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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개의 십자가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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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름을 바꾸고부터 우리 교회의 고유한 서체와 심볼을 정해야 되겠다 마음을 먹었는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았습니다. 한 교회가 가진 목표, 비젼, 이상을 하나의 상징물에 합축시킨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면서 서체와 심볼을 정해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업마다 고유한 심볼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 심볼을 통해 기업의 이미지를 심고자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기독교 최대의 심볼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십자가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피를 흘린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대기업의 심볼을 다 알고 있습니다. 대기업에서 그 심볼을 홍보하고 소비자가 그 기업을 알기까지 기업에서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겠습니까 기독교는 매스컴을 통해 광고하는 기업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의 피를 흘렸는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십자가의 의미가 더 확산되고 널리 전해 되겠습니다. 우리가 더 알리고 전하는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욱 깊고 넓게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늘 십자가를 가까이 두고 또 보고 있습니다. 언제나 너무 쉽게 보고 접할 수 있다는 점이 때로는 그 의미를 희석화 시키거나 반감시킬 때가 많습니다. 늘 보고 있기 때문에 막연하게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소중한 사람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늘 함께 있기에 가정이 주는 포근함과 가족이 주는 기쁨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늘 보고 가까이 하기에 신앙이 주는 축복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신혼의 기분을 잊지 않고 늘 그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부부가 행복하듯 우리는 처음 신앙, 첫사랑을 늘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강권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셨던 갈보리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십자가의 모양이 같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못 박혔지만 세 사람이 달린 이유는 각자가 다 달랐습니다. 오늘은 세 개의 십자가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의 열도를 측정해 보는 시간을 삼고자 합니다. 지금 십자가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고백으로, 때로는 아름다운 장식으로 목걸이로 달고 다니지만 과거에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십자가는 원래 로마에서 죄인을 처형하는 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치욕의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어서 헬라인에게는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인으로 정죄 받고 순교할 때도 십자가형을 받지 않고 목베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 박혔던 갈보리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귀중한 세 가지 의미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1. 좌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좌편의 강도를 가리켜 성경은 행악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끔찍한 죄를 저질러 그 죄의 형벌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우편의 강도 스스로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거나와”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엄청난 중죄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뒤따르게 됩니다. 좌편의 강도는 한 사람만의 죄와 죄에 대한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상징하여 매달린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린 좌편강도는 바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의 강도는 자신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악에 바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치 않으려는 가중함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솔직히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우리 사이에 죄의 많고 적음에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죄의 크고 작음에 차이가 우리 사이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같이 죄인이라는 차원에서는 동일합니다. 예수님 앞에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그러나 누구는 마음으로 범죄 했고, 누구는 몸으로 범죄한 차이가 있을 뿐 다같은 죄인입니다. 그 행위가 누구는 드러나고 누구는 숨겨졌을 뿐 죄인이라는 차원에서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좌편 강도의 십자가 앞에서 저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니라고 자꾸 항변하지 마십시오. 저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고개를 떨구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소망이 있는 존재입니다. 좌편강도가 달려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저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확인해야 합니까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내 죄의 깊은 뿌리를 보아야 합니다. 내 죄의 결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가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사형 방법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빨리 죽지도 않습니다. 보통 건장한 사람은 삼일 이상 매달려 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피 냄새를 맡고 파리와 독충이 날아와 온몸에 달라붙습니다. 더러는 십자가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파리떼가 몰려와 코를 막아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흘리면서 온몸의 진액을 빼내는 형벌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형의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개의 방법은 짧은 순간에 사람의 생명을 끊는 방법입니다. 만일 칼로 목을 베어 죽이거나 사자밥이 되게 한다면 처참한 죽음이긴 하겠지만 고통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가장 큰 고통과 아픔을 느끼며 죽는 죽음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지옥의 형벌만큼 고통스럽지는 않겠지만 이 지상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입니다. 그러면 이 잔혹한 십자가 고통을 통해 깨달아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의 죄의 깊은 쓴 뿌리와 그 결과입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읍시다. 그리고 고백합시다.
