 역사하신다. 이것은 사람에게 성신의 격동을 주어서 선한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마귀의 역사를 충만히 받은 사람은 정욕이 발생하므로 죄를 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요, 성신의 역사를 풍성히 받은 사람은 사랑의 불이 타므로 선한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항상 의의 격동이 마음에 있으므로 남을 살려 보겠다는 불타는 마음에서 고생을 낙으로 알고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한 일을 하지 않고는 마음이 괴롭고, 선한 일을 항상 해야만 마음이 기쁘도록 끔 역사하는 것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역사이다.

결 론
의라는 것은 하나님밖에는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는 마귀를 이길 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타락한 인생이라도 중생케 하는 동시에 생명으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는 동시에 역사를 풍성히 부어 주시고, 풍성히 부어 주시는 동시에 선한 일을 힘쓰도록 끔 역사하신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성경 본문:딛 2:11-15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입니다. 분단
국가였던 독일도 서독이 동독을 흡수함으로 통일국가가 되었고 예멘 역시
남과 북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서독은 당초 동독을 흡수통일 하는데 소용되는 비용을 1조 마르크 정도로
잡았지만,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고, 약 2조마르크(약 9백50조원)가 넘어서
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북한을 흡수통일 하는데 얼마의 비용이 들 것인가에 대하
여 [일본 장기신용은행 종합연구소]는 2천억달러(약 160조원)로 추산했고
국내 경제학자들은 40조원에서 많기는 6백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통일을 위한 비용이 천문학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도 엄청난 생명 유지비가 들아갑니다. 마
시는 물,산소, 심장이 뛰고, 위가 수축작용을 하고, 세포가 생성되고, 먹은
음식물이 소화되고,그것이 열량으로 변해 각 기관에 보급되고, 자동으로
손, 발가락이 움직이고, 듣고, 보고 걷는 것 등,
돈으로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면 하루에 1000만원 정도의 시설비와 유지비
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달이면 30억이 되고, 1년이면 360억원이 됩니
다.

그런데 우리는 병들면 돈내고 병을 고치면서도 매일 1천만원 정도의 생명
유지비를 공짜로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전혀 관심도 없고 감사도 없습
니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남북한 통일의 경우 1인당 비용을 산출하면 890만원 꼴이 된다고 합니다.
죽을 내 생명이 죄사함 받고 다시 살기 위해서는 얼마의 돈이 필요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본문은 그것을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돈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은
혜란 조건부가 아닙니다. 조건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이 주는 몇가지 교훈을 찾겠습니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주십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은혜라든지 거저 주신다든지 하면서 싸구려인
양 치부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받는 나는 은혜였고, 거저 받은 선물이었습니다만 그 은혜와 선물을 주시
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면 죽게 하
시고 그 공로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결코 값싼 은혜도 아니고 싸구려 상
품이 아닌 것입니다.

고층 빌딩마다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가지 돈을 내고 엘리베이
터를 타본 일이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 무역센타빌딩이나, 엠파이어스테이
트빌딩은 관광객들에게서 돈을 받습니다만 그러나 대부분의 빌딩은 공짜로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베이터 자체가 공짜인 것은 아닙
니다.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당 5천만원 1억 혹은 2억 하는 것들도 있
습니다. 내가 그 엘리베이터를 공짜로 탄다고 해서 엘리베이터가 공짜인 것
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기까지에는 예수님의 희생과 십
자가에서의 피흘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보내셨고, 죽게하신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고"고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인종과,
지역과, 계급과, 성분과,출신을 포괄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십니다. 단, 예수를 믿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어느날 밤 관장이 야순을 돌다가 도둑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관가로 데려
다가 엎드려 놓고 볼기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갑자기 "아이
구 태조대왕 등뼈 부러진다"고 고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볼
기를 치자 도둑 역시 계속하여 "태조대왕 등뼈 부러진다"며 자기가 태조대
왕의 후손임을 암시하는 바람에 풀어 주었습니다.

