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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신앙4 (행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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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생각할 때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와 더불어 반드시 함께 생각해야 할 부분이 수평적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처음부터 혼자 살지 않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좋지 못하므로 그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사 가정을 이루어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살아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았습니다. 그 영광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만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창조 목적대로 그 시대에 함께 있게 하신 사람들과 살아갈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이웃을 주셨고, 직장이라는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또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도록 교회라는 공동체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창세기 1:27은 하나님과의 생명관계입니다. 28절은 사람과의 능력관계, 즉 행복관계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8은 우리에게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네 가지 수평적 관계를 바로 할 것을 명령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우리는 이 명령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리적인 개념입니다. 둘째는 관계의 개념입니다. 지리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곳까지를 말합니다. 관계적인 개념에서 생각하면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가장 많이 미워하는 사람까지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 둘의 관계에서 언제나 주님의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지리적인 개념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이라는 네 장소를 우리는 자신에게 적용시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오늘날 우리의 가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는 환경적으로 함께 생활하도록 여건이 허락된 사람들, 즉 이웃들을 말합니다. 사마리아는 민족입니다. 땅 끝은 세계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정과 민족과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키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① 뜻을 정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7-48)
“…..... 내 어린양을 먹이라 ....”(요21: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신앙생활은 우리가 전도와 선교를 얼마만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주님이 얼마나 원하시느냐를 인정하고 안 하고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목적, 내 삶의 존재 이유를 복음화의 사명에 둔다면 우리는 아무일도 행하지 않아도 그 일에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복음화의 조건은 성령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가정 복음화,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의 가장 첫째 조건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최소 단위인 가정 복음화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세계 복음화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복음화는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리라’는 수동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소원을 인정하는 자, 그 소원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맞추는 자를 주님은 사용하실 것입니다.
② 보는 만큼 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움직이며 행동하기 전에 바라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은 행동한 뒤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본 뒤에 행동하게끔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느 누구도 결코 보는 것 이상으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는 것만큼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내 가슴에 어느 지역까지를 품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나를 쓰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사이에서 종들의 싸움이 있을 때에 갈라서기로 작정했습니다.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롯은 소돔과 고모라 들녘을 향해 내려갔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 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4-17)
이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로 옮겨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리라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더 넓은 땅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장막을 옮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이 주신 언약을 늘 바라보며 그 언약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가정을 복음화하리라 마음먹은 사람들은 분명히 가정을 구원하리라 믿습니다. 나의 이웃, 직장의 동료를 내가 구원하리라 마음먹은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직장을 복음화 하실 것입니다. 민족 복음화는 민족을 가슴에 끌어안은 자들의 것입니다.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최대 소원을 깨달은 자들의 것입니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볼 수 있습니다.
③ 주신만큼 행동해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나온 까마귀는 죽은 시신만을 보았습니다. 비둘기는 노아가 자신을 보낸 목적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마음의 생각대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또 본만큼 행동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눈을 가지고 까마귀는 시체를 보았고, 비둘기는 사명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날개로 까마귀는 시체를 행햐 날아갔고 비둘기는 사명을 위해 날아갔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마음에 두셨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당신은 어디까지 가기를 원하십니까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13:17-18)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면서 그 언약대로 행동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주님의 복음화의 약속을 믿었다면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믿음은 움직이는 것, 행동하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전도와 선교를 중심으로 해서 세계 역사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전도와 선교만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세계사의 주역이요,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는 세계사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멀리까지 보아야 합니다. 본만큼 행동하고 행동한 만큼 하나님은 여러분을 평가해 주실 것입니다.

2. 관계적인 개념
가깝고 먼 장소적인 개념보다도 더 중요한 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현대인들의 삶은 과거처럼 한 장소에 매이고 묶인 삶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만나고 헤어지는 삶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파트에 사시는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아파트로 이사온지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 앞집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앞집 사람도 자기도 서로에게 그만큼 무관심한 것입니다. 서로 모르고 그 많은 세월을 지내도 하나도 불편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단절의 벽이 이제는 두려움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장소, 거리적인 한계는 자꾸만 무너집니다. 전국이 1일 생활권에 접어든지는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전국 어디든 하루만에 갈 수 있습니다. 전국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매주 한 번씩 일본을 왕래하면서 선교 활동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에게 일본은 그렇게 먼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먼 곳이 어디입니까 가장 가까이 있어 살과 살을 맞대고 살아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가장 먼 사람입니다.
성도의 책임은 땅 끝까지 이르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8은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열두 제자를 뽑아 그들과 3년의 공생애를 보내신 연후에 승천하시기 직전에 남긴 말씀이 사도행전 1:8입니다.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은 장소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 유대 사람들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와 땅 끝은 내가 질시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멀리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까이 있어도 늘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8은 장소적인 개념인 것과 동시에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은 동족이면서 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를 땅 끝으로 생각했는데 로마는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속박하고 있는 원수와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까지 가서 복음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오늘날 당신에게 원수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원수는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옆에 있습니다. 가장 가깝게 있습니다. 김일성이 우리의 민족의 원수요,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달갑지 않은 사람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나의 가장 가까운 땅 끝은 내 주변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여러분 옆에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이 남편일 수 있습니다. 아내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는 부모일 수도 있습니다. 더 가깝게는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에게 미움의 대상이요, 원수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나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내가 그로부터 상처와 고통을 받았다면 그도 나를 통해서 받은 상처의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먼저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잘못을 용서받고 사랑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만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실수도 잘못도 덮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여러분의 행복은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많이 사랑하고 끝없이 사랑하십시오.

십자가의 신앙은 수직적으로 위로 하나님과 아래로 후대를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수평적으로는 예루살렘,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언제나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에 행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더 높고, 넓은 곳을 보기위해 힘써야 합니다.
저는 고등학생 시절 갓 복음을 접하고 찬양단에 들어거 병원을 순회하며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제 15년 만에 그 당시 함께 할동했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목사도 있고, 교회의 중직자들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팠던 것은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흔히 고등학생 시절에 신앙 좋았다는 말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사회에 나가보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 때쯤 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 많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결론은 그들이 신앙의 눈을 아브라함처럼 높이 들어 하나님을 보지 않고 롯처럼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어느 위치까지 이르렀든지 관계없이 언제나 한 걸음 더 내딛기 위해 힘쓰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나만 생각했던 사람은 이제는 가정도 생각하고 가족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내 가정, 내 가족만을 생각했던 사람은 이제는 민족에게로 눈을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민족만을 고집했던 사람은 세계를 가슴에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현재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더 넓은 곳까지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는 사람도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만 구원하셨다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는 죄인이요, 원수 되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더 깊게 사랑하십시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그리스도의 뜻이기에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여러분 삶의 모든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미워하는 감정이 생길수록 그를 사랑하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빼앗거든 그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주십시오. 그 때에 여러분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믿음 안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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