① 십자가의 고통 이상으로 나는 큰 죄인입니다.
② 십자가 형벌은 영원한 형벌입니다.
③ 십자가 형벌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는 형벌입니다.
십자가 달린 죄인은 사는 법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 날이 지나도 죽지 않았을 때는 끌어내려 도망하지 못하도록 다리를 부러뜨려 죽였습니다. 어쨌든 십자가에 달린 죄인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가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한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날마다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단순한 육체적인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죄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짓지도 않은 분이 죄인으로 정죄 받고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누가 저를 보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화가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답지 못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목사가 되었고, 목사가 되었기에 목사다워 질려고 노력하는 사람일뿐 여전히 목사답지 못한 사람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죄인으로 정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는 나의 죄 때문에 고통받으시는 그분을 떠올리며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십자가를 멸시하는 사람도 많고 미워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은 얼마만큼의 사랑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실 만큼의 사랑입니다.
② 죄 없는 의인으로서 인류를 위하여 죄인으로 취급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만큼의 사랑입니다.
③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육신과 심령이 크게 상하실 만큼의 사랑입니다.
④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생명까지 내어 주실 만큼의 사랑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달리 십자가가 아니고는 인간을 구원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① 예수님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여시는 선지자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사람이 정하거나 만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만나는 길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은 하나님이어야 했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가 육체를 입고 오셔서 새롭고 산 길을 여셔야 구원의 길은 가능하게 됩니다.
②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는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실 때에 이미 인간의 생명을 피에 두셨습니다. 범죄 하는 순간에 인간은 생명, 즉 피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피를 흘리지 않고는 죄사함을 얻을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피를 흘려주심으로 인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망에서 인류를 건지는 왕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죄지은 인간은 당연히 마귀에게 속하여 종노릇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을 보고 우상숭배한다고 손가락질하지 말고 왜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가 하는 사실을 먼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모든 권세를 다 꺾어 버렸습니다.
선지자, 제사장, 왕되신 그리스도로 오시는 방법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감사하며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우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우편의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일이 하나도 억울한 일이 아님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자신 곁에 매달리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로 인류의 모든 근본문제를 해결하시고자 매달리신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가장 축복된 확실한 보장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깨닫는 순간 우편강도는 자신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확실한 천국에 대한 보장을 해주시는 순간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 순간에도 행복을 느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우편에 달린 강도는 주님을 위하여 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최대의 바램이 있었다면 주님을 위해서 아무 일이라도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가 결국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를 믿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지만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달리셨음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좌편 강도를 책망하고 예수님을 변호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걸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어 갔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자꾸 자신의 거짓된 위선에 속기가 쉽습니다. 내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를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심정으로 주님 앞에 있는가를 먼저 보십니다.
삭개오는 일평생 돈만 아는 매국노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는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섰습니다. 죄많은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드리며 희생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으로 섰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마음의 심정으로 이 자리에 계십니까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를 각오를 하지 않는 신앙은 거짓신앙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을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거절하면 면류관도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250년을 지하 카타콤에서 지내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지하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40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카타콤에 가보면 사람이 얼마나 끈질길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거절하면 자기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 가정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무엇보다도 사랑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자랑하십시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순간순간 물어야 할 진지한 질문이 있습니다.
① 왜사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②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그를 위하여 나를 희생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29을 보면 인생은 누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 짐을 인하여 날마다 고통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 짐은 주님께 나아 올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결의 방법은 그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멍에를 메면 오히려 짐이 가벼워지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아이들 때문에 속 썩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행복임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③ 어떻게 사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산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대로, 최대의 소원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제자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전파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주의 말씀으로 나 자신과 잘못된 세상을 그리스도로 고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바울은 세 가지 인생의 분명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는 왜 사느냐 물으면 주님 때문에 산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사느냐 물으면 주님을 위하여 산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고 물으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며 십자가만 자랑하며 산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앞에도 지금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를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만 생각하고, 십자가만 바라보고, 십자가만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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