그 기발한 소문을 듣게 된 어떤 도둑이 밤에 도둑질을 하다가 야순관리에
게 붙잡혀 관가로 끌려가 볼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볼기를 내려치기 시작하
자 그 도둑은 "아이구 염라대왕 등뼈 부러진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제딴에
는 아무려면 태조보다야 염라대왕이 더 높겠거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
니다. 그런데 그를 때리던 관리는 염라대왕이라면 이를 가는 사람이었습니
다. 그날 그 도둑은 염라대왕 덕택에 반쯤 죽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로마서 10:13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
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고, 사랑받
고, 복을 받게 됩니다.

2. 우리를 양육해 주십니다.

12절을 보면 "우리를 양육하시된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
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영적으로 출생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태
어난 생명은 양육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부산 일신병원에 갔다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라고 있는 신생아실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미숙아로 태어난 생명이 인큐베이터안에서 보호받으
며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일정기간 동안으로 끝나야 합니
다. 제일 바람직한 것은 태어난 새 생명은 엄마의 품 속에서 고동소리를 들
으며 사랑받고, 보호받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자라고 신앙이 자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양육되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입니다. 그
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
입니까
내가 누구의 보호를 받고 양육받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
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대통령은 경호원들의 철통같은 경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는 간수의 경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지키는 사람
은 마귀의 소유인 것입니다.
1800년대 미국의 시인이었던 롱펠러(Henry Wadsworth Longfellow) 는 보
통 종이 위에 그의 시를 써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의 시는 6천
달러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10불 미만의 종이 위에 그렸던 모나리자나 만종은 지금 수십만 달러의 명
화가 되었습니다.

누구의 것이 되느냐, 누구의 보호를 받느냐, 누가 나를 키워주느냐가 중요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키워주시고 이끌오 주신다는 것이 본문의 강조입니
다.

3. 바르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양육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르게 살라는 것입
니다.
12절을 보면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
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경건하게 살고 세상 정욕을 버리고
근신하고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호화여객선 [아틀랜틱호]가 핼리팍스 해안에서 조난당해 수백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생존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우체국을 찾아가
가족들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
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길이 간직
하기 위해 전보용지를 액자에 넣어 사무실 벽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
고 그는 날마다 "구원 받았다"는 전보내용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의 채찍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청년들의 모임에서 바로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묵
은적이 있었습니다.
참석했던 젊은이 90%가 잘 사는 것보다는 바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했습
니다. 그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잘 사는 것과 바로 사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잘사는 것.1) 잘 먹고, 잘 쓰고, 잘 노는 것이다.
2) 하고픈 짓을 하고 사는 것이다.
3) 제 멋대로 사는 것이다.
4) 남의 간섭을 배제하고 사는 것이다.

바로 사는 것.1) 자기를 통제하며 사는 것이다.
2)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며 사는 것이다.
3) 가치있게 사는 것이다.
4) 더불어 사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관점과 해석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자녀된 사람들이 바르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
다. 바르게 삽시다.

4. 선한 일에 열심이기를 원하십니다.

14절 끝을 보면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하려 하심이니라"고 했
습니다.
구라파를 휩쓸던 나폴레옹이 1백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러시아를 쳐들어갔
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러시아에서 참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워터루
전선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그는 외쳤습니다. "모든 것이 끝장이다. 각자 살
아 남을 방도를 찾아라"고.
그러나 내가 믿는 예수는 너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믿으면 산다,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산다.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이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최종 목적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헤야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을 선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영국 웨스터민스터 교회 목사인 [모건] 박사에게 한 소년이 편지를 보냈습
니다. "저는 지난밤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집회에 참석한 후 예수님을 구주
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이후로 나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차 있
습니다. " 여기까지 편지를 읽은 모건박사는 깊은 생각이 잠겼습니다. 설교
를 듣고 깊은 슬픔에 빠지다니.. 그러나 그 다음을 읽는 순간 기쁨이 되살
아났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토록 슬퍼하는 이유는 제 아버님이 아직 예수
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사는 날 동안 해야할 가장 귀하고 크고, 위대하고, 절실한 선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 내는 것입니다.그것이 나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
입니다.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제 목:선한 일에 힘쓰라
 본 문:딛 3:1-9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로 삼으셨습니다.

