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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 자의 어미 (창 03:16-21)

첨부 1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인간에게 모든 축복을 다 주셨습니다. 이 세상이 왜 창조되었습니까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들어 인간에게 주시고, 그 인간들이 온 땅에 퍼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① 인간을 위하여 지으신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창1:3-4)
②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그 세상에 사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최고의 환경에 최고로 축복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사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한 뒤에 인간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창세기 3장에 그 모습이 자세히 나타납니다.
①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숨어 버렸습니다.
② 지은 죄로 인하여 심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③ 지은 죄를 서로 전가하며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④ 사단에게 완전히 지배받게 되었습니다.
⑤ 여자는 남편을 섬길 것과 잉태의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⑥ 남자는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수 있도록 노동의 수고가 주어졌습니다.
⑦ 피조물은 엉겅퀴를 내고 인간에게 반항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불행과 저주의 발단은 사단이었고, 여자가 그 도구로 이용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의 현실이고 실존입니다. 죄의 결과로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육신의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이르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그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 얻게 하기로 하셨습니다. 인간이 모든 저주와 불행에서 빠져 나오는 유일한 길은 창세기 3:15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지만 어떤 길이든 살길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담이 모든 축복을 송두리째 상실한 참담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가를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생명을 회복하기 위한 아담의 새 출발은 모든 인간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죄인으로서 생명을 얻기 위한 출발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와 허물로 다 죽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인생은 죄인으로서 출발합니다. 그 길은 생명을 회복하기 위한 출발이 될 수도 있고, 영원한 지옥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출발을 하셨습니까

