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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그릇의 보배 (고전 0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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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영감의 표현을 보게 됩니다. 여기 '보배'란 바울이 받은 사도의 직분을 말함과 동시(4:1)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벧전1:19, 2:4)을 가리킵니다.
이 보배가 질그릇 같이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인간된 그리스도인들 속에 담겨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귀하고 진귀한 보배에 비하여, 그것이 담겨 있는 그릇은 참으로 약하다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보배를 질그릇에 담아 놓았는가 하는 이유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질그릇 때문에 환난(고난)이 있게 하고 또 다른 하나는 그 환난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의 승리를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환난을 통하여 인간 됨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 곧 복음 자체의 능력을 알려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 곧 복음의 능력이 어떤 사정 속에서 나타났는가

Ⅰ. 환난의 정체들

1.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사방으로부터 우겨 싸임을 당한다]는 말은 공간적인 활동 영역에 제한을 뜻합니다., 사방으로 포위를 당하여 동서남북으로 복음 전파의 영역이 넓혀지지 못하게 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싸이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명하신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은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뻗어 간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복음을 전하다가 땅에 길이 막힐 땐 그가 순교에까지 이르러 하늘에까지 올라가는 길이 열리고 맙니다. 결코 박해자들이 땅의 길을 막을지라도 하늘의 길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2.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이 또 말하기를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방의 우겨 싸임은 외적 환난을 가리킵니다. 여기 '답답한 일'은 숨막히는 질식의 경우인데 이는 내적인 환난을 가리킵니다. 절망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낙심'이란 마음이 힘을 잃어 그 목표대로 지탱하지 못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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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합니다.
매티우 아놀드는 영국 런던의 빈민가에서 일하고 있던 한 목사를 만났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는 8월, 머리 위에 뜨거운 태양이, 베드날그린의 누추한 빈민가를 내려 쬐고 있었는데, 창문 안으로 보이는 스피탈 필드의 창백한 직공은 소침해 보였다.
거기서 아는 목사를 만나 물었다. "병과 과로가 많은데 이곳에서 지나시기에 어떠하시오" "괜찮아요" 그는 대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최근에도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많은 용기를 얻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약한 몸과 고달픈 노동으로 여기 세상이라고 하는 비닌가에 묻혀 답답할지라도 그는 이미 차원 높은 영의 산정(山頂)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담긴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를 생각하고, 그에게 감사하고, 그를 위하여 마음의 목표가 정해진 사람은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낙심이 자리를 잡도록 물러가 버릴 사람들은 결코 아닙니다.

3.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9절에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핍박'은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당하는 온갖 류의 조롱과 비방과 업신여김과 냉대, 심지어 추방, 죽임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속에는 세상의 부귀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보배, 곧 예수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마5:11-12). 세상이 그를 버려도 하나님께서 그를 안 버림이 천하보다 귀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안 버리신 증거가 무엇인가 그 속에 담겨 있는 보배를 놓지 않음을 보아서입니다.
저 유명한 크리스찬 잔다아크는 그의 사랑하는 동역자들로부터 버림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말하기를 '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좋은 일이다. 하나님의 우정, 하나님의 도움,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은총의 날개 안에서 나는 죽기까지 용감하고 용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성도는 고백하기를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이다]고 하였습니다(시27:10).

4.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9절이 또 말하기를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거꾸러뜨림'이란 바로 죽음의 지경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죽지 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이미 많이 하였습니다. 그는 루스드리에서 돌에 맞아 거꾸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끌어 내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 성에 들어갔다고 더배로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14:19-21).
종교개혁 당시에 신교도들이 로마천주교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악형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심지어 루터와 부셔(Bucer)는 술에 취하여 죽었다고 악한 선전까지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도적 신앙으로 되돌아가고자 일어난 중세기의 개혁자들은 역사의 한가운데 움직이는 불사조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특징 중에 하나는 넘어지지 아니함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매를 맞지 아니함이 아니라 매를 맞아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 전추에는 지는 경우가 없지 않아도 전반적 전쟁에는 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그의 애필로구에게 용감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등을 돌리지 않고 언제나 가슴펴 전진하는 사람은/ 구름이 걷힐 것을 의심치 않고/정의가 곤경에 처해도 / 악의 승리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 넘어지면 일어서고 / 폐하여도 다시 잘 싸우고, 깨어나기 위해 잠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잠언 24장 16절에 「의인은 일곱 번까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II. 승리의 비결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있는 능력의 심이 큰 것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 때문에 질그릇이 환난 중에도 깨어지지 않고 여전히 보배를 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큰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

1. 항상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므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곧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환난 승리의 비결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므로 예수의 생명을 체험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11절은 또 말하기를 「우리 산자(중생인)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죽을 육체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남이 바로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 있음을 뜻합니다.

2. 예수 부활을 믿는 믿음입니다.
4장 13절로 14절은 말합니다. 「기록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노니 우리도 믿는 고로 말하는 것이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 사 너희와 함께 그 말에 서게 하실 줄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도 살리심같이 예수 부활을 믿는 우리도 함께 살리 사 그 주님 앞에 서게 할 것이라는 부활 신앙의 소망이 환난 승리의 비결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 신앙이 환난 승리의 비결입니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적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5절에 「모든 것은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울과 함께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승리하는 또 하나의 비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영광의 특권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질그릇같이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불안한 존재들이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지만, 이 세상에서 여전히 환경의 약자들입니다. 육신의 약함과 고통과 현실이라고 하는 아픔 속에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여전히 인간이라고 하는 약한 갈대성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예수 구원이란 보배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 증거를 위한 고귀한 직분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보배가 질그릇에 담겨 있게 하고, 깨어지지 않게 하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라고 하는 현대는 능력의 인간, 힘의 인간, 창조하는 거대한 인간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특성은 그의 힘이 아니라 약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파스칼은 "한 방울의 물, 한 점의 바람이 인간을 죽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루살이에 눌려 죽을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구원의 보배", "예수"를 담아 놓고 살게 하였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보배, '선교'라고 하는 보배를 담아 놓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보배 때문에 질그릇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코 질그릇 때문에 보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 때문에 질그릇 실존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여 싸일 줄 모릅니다. 답답한 절망의 골짜기에도 낙심을 모릅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할 줄을 모릅니다.
그 비결이 바로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능력이 무엇인가 예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믿는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는 목적적 삶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환난을 이기는 생의 용사들이 되고 맙니다.
저 미국의 경제 공황이 휩쓸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후버 대통령은 수많은 실직자들과 사막을 살아가는 네바다주를 위하여 댐 건설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사막의 신비로 미국의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그 댐을 건설하는 과정에 불가피한 재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 댐 공사가 완성되었을 때, 공사 중에 죽은 자들의 이름을 새긴 면판을 새겼습니다. 그 명판 서문에 "이 사람들은 사막이 기뻐 뛰고, 장미와 같이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쳤노라"고 하는 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후버 댐'을 건설하므로 용감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질그릇 같은 죄인 된 존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의 보배를 간직하고, 소중히 여기고, 자랑하고, 그 보배를 전하는데 용감했던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보배) 때문에 만난 죽음의 환난을 예수 믿는 믿음의 승리로 성화시킨 사람들입니다.
기드온의 항아리 속에는 횃불이 담겨져 있었습니다(삿 7:16). 나중에 그 항아리가 깨어지고, 그 항아리 속에 횃불이 밤하늘을 치솟아 오르고, 300명의 기드온 용사들이 확신의 함성이 터질 때, 전쟁은 승리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경향인의 존재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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