1. 전에는 무익하고 헛된 일을 만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딛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 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2. 그러나 이제는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예비함을 받은 자들로 주께서 부르셨습니다.

딛 3: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3. 이에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있을 뿐입니다.

딛 3: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
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4. 그렇다면 이 선한 일은 어떤 모양으로 난다 하였습니까

딛 3: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
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1) 관용성

인생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라는 색안경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한 인류 공동체라는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관용하는 마음은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대개 각박하고 몰인정하고 포악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 속에는 절대로 평강이 깃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너그러워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관용하는 마음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눈을 눈으로, 이는 이로 갚겠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또한 관용하는 마음이란 후덕한 마음입니다. 이해심이 얕고 좁은 마음이 아니라 깊고 넓은 마음입니다.

관용하는 마음은 겸허한 마음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차별 대우하지 않고 모두를 후하게 대해 주는 마음이 겸허한 마음입니다. 이처럼 너그러운 마음, 용서하는 마음, 후덕한 마음, 겸허한 마음이 관용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관용하는 마음은 기다려 주는 마음입니다. 현재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중에 기다랍니다. 현재 갈릴리 호수에 그물만 던지던 베드로가 내일의 사도가 될 줄로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의 핍박자 청년 사울이 내일의 그 위대한 사도바울이 될 줄로 누가 알았겠습니까

빌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하나님께서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받으심에 이미 관용의 원리가 있습니다. 넓은 마음 이해하는 마음은 곧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크고 비밀한 일을 행하실 수 있는마음입니다. 그 모든 것은 곧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2) 온유함

나무그릇은 물을 받아들이면 그 물이 촉촉히 배지만 쇠그릇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강한 사람이 영역을 확대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
리로다"(시편37:11)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현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칩니다. "세상일은 결국 온유한 사람이 승리한다."

중국의 노자는 상창이라는 스승에게서 도를 배웠습니다. 상창이 늙어서
죽게 될 것을 안 노자는 스승을 찾아가서 "사부님, 사부님께서 세상을 뜨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하자 상창은 얼마동안 노자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열고는 "내 이빨이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다시 상창은 "내 혀는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노자가 "사부님 혀는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상창은 "알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노자는 "사부님,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큰절을 하고 물러 나왔습니다.

노자는 스승에게서 이런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빨은 굳고 강하고 날카로워서 입술과 혀를 물어 피를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러지고 깨지고 빠져나가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혀처럼 바보스럽게 물리고 피가 나지만 마지막까지 남아있게 됩니다. 노자는 온유와 겸손한 사람만이 오래 남는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5.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어떤 일을 친히 하십
니까

딛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
어주사
딛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하심이라
1)성령의 역사로
영적인 힘으로 일합니다.

2)주의 은혜로
대속하신 주의 은혜로 힘을 입어 일합니다.

3) 후사로 삼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르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기업을 유산으로 받게 하십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8)

주님은 우리들을 선한 일꾼으로 쓰시고자 먼저 제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용하심과 온유하심의 덕분입니다.관용성과 온유함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한국교회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고후 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궁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하나님은 왜 우리를 여기 살게 하십니까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백성
 본 문:딛 2:11-15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가만히 보면 천칭
만친 구만 층이다. 그러나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마귀에 속한 마귀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고 마귀의 백성은 마귀백성답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마귀의 백성과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하여 우리의 삶이 혼돈이 올 때가 너무 많아 갈등을
느끼며 방황할때가 많다. 그러면 하나님의 친 백성의 삶은 어떤 삶인가
그것을 본문의 저자요 예수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본문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케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을 중심 하여 "하나님의 친 백성의 삶"이란 제목으로 잠시 생각하며 한해를 보내는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았는지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12절에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는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하였다. 여기에 "살고" 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데 어떻게 살리시는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우리를 양육함으로 살리시는 것이다. 본문에 "우리를 양육하시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친히 양육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양육"이란 자라나도록 길러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키가 자라고 몸이
자라고 지식이 자라도록 양육하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육을 받지 못하면 한시라도 살아갈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만드시는 것으로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이 우주를 친히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주관하고 계시며 많은 별자리들을 붙잡고 계시며 이 지구 위에 기후를 붙잡고계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본문11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죽이고 파멸케 하는 은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주고 능력을 주어 구원을 주시는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구원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다. 남녀노소 빈부 귀천 없이 다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양육하시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지난 일년 동안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행복 자들인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받아도 이 은혜를 은혜 인줄 알고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은혜를 은혜 인줄 알지 못하고 그 은혜를 즐기지 못하고 지나가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둘째 경건으로 살게 하셨다. 본문에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것이다. 우리가 경건으로 사는 것은 아무렇게나 경건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버릴 것을버려야 경건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버릴 것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경건한 삶을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성도들의 삶인 것이다.

