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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타락 (살전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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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어진 육체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다. 그래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존재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을 받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영의 기능을 상실함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가 끊어진 즉 하나님을 감각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자들이 되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
전 5:23)”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과 생기, 즉 영으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 둘로 분리된다. 흙으로 돌아가는 육과 소멸되지 않는 영으로 분리된다. 본문은 영과 육과 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혼’은 육체가 갖는 기능 중에 하나이다. 인간의 육체가 정신적 기능이다. 인간이나 동물들은 움직이는 육체를 가졌으므로 자기가 자기를 움직여야 되고 움직임에 있어서 판단을 해야 한다. 판단에 있어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동원되는 법이다. 바로 그 지정의의 자리가 ‘혼’이다. 생물학적 차원에서의 혼과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영은 다른 것이다.
인간들의 관점에서 보면 ‘영’은 필요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이 제 기능을 상실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은 ‘영’에 대하여 감각이 없고 전혀 무지하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성경은 사람의 영을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말한다. 등은 그 등 자체가 불을 켜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기름이 있어야 빛을 낼 수 있다. 인간의 영이 죽었다는 것은 마치 등에 기름이 없고, 전등에 전력이 공급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인 것이다. 인간이 이런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죽은 것을 모르는 이유는 인간에게 혼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 존재의 의미에서는 영과 육으로 만들어졌으며 우리가 죽을 때도 영과 육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이 ‘혼’이라는 것은 동물의 생물학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능적인 면에서 볼 때는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시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3분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이해가 제한되어 있기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인 생명이 살아 있기에 자신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음에도 살아가는 것이므로 자신들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생물학적인 생명이 끝이 나야 비로소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이 죽어 있는 상태에서 우리의 몸은 불꺼진 초요, 불꺼진 등인 것이다. 비록 혼이 있어서 지정의가 활동하고 생물학적인 생명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불이 붙어야 되는 것이다. 인간은 전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자신들의 존재 의미와 어떻게 부름받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되는 존재인가를 망각하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
이 생명이 된지라(창 2:7)”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살아 있는 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죽은 것이다. 보통 자연인들은 다 죽어 있는 영들인 것이다. 육체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죄와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 다 죽었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을 그냥 육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육체와 육체가 갖는 생물학적 차원의 혼만 있을 뿐이지 영은 없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자들을 표현할 때 ‘육체를 따라’ ‘육신을 좇아’ 등의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어 넣으신 생기가 우리에게 있는 한 우리는 창세기 1장에 나타난 것과 같이 ‘심히 좋았더라’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밀접한 관계 속에 있을 때 인간에게는 참된 행복이 있으며, 감사와 찬송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영과는 달리 모든 동물에게 존재하는 혼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보통 마음이라고 표현한 경우가 많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
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
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막 7:21-22)”
인간은 영이 제 기능을 상실하자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으로부터 하달되어야 되는 영역, 하나님으로부터 근거되어야 하며, 목표가 설정되어야 하는 모든 생명과 가치가 끊어지자 인간이 마치 끈이 떨어진 연과 같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된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도망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하게 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과 같아 지려고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나의 주인이 되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단코 인간 자신의 주인이 될만한 실력과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결국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인간의 주인이 되고만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탄의 지배 아래 종노릇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영이 제 기능을 상실하고 죽어 있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식과 진리와 삶의 목표 등이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사탄의 휘하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저들을 더러움에 내버려 두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시체는 자기가 어떻게 다루어지든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또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영이 죽어 있으니까 몸이 갖고 있는 욕심에 의해서만 움직여지고 그것에 따라 사리를 분별하고 기능을 발휘할 뿐이다. 육체를 움직이는 욕심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진리와 생명으로 끌고 갈 수는 전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양심을 주셔서 커다란 죄는 짓지 않게 하셨다. 그것은 장님에게 지팡이를 준 정도이지 눈을 준 것은 아니다. 지정의가 속해 있는 혼이 타락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전부 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선한 일을 생각하지도 창출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많이 배워갈수록 죄도 교활해지고, 지적으로 교묘하게 되었지 약화되지는 않았다. 물질문명이 발달하자 인간은 더 성적으로 타락하고, 정신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몸소 체험하고 있다. 우리의 영이 죽어 있는 한 우리의 지정의는 타락하여 죄의 권세 아래 있게 되므로 그런 인간들이 창출해 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악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
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우리 자신이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랑이라는 것은 대등한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요구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선택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도록 하셨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선택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선택할 축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만큼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못 따먹도록 하는 뻔한 선택을 시키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우리가 항복할 만한 분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늘 타락할 줄 알았으면서도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느냐고 불평만 했지 그것이 어느 만큼 인격적으로 대등한 위치로 대우하고 있는 것인지는 생각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이고 우리 안에 이제는 영이 소생된 자이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고 육체를 좇아 행하지 말라”고 요구하신다. 강제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할 수도 있지만 사랑하시므로 선택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신다. 사랑은 호응되어야 하고 자발성에 근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선택이 결국 그의 열매를 좌우하고 그 열매는 그가 무엇을 선택했느냐를 증명케 되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는 이 문제가 하나님과의 약속과 사탄의 유혹, 이 둘 중의 하나를 아담과 하와가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이 선악과로 나타난 것이다. 선택의 나무, 선악의 나무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실패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악의 나무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도 십자가 나무에서 돌아가시므로 하나님께 순종을 선택하신 것이다. 우리도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원래 우리 조상이 잘못 선택한 데에서부터 이제 사망에서 생명을 선택한 자가 된 것이다.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
이라 하였고(창 5:3)”
아담이 자식을 낳았는데 그는 아담의 형상을 닮았다. 처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타락 이후 낳은 자식은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영이 죽은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영이 죽은 상태로 나오며 사망이 왕노릇하게 된 것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
느니라(롬 5:12)”
죄를 졌기 때문에,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죄값이 아니고는 죽음이 없다. 우리 모두가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이므로 어린 아이들도 태어나서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았을지라도 죽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있는 자들인 것이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
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심어졌으므로 그것은 당연히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싹을 심었는데 싹이 안 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자라야 하는 것이다. 신자가 되면 당연히 변한다. 죄를 안 짓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싹을 내고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적극적인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지고 영이 소생하여 이제 우리의 몸과 혼, 지정의 자체를 하나님으로 하여금 조절케 하도록 순종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 영이 죽었던 상태에서 사탄의 종노릇하던 옛 습성을 버리고 새롭게 소생된 영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구분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 안에 사탄의 종노릇하던 옛 사람과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새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갈등은 우리의 영이 소생하여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생겼으므로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는 그래서 평화보다는 어쩌면 갈등이 더 많을런지도 모른다. 옛 사람의 습관을 좇지 않는 일이 우리가 늘 싸워야 될 지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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