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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 2 단계순종 (창 12:4-13:18)

첨부 1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일행 중,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은 그와 함께 갔습니다. 롯은 아브람 일행이 가니 덩달아 따라 갔습니다.
아브람의 여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시하신 목적지를 향하여 말씀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을 향할 때 말, 태도, 행동, 사람이 말씀대로의 사람으로 변화가 나타났고, 롯의 여정은 목적 의식도 없이 현실에 따라 다니므로 롯의 말, 태도, 행동은 현실에 따라 피동되고 변동되었습니다.

아브람과 롯은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달랐습니다. 롯은 보이는 형편대로, 유, 불리에 따라, 이해득실에 따라 보았습니다.

오늘날 개인간, 가족간, 집안 간에 야기되는 모든 문제는 보는 관점 여하에 따라 이견이 생겨진데서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구별하려는 사람은 대개 감정, 원한, 분열 등을 불러들여 파국의 결말을 맺게 됩니다.
깨달을 때까지 기도나 염려할 일이지 관계할 일이 아닙니다.

4절『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여호와의 요구와 지시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이 있는 본토 갈대아 우르를 떠나, 유브라데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에 아무런 수입되는 일이 없고, 지출만 되는 일만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광야 40년 동안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의 능력의 인도와 보호를 받았습니다.

5절『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을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본토를 떠나 가나안으로 갈 때, 함께 데려간 것과 두고 간 것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했는데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소유를 데리고 갔습니다.
두고 간 것은 하나님 명령 어겨서 하나님 명령 순종하는데 거리끼거나 방해되거나 지장 되는 것은 다 두고 떠났습니다.
반면에 데리고 간 것은 하나님 명령 순종에 방해되거나 거리끼거나 어기는 일이 안될 때 다 데리고 갔고 귀중히 여겼습니다.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까지 가는데 장차 미래의 전개될 일을 보면 데리고 간 사람들과 소유 때문에 많은 문제에 부딪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뒤 서고 따라오는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주의하고 힘쓸 것은 도덕적, 인격적으로 흠 잡힐 것이 없도록 애를 쓰고 힘을 쓰면서 인간 도리에 어긋나거나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므로 욕 먹는 일이 없도록, 데려 온 모든 사람을 버리지 않고 이끌어 가면서 구원에 이르도록 힘쓰고, 손해가 없도록 맡겨 준 사명을 다 하여야 합니다.
아브람이 데리고 가는 사람에게 상대하듯이 우리들도 우리와 관계되는 신앙이 어린 사람, 뒤선 사람을 상대하여야 합니다. 골치 아프다고 맘에 맞지 않다고 떼 놓으려고 “없었으면 좋겠다” 말아야 합니다. 잠18:1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두 종류의 세계

6절-7절『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아브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약속하신 계약을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해 보니 앞에 실제로 닥친 현실과 머리로 생각하고 알던 이론적, 지식적 세계와는 딴 판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가나안 원주민과 브리스 족속들이 땅을 차지하여 그 땅에 거하였고, 누구 하나 그를 환영하거나 영접하여 존귀하게 대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땅 가나안 사람들은 자연을 숭배하여 종교도 다르고, 생활 의식도 달랐고, 새로 이사온 아브람 일행에게 정착지를 내어 줄 리도 없었고, 아브람의 소명을 알 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람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세계와 자기에게 닥친 현실 세계 두 세계가 있는 것과 두 세계의 관계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른 수도 있고, 차이가 너무나 심하고, 마찰이 너무나 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세계는 영적이요, 반드시 속히 될 가능성 있는 실제 되어질 약속의 세계입니다. 현실과 말씀의 세계는 말씀의 세계가 더 정확하고 확실한데, 보이는 현실은 가변성이 많은데도 대개의 사람들은 말씀의 세계보다 현실 세계를 더 정확하고 똑똑한 줄로 아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각오와 결심하였다가도 현실이 닥치면 현실에 지배를 받고 받은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끝까지 계속해서 살지 못합니다. 아브람은 이와 같은 형편이 닥치자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능력은 가나안 보다 강한 것과 만사는 하나님 예정대로 된다는 것과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새로운 각오와 마음으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림으로 새로운 문제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새 은혜, 새 능력을 얻어 힘있고, 끝까지 꾸준하게 지속적인 인내로 견디었습니다.

우리도 규칙적인 하나님과의 영교생활(경건생활)을 통해 하나님과 더 밀접해지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하나님 닮아 삶과 인격에 변화를 받아 하나님 능력을 힘입어 새 은혜를 입어 끝까지 인내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고개 넘어 또 고개가 있다