셋째는 예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다. 하나님이 왜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경건한 삶을 살게 하셨는가 그것은 본문13절에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 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였다. 이 말은 "장차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은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하였다. 우리 성도의아품과 고난은 우리 주님이 오셔야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은 이 세상의 고난의 끝이요 괴로움의 끝이요 눈물의 끝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을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는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
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성도들을 살게하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셨다.

본래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이였다. 그러나
중간에 사단이 찾아와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를 꼬여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셔서 사단의 속박 아래 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신것이다. 본문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 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셨는가 를 말하여주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는데는 세 가지 단계가 있는 것이다.

첫째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다. 본문에 "구속하시고"란 원어의 뜻으로"속전을 받고 놓아주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남의 수하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를 그 값을 지불하고 그를 풀어 주는 것을 의미 한다. 오늘 우리가 바로 사단의 수하에서 사단의 종노릇하든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된 것이다. 그것도 그냥 구속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자신을 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대신"이란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 되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우리 대신에 허락하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풀어 주어 자유 하게 한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 놀라운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아직까지도 돌이킬 수 없는 죄인 된 몸으로 괴로워하며 고통하며 살다가 결국은 이 세상 끝날에 지옥으로 파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신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시사 지옥까지 내려 가셨다가 우리의 죄와 허물의 값을 다 치르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신 것이다. 이 시간 우리가 이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둘째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 본문에 "우리를 깨끗하게하사"라고 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흘리신 피의 공로에 의하여 사단에 손에서
벗어났다고 완전한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라 깨끗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깨끗하게"라는 말은 그전의 우리 성도들은 더러움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깨끗하여 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무조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만 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3: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네게 이르느니 사람이여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여기 보면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 물과 성령으로 이다. 여기에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듣고 읽은 여호와의 말씀이 마음에 깨달음바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날의 죄가 생각나고 허물이 생각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난 우리의죄와 허물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회개하여야 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를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여 주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셨는데 그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를 주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서는 "선한 일"이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의미한다. 즉 주를 위한 일들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헌신이 있어야 하고 충성이 있어야 하고 봉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일에 열심을 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여야 한다. 둘째 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르는 교사의 일에 열심을 다하여야 한다. 셋째는 주이름과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열심을 다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땅에서 성도의 임무요 사명인 것이다.
 셋째.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생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 받고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기만 하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는가 그것은 본문15절에 "너는 이것을 말하고 근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 하여 누두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성도들의 생활을 온전히 이룬 열매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말은 우리 성도가 신앙생활을 온전하게 하지 못할 때는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마5: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밟힌다"는 말은 본문에 "업신여김" 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금이 소금의 맛을 내지 못하면 밖에 버리어 업신여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성도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자들이 더러 있다. "저것 이 집사야"라고 업신여김을 받는 다면 그 사람은 성도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업신여김을 받고 짓밟힘을 받는 성도들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못 본 척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이것을 말하고 라고 하였다. 이는 잘못된 것을 지적하여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성도들 가운데 옆에 있는 성도가 잘못한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 인심을 잃게 됨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옳지 않는 것을 보고도 못본 척하고 있는 것이다. 불의 인줄 알면서 묵인해 버리는 것이다. 자기의 인기 유지를 위하여 잠잠하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라고 명하고 있다. 우리는 누가 잘못하든지 그것을 지적하여 줄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남이 싫어하는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요즘 목사들 가운데서도 남이 듣기 싫어하는 말은 하지 않고 할 수만 있으면 듣기 좋은 말 만하여 자기 인기만 유지하려는 자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이 병들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권면하여야 한다. 주님의 은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여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자들을 보고도 그 사람이 싫어하고 미움을 살까 봐 말못하고
지나가지 말고 분명히 지적하여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아니하면 근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권면"은 좋은말로 권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성도들은 옆에서 잘못할 때에 권면하여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신앙에 올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사명이요 의무인것이다. 어떤이들은 목사만이 심방하고 권사만이 심방하여 권하는 것
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직분에 관계없이 우리 이웃이
믿음의 실패하고 불의를 저지르며 주저 앉아 있을 때 찾아가서 말씀으로 조용히 근면하여야 한다. 그래서 돌아오게 하여야 한다.

