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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임마누엘의 성탄 (요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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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구마을 가운데 히말라야산맥 에베레스트의 영봉처럼, 웅대한 신비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 한 진리의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요한복음 1장 14절일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한 복음의 표현입니다. 바로 '임마누엘의 성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성탄! 그것은

I. 말씀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 곧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을 뜻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1:3), [생명이신 말씀](1:4), [사람들의 빛이신 말씀](1:4)을 뜻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 진리 표현은 [독생하신 하나님](요1:18)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 [되어]( )는 단 한번만으로 완전히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 ,예수)]이 [육신]( )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① 로고스께서 육신으로 변했다는 말이 아니고 완전한 육(몸+혼)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② 육신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의 신성을 그대로 갖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③ 그 자신은 죄가 없으시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을 입음으로, 우리 때문에 죄 정하심이 되시고(롬8:3), 저주를 받게 되심을 뜻합니다(갈3:13) ④ 그가 육신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1:18). 그래서 예수님을 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요14:9).
여기 [말씀](로고스)는 그의 신성이고, [육신이 되어]함은 무죄하신 거룩한 인성을 뜻함입니다. 그는 완전하신 신(하나님)이시고, 또 완전하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신 지금도 그러합니다.
무한하신 자존자가 유한하게 되셨습니다. 볼 수 없었던 영존자께서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초월자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신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계시던 자가 가까이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 영역 밖에 존재자가, 인간생활 범위 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씀'(로고스)의 본성 그대로는 감히 볼 수 없는 자를 '육신'을 취하심으로 볼 수 있게 임하신 것입니다. 바로 '임마누엘의 성탄'임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유명한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입니다.

II.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NS

1장 14절이 또 말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육신(成肉身)이 되신 목적을 알려 줍니다.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신 것은 [우리 가운데 거하기]위함입니다.
여기 [거한다]( )은 '장막으로 거하심'을 뜻합니다. '장막'같은 인간의 몸에 (고후5:1, 4, 벧후1:3) 임시로(잠정적) 머물고 계심을 뜻합니다.
바로 이 말씀은 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성막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상징이었고, 이제 원형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말씀) 사람이 되어 33년간 잠정적으로 사신것은 구약의 성막모형의 성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비교컨데,
① 성막은 일시적으로 설치되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성전처럼 영구적이 아니었습니다. 성막은 단순한 천막으로 40년이 채 못되는 어간에 이리저리 옮겨지면서 설치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의 지상생애 33년의 임시적인 생애와 같았습니다.
② 성막은 광야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는 성막이 없어지고, 성전으로 교체되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화육강세 생활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말구유 요람, 나사렛 목수의 아들, 갈리리 사람, 그리고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또한 빌려 쓴 무덤들을 생각나게합니다. 머리 둘 곳이 없었던 임시적인 그의 화육(化肉)생애를 보여줍니다.
③ 외견적 모양으로 성막은 초라하고, 남루하며, 매력을 끌 수 있는 모양은 없었습니다.
화려한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실로 화육의 생애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으시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사53:2). 그래서 저 헬라의 철인들에게는 마련하게 보여지고, 로마의 권력자들에게는 나사렛의 목수는 천하게 보여졌을 뿐입니다.
④ 그럼에도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었습니다.
그 성막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장막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불기둥, 구름기둥의 임재로 이스라엘 백성 성막중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성막 중에서 거룩한 영광으로 자신의 임재를 백성 중에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백성들의 광야행군을 지휘하였습니다. 과연 육신되신 예수께서 세계 중 이스라엘 땅 한가운데 왕래하셨고, 그 분의 말과 행동과 삶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갈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⑤ 성막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바로 성막은 '만남의 장소'가 되었습니다(출25:21, 22)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 자신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아갈 자가 없었습니다(요14:6).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는 오직 한 분 뿐이신데,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십니다(딤전2:5). 그 이유는 예수 자신만이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⑥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광야교회)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장막 사면(동서남북)에 진을 쳤습니다(민1:50) 성막의 가장 가까운 곳에 제사 직분을 맡은 레위지파 사람들이 거하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행군의 동(動)함과 정(停)함, 그리고 행군대열의 질서는 언제나 성막을 중심하고 이루어졌습니다(민11:24, 25). 바로 성막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모임의 중심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화육강세(化肉降世)의 목적을 보여 줍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는 역사의 신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리소 역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⑦ 성막은 율법계시를 보관했던 장소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헌장인 율법을 궤에 넣어 성소 안에 보관하였습니다. 바로 화육강세 하신 주님께서 율법아래 오시고, 율법 아래 사시다가, 율법의 요구대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율법은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요, 울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상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율법완성의 개가, 속죄성취의 개가를 불렀습니다(요19:30).
중대하고 요긴한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목적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임마누엘'의 성탄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죄인들과 함께 계시기 위함이었습니다(마1:23). 그래서 예수는 '죄인의 구주'가 되고, '죄인의 친구'가 되고 '죄인과 함께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III. 충만한 영광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시 1장 14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제자)은 하나님(신)이신 그가 사람으로 오신 것을 직접 목격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이신 그 분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으로 보여 졌다고 하였습니다. 충만한 영광을 육신으로 목격 할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육안으로 목격하고 체험한 충만한 영광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던가

1. 은혜충만의 영광이었습니다.
'은혜'란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값 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태양빛의 은혜가 온누리에 충만합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공기의 은혜가 온누리에 충만합니다. 우리 인체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수분(물)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은혜는 죄인의 구원을 위한 사죄의 선물이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2. 진리충만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진리입니다. 바로 '구원' 그것이 하나님이 죄인에게 나타낸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 그 자체가 진리입니다. 그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사람으로 보내신 그 사실이 진리입니다. 그 아들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의 죄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죄인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심이 진리입니다.
이것은 어떤 과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문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물론 어떤 수학적 진리도 아닙니다. 어떤 도덕적 진리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망당할 죄인들에게 구원을 가지고 온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에는 그가 세상에 사람으로 오심은 ①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없이하고 ② 그 사탄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풀어 주려 함인데 ③ 아브라함의 자손(택자)을 붙들어 주려고 오셨다고 하였습니다(히2:14-15). 그래서 그가 그 백성(택자)의 죄를 구속했다고 하였습니다(히2:17).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죄인에게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오는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바로 은혜와 진리의 충만은 바로 구원의 은총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람으로 33년간 머물러 계셨던 그 분을 만나고, 보고, 말하고, 교제하며, 함께 살았다!
이것은 결코 사람이 되신 예수의 몸이 실제 몸이 아니고, 어떤 유령과 같이 걸어다니는 영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배고픔과, 피로함과, 슬퍼함과, 고통스러움과, 목마름을 체휼한 실제적, 역사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죄인의 대속을 위하여 33년간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 가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였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시고, 지금은 그의 영이 세상에 다시 와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의 탄생과 함께 역사의 연호를 B.C와 A.D로 나누어졌습니다. 그 분의 탄생은 인류역사의 새 분수령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 이후 세계사의 연호는 벌써 1994년이라고 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누가, 그 무슨 이유로 1994년 이라고 하는 역사의 연호를 부정하겠습니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임마누엘의 성탄입니다.
말씀이신 그가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와 함께 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그 분은 은혜충만, 진리충만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충만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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