1.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바꿔 놓고 인생을 출발했습니다.
본래 여자는 남자를 돕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하므로 그를 돕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어 주신 배필을 향하여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담도 그 아내를 인하여 기뻤고 여자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범죄하고, 자신에게도 선악과를 주어 먹게함으로 저주와 영원한 형벌의 삶을 가져온 여자가 얼마나 미웠을까요
이제 아담은 행복하기만 했던 그 축복의 에덴 동산을 떠나 살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 아내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내사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 동산은 그룹들을 통해 화염검을 가지고 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에덴 동산의 황홀하기만 했던 행복은 끝이 나고 고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아담은 어떻게 출발합니까 아내의 이름을 여자에서 하와로 바꾸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원래 하와의 이름은 여자였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2:23)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이 지어 주셨고, 여자의 이름은 아담이 지었습니다. 본래 하와의 이름은 여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3장에서 범죄하기 이전에 그녀의 이름은 여자로 불리워집니다.
“…..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창3:1)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창3:2)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창3:4)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창3:6)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 여자가 가로되 ......”(창3:13)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창3:16)
‘하와’라는 이름의 뜻은 산 자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아내는 남편을 범죄케 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죄악에 빠뜨린 장본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었으므로 죄인이 되었지만 인류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와 허물로 죽은 자로 출생합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이름은 산 자의 어미가 아니라 죽은 자의 어미라고 말해야 정확합니다. 그런데 왜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지었습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기에 그녀를 산 자의 어미라 이름하여 준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의 언약을 후대에 계속적으로 이어주는 어미가 되라는 뜻에서 주어진 이름입니다. 창세기 3:15의 언약을 믿었던 여인들은 모두가 산 자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사라는 그 이름이 열국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리브가가 언약을 믿고 이삭의 아내가 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날 때 라반은 그의 누이를 향해 “......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 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24:60) 축복했습니다. 모두 메시아의 신앙을 굳게 잡았던 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마태복음은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42대에 걸친 족보가 나옵니다. 원래 여자는 족보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네 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① 다말:시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여인입니다.
② 라합:가나안 땅 여리고 사람으로 전직이 기생이었습니다.
③ 룻:모압 여인으로 시어머니를 따라 가나안 땅에 이주해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④ 밧세바:남편을 죽인 다윗과 결혼해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결함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입니까 메시아의 언약을 굳게 붙잡은 산 자의 어미였다는 것입니다. 여자 성도님들, 결혼하지 않은 자매님들도 메시아의 혈통이 여러분을 통해 이어지는 산 자의 어미는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그 구원의 이름을 아들과 딸, 그리고 후대에 전하므로 생명을 살리는 산 자의 어미는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산 자의 어미로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산 자의 어미라는 분명한 신분 속에 생명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담은 에덴 동산을 그리워하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설화나 전설처럼 여기는 창세기 말씀을 분명하게 이 땅 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깊어도 아담만큼 확실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타락 이전에 그 완벽한 에덴 동산의 축복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 축복을 범죄의 결과로 상실했을 때 아담의 절망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컸을 것입니다.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았을 때 아담은 감격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사건의 실제적인 당사자였기 때문에 아담은 우리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이 모든 언약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거지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사람과 재벌이 망해서 거지가 된 사람이 느끼는 고통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 잘 살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할수록 현실은 더욱 고통스럽기만 한 것입니다. 아담의 현실이 그와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담의 삶이 불행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과거 에덴 동산을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게 될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은 아무리 아름답고 살기 좋은 땅이었어도 마귀의 유혹이 있고, 범죄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마귀가 올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계21:21-22:5)
아담은 자신의 범죄에 매이지 않고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았습니다. 돌아갈 수 없는 에덴 동산을 그리워하지 않고 육신의 장막을 벗는 날 가게 될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보십니까 또 누구를 보십니까 에덴 동산을 보며 인류의 시조로 범죄로 죄와 저주를 불러온 아담을 보며 불평, 원망하며 사십니까 아니면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천국을 소망하며 사십니까 돌아갈 수 없는 것이라면 포기해야 합니다. 용서하는 게 유익이라면 이가 갈려도 용서해야 합니다.
아담은 930세라고 하는 긴 세월을 장수하다가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만 그리워하며 한숨쉬며 살았다면 그는 일찍 죽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선악과를 건네줌으로 범죄케 한 하와를 원망하며 살았다면 화병으로 일찍 죽고, 불행한 가정 생활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담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에덴 동산이 아닌 소망의 천국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엉겅퀴가 나는 땅을 갈고 이마에 비지땀이 흘러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3. 아담은 가인의 범죄와 아벨의 죽음을 보고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시킨 뱀에게 저주와 심판을 말씀하시고는 아담과 하와에게 창세기 3:15에 메시아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인간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창세기 3:1에 마귀가 뱀을 사용한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마귀는 육체가 없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뱀을 이용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귀는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육체를 통해 역사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문제는 처음부터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인 문제는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입니까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왜 떠났습니까 하나님이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한 나무의 실과를 먹고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범죄케 했습니까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가 된 마귀가 와서 범죄케 했습니다. 이 문제는 사람의 문제지만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여자의 후손되신 메시아가 이 문제를 해결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창세기 3:21에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려 줄 가죽옷을 얻기 위해 한 생명이 희생되어야 하듯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이 죽고 다시 사심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놓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
그러나 다른 길이 없기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창세기 3:15에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세기 3:21 짐승이 피를 흘리듯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원하실 것을 처음부터 약속해 주셨습니다. 범죄의 당사자였던 아담과 하와는 이 언약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언약을 굳게 잡은 아벨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아에 대한 언약을 굳게 잡음으로 양치는 일을 자기 직업을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농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후에 어떻게 됩니까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에 있을 때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 때 아담과 하와의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들은 그래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주신 셋을 바라보고 그들이 부르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930세를 향수하고 죽기까지 아담은 메시아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소망이 있는 자와 소망이 없는 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일평생 오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아담은 결코 불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현실의 모든 불행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구원받는 길이 됩니다.

아담이란 이름의 뜻은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말에서 삶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삶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 하는 자도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담은 그 아내의 이름을 하와, 곧 산 자의 어미라 칭합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입니다.(롬5:14)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의 신랑입니다. 그가 우리의 아담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부된 우리는 산 자의 어미 곧 하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산 자가 되고, 살아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가 살려 줍니다. 살려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 오시는 날까지 산 자로 살아가시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다 되시기를 신랑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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