셋째 책망하여야 한다. 이는 권면하여도 듣지 아니할 때는 책망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책망을 해서라도 깨닫게 하여 죄에서 떠나게해야 하고 하나
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들이 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책망은 권면보다
강도가 좀 강한 것이다. 이 땅에 있을 때 책망을 듣고라도 돌아오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잘못된 일이 있을 때 주로 주의 종들이 책망을 많이한다.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지적하고 권면 하고 책망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 혹이 주의 말씀 듣고
마음에 찔림이 있으면 회개하기를 원한다. 책망을 듣고 이 말씀은 내게
합당한 말씀이라고 생각되면 회개하여야 한다. 한해의 마지막 주를 보내면서 우리는 회개할 것 회개하고 고칠 것 고침 받고 새해를 맞이해야 될 줄로 믿는다. 지금 이 시간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양육함을 받고 다시오실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온전히 구속받아 하나님의 친 백성의 삶을 살아서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 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은혜

 본 문:딛 2:11-14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영토의 크기나 인구가 작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점령하여 3국을 통일하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나라에 없는 화랑도와 화랑정신으로 조기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신라의 화랑들은 16세기 부터 충효신용인의 화랑오계로 무장하였고 문무를 갈고 닦아 등 동양지제목들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당백의 용사들로 성장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라 했습니다. 여기 양육이란 헬라어 "과이듀우사"로서, 이는 스승이나 부모가 그 제자나 자녀를 교육하며 훈련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있습니까

1.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도록 양육하십니다.

(1) 하나님의 은혜의 훈련은 먼저 경건치 않는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게 하는 훈련입니다. 경건치 않은 것이란,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공경성이 없는 것이요, 이세상 정욕이란 불신앙적인 태도로, 육체의 자연적 욕구만을 위해 사는 것을 뜻합니다. 즉 악하고 헛된 욕망과 부패하고 더러운 욕망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롬1:24, 벧전1:14)

(2) 그러면 왜 이런 것들을 버리도록 훈련하십니까 성도는 이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요(갈5:24),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열락과 부범한 우상 숭배는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입니다(벧전4:1-3). 뿐만 아니라, 실패와 절망과 침륜과 멸망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딤전6:6).

(3) 그러므로 이 모든 해로운 것들을 철저히 다 버리고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까지 훈련과 연단과 양육을 중단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악습과 불신앙과 악한 정욕을 고집하면 할수록 연단의 강도와 시간은 더욱 강해지고 깊어지고 연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속히 버릴 것을 버리고 끊을 것을 새 축복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도록 양육하십니다.

(1) 하나님의 은혜의 연단에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면이란 먼저 버릴 것을 버리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면이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무장시키는 과정입니다. 즉 개인적으로 깨어 근신하며 이웃과의 관계가 의롭고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이 세가지중 가장 기본은 스스로 먼저 깨어 근신하는 것입니다. "근신함"이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 즉, 방심하거나 나태하거나 졸지않고 정신적 영적으로 깨어 긴장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레코트는 "영적으로 깨어있어 마음과 정서가 심히 안정된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의로움"이란 (유세보마이-잘 공경하라, 잘 섬긴다는 뜻)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 앞에 진실과 정성으로 최선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바로 이런 열매가 우리의 삶에 풍성해지도록 하나님의 은혜는 끊임없이 양육하시며 연단하십니다. 과연 이런 열매가 아름답게 맺혀 있습니까

3. 그리스도의 영광의 재림을 기다리도록 양육하십니다.

(1)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입니다. 죽음은 과거의 사건이요, 부활은 현재적인 사건이라면 재림은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마지막 사건인 샘입니다. 주의 재림의 날, 그는 영광중에 오셔서 모든 원수를 제하시고 성도들을 모아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만국을 새롭게 하시며 함께 왕노릇 제하시고 성도들을 모아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만국을 새롭게 하시며 함께 왕노릇 하실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주의 재림이 318회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260장, 7,959절중 매25저라다 한번씩 언급된 셈입니다.

(2) 그러므로 주의 재림은 반드시 성취될 복스러운 소망이요, 영광의 소망입니다. 이 영광의 소망을 갖은 자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선한 일에 힘쓰게 됩니다. 바로 주님의 재림의 날 행한대로 갚아 주시는 영광스런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한시라도 재림의 날 최후 심판과 상급주시는 날을 잊지 않도록 성도들을 양육하십니다. 우리들도 주의 재림을 기억하며 남은 날 힘써 충성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교회의 교육적 사명
구 약:잠언 2:1-12
신 약:디도서 2:11-14

교회의 사명 가운데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교육적 사명입니다. 교회는 선교를 하여야 하는 것처럼 교육에도 주력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교회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일입니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 교수였던 스마트박사는 "복음이 순수하게 전해지지 않는 교회나 성례가 올바르게 집행되지 않고 있는 교회는 결함이 있는 불완전한 교회일수 밖에 없는 것 같이, 교육적 기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교회는 결함을 지닌 교회일 수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급성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교회의 교육적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부분의 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교육하는 일에는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런 약점을 파고든 것이 여호와의 증인이나 구원파 교회들입니다. 이들은 예배는 드리지 않고 모여서 성경공부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당한 성경 지식으로 무장하여 좀체로 우리가 상대하기 어려운 점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교회들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예배의 사명을 수행하지 않으므로 역시 한쪽으로 치우쳐 잘못된 길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육적 열의는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1. 유대인의 교육열

교육을 말할 때 우리는 유대인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배움의 민족이요. 책의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중세부터 "교육받지 않은 유대인은 찾아볼 수 없다. 유대인 밑에서 자라나지 않은 유대인 외에는"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교육하는 민족입니다. 유대 어린이들의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영웅은 용사도 왕자도 아닌 현인입
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성서를 배우는 일이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유대인의 남자는 12살이 되면 성서나 기도서를 읽을 수 있어야만 했기에 한 사람도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기도 드릴 때는 짧게, 배울 때는 길게 시간을 잡으라."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는 사람쪽에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고, 진리를 추구하고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배우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드릴 때는 바른 정신을 가지고 짧은 시간만 기도드릴 것이며, 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지시하신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어떤 일에 실패했을 경우 먼저 교육이 바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멸망되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군대에 의해 멸망된 것이 아니라 교육이 바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읍에 한 유명한 랍비가 찾아 왔습니다. 읍장이 이 랍비를 안내하여 읍의 경비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한 곳에는 사병들이 붐비고 있는 작은 요새가 있고, 또 다른 곳에는 나무 울타리로 둘러친 보루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읍장은 랍비를 모시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 랍비는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 이 읍이 어떻게 해서 지켜지고 있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읍을 지키는 것은 사병이 아니라 학교입니다. 왜 나를 맨 먼저 학교로 안내하지 않았습니까"

유대인은 2천년 동안 나라는 없었어도 그 민족과 전통이 없어지지 않고 보전되었는데, 이것은 순전히 교육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들은 성서를 배움으로써 유대인이 되고, 아이들에게 성서를 가르침으로써 유대인임을 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켜 새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만,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계속 성장하고 보전되는 것은 교육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유대인이 성서를 배움으로써 유대인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육의 목표

오늘 읽은 본문을 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서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건과 세상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정신을 차려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하며 복된 희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며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교육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은혜안에는 교육적 기능이 간직되었다고 보겠습니다만 사람편에서 볼 때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육의 목표는 먼저 소극적으로는 불경건과 세상 욕심을 버리게 하는데 있고, 다음 적극적으로는 정신을 차려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는데 있습니다. 14절의 말씀을 더 첨가한다면 교육의 목표는 성결과 선한 일에 열심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소극적인 목표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불경건과 세상 욕심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모든 생활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삶의 목적은 남을 누르고라도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직도 우리의 생각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상은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것이 사탄의 생각이라고 가르칩니다. 돈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 가운데 아무 것도 살 수 없습니다.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딤전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어리석고도 해로운 여러 가지 욕심에 빠질 것입니다. 이것들은 사람들을 파괴와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가다가 믿음의
길을 잃고 방황한 나머지 크게 슬퍼하며 상심하게 된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6:9-10). 오직 물질 만능주의에 젖어있는 아이들에게 혹은 어른들에게 이런 사실을 가르친다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또 불경건을 버리라고 하였는데, 담배를 피는 것을 예사로 하는 요즈음 학생들에게 술 담배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일도 지극히 어렵습니다. 반드시 술 담배가 불경건한 일에 속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도 없지만 또 그것이 경건한 일에 속한다고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술 담배를 먹지말라는 규범을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다만 훈련과 교육에 의해서 점차 지양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불경건과 세상 욕심을 버리게 하는 교육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세상적인 사고로 절어있던 의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일이기 때문에 그만큼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사실상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교육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교육의 적극적인 목표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것은 "정신을 차려 바르고 경건하게 사는 일"과 "선한 일에 열심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입니다. 오늘 불의가 가득찬 세상 속에서 의롭게 산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세워나가는 일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불의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착취하며 억압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정의란 눌린 자를 해방하는 일입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 58:6-8).

오늘 우리 사회가 급속도로 산업화 기계화 되어가면서 그리고 경제적인 부를 쌓아감에 비례해서 불평등과 부조리와 불의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착취와 억압과 수탈과 기만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교회의 교육적 사명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바로 가르쳐 주는 일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경건한 삶을 훈련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기독교의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성실한 삶의 태도입니다. 경건한 태도란 마치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조심스럽게 갖는 태도 혹은 신하가 임금 앞에서 갖는 조심스러운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속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조심스러운 태도가 바로 경건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건한 생활은 훈련받지 않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궁중 예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하루 아침에 궁중에 들어가 그 생활 태도와 관습에 익숙할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믿은 순간부터 경건하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우리는 이제까지 육체를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전혀 이 영적인 생활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건한 삶을 살려면 결국 육체적인 욕망을 억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생활을 하려면 훈련을 받아서 그 생활이 습관적인 생활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일정하게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생활 습관이 되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지속적이고 끈질긴 노력과 훈련을 통해서만 참된 경건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 때 경건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늘 자신을 훈련하시오. 경건의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고 지금의 생명 뿐 아니라 장차 얻을 생명까지도 약속해 줍니다."

끝으로 "선한 일에 열심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이 우리의 교육목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신앙입니다. 아무도 넘을 수 없었던 죽음의 산이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극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언제나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제로 상당히 무능력한 신앙인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에 대하여 회의적인 것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고백은 쉽게 나올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사실 적극적인 신앙은 하루 아침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얻는 체험과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가르쳐 주는 말씀을 부지런히 배울 때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고, 우리의 소극적인 생각이 완전히 뒤바뀌어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다하는 적극적인 사고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기적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의 역사에 동역자가 되려면 적극적인 사고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목표한 일이 선한 일이라고 확신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나갈 때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취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 없음으로 해서 거기에 동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되고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대담하게 나가 목표를 향하여 돌진할 때 거기에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바로 우리의 열심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교육적 사명을 재삼 확인하지 않으면 안될 때에 있는 것입니다. 배우지 아니하고 가르치지 아니하고는 교회 성장도, 우리 믿음의 성장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성서를 배우므로 유대인이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고는 올바른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배워야 하겠습니다. 배우는 일에 적극성을 띠어야 하겠습니다. 부지런히 경건의 훈련을 쌓아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배워 이 땅위에 불의를 몰아내고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교육적 사명입니다. 교회의 교육적 사명을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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