10절『그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하나님의 명령 만 믿고, 안락한 생활 다 청산하고 순종하여 지시하신 땅에 도착해도 환영이나 영접은 커녕, 박해와 고난이 계속이고, “큰 민족을 이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요, 아들도 없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가나안 인들의 박해와 고난만 계속되고, 설상가상으로 심한 기근이 들어서 가축도 사람도 굶어 죽게 되는 전멸의 현실을 만나게 되었으니 아브람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하실까 약속하신 대로 바라는 것과 정 반대의 현실에 대한 원망, 불평, 낙심이 나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들이 하나님과 지도자에 대한 원망, 불평, 시험, 우상 숭배, 간음을 행했듯이 멸망 받을 범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현실을 너무도 모르고, 누릴 줄도,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우리에게 현실로 봉착케 하셨고, 에덴 동산에는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은 나무를 나게 하셨듯이 우리 현실에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되고 유익되게 하는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은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찾아서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두 눈으로 본다는 사실, 두 귀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입으로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다는 사실, 몸의 지체가 정상인 것을 느끼고 알고 누리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고난이나 부족이 없는 줄로만 알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에 부강, 평안, 형통, 건강만 있는 줄로 알아서는 안됩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체와 행위의 사람을 만드는 데에는 가난과 부요, 고통과 평안, 전쟁과 평화, 병과 건강, 올라감과 내려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하다고 해서 기근이 없는 것 아니고, 땅에 기근이 있다고 하나님 약속에 모순된 것도 잘못된 것도 없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에 모순되고 잘못된 것 같은 땅에 기근이 생기게 했을까요

부부간이란 365일 내내 같이 살고 지내고 같은 방을 쓰고 같이 먹고 자고 지내면서 사랑합니다. 그런데 남의 남자와 여자를 좋아한다는 기색이 보이거나 남에게 친절하거나 그 사람 말을 더 믿고 더 의지하면 시기가 나고 분쟁이 나고 안 보려고 하는 것은 미워하기 때문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만 사랑하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신뢰하여 다른 어떤 존재에게 일체 의존할 수 없도록 하는 상황 속에 몰아넣는 것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심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고,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을 배우고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람에게 심한 기근의 현실과 같이 자기에게 하나님이 도와주지 아니하시면 안되는 위기적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브람은 안 믿을 때, 옛 생활 방식을 청산하고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살라고 할 때 가나안의 어려움과 심한 기근의 현실이 닥치었습니다. 그때의 형편은 되 돌아가기는 너무 멀리 큰 희생을 감수하고 떠나 왔고, 원수 마귀는 자신의 경험 상식 이치대로 닥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도록 유혹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인내하여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은 것을 찾아 느끼고 누리도록 원하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들려주고 보여주고 알려주심을 받기 위해서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거하라고 하신 현실을 떠나지 말고 있으라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아브람은 심한 기근이 와도 떠나라 하기 전에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있으라는 곳에 있었다면 되돌아오는 헛수고나 애굽으로 내려가므로 당한 일 5가지는 안 당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번지가 있듯이 하나님께서 각자 자기에게 있으라는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데나 처박아 두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가지 말라는 곳은 가서도 안되고 가라고 하지도 않는데는 조급하게 있을 곳을 찾아 날뛰어도 안됩니다. 아무데나 돌아다니도록 두시지도 않고 각자 사람에겐 번지가 있습니다. 가지 말라는 길 가다가 동방박사, 요나의 결과가 되고 떠나라는 말도 없는데 조급하게 참지 못하고 떠나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람 꼴이 됩니다.
 자기가 파는 자기 함정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자 가축 문제는 풀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사람 문제는 양식이 있는 땅으로 해결해야 될 줄 알고 애굽으로 내려가야 함을 알았습니다.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출발할 때의 그 때의 그 중심 그 열심이었다면 형편 사정 이유야 어쨌든 무슨 문제든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을 텐데 마귀의 인본주의 합리주의적 유혹에 빠져 극심한 기근의 어려움을 주실 때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불신앙, 믿음 떠난 길을 걷게 되니 아내의 아름다움이 걱정이 되고 아름다운 아내와 부부된 관계가 걱정이 되어 자기는 죽임을 당하고 아내 사래는 살려 둘 것을 비관적인 관점에서 가정을 하게 되었고, 결론적으로는 아내를 누이라고 해야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넘어뜨릴 때 쓰는 수법은 협박과 유혹이고 마귀의 수법에 넘어간 사람은 두려움과 미련(연민)에 빠지게 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아브람은 아름다운 아내 때문에 죽을까 하는 두려움과 아내를 빼앗길까 하는 연민(미련)이 생겨졌습니다. 아브람은 어떻게 해야 될지 궁리 끝에 하나님께 의논도 없이 아내를 누이라고 하면 내가 안전하고 목숨을 보존하겠다는 자기 생각이 들어 거짓말을 하도록 했고 생각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겠다고 느꼈습니다. 예측한대로 아브람이 애굽에 도착해 보니 애굽 사람들이 사라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누구냐고 물음에 누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져서 사래가 애굽 왕궁의 바로 앞에 서게 되었고 바로의 처첩 중의 하나로 들어가게 되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복잡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욱더 난처한 것은 아내를 빼앗은 대신 많은 재물로 아브람에게 후대하는 난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계획대로 예측 한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간다고 하나님의 뜻이라 단정하는 잘못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피부에 접촉되는 것만 다가 아니라, 요나가 바다 한 가운데 일어날 풍랑 너머를 보아야 하고,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 방문 후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제 꾀에 제가 속고 제가 빠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생명에 미칠 위험만 골몰했지 무슨 일이 미칠지 모든 것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지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굽을 내려간 아브람은 살기 위하여 내려가는 걸음이 생명의 위험이 있는 죽는 길이요, 가정의 행복을 위해 간 걸음이 사라를 빼앗겨 가정의 파탄되는 걸음이요, 아브람과 사라 사이에 난 자손이 큰 민족이 이룰 줄 안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절단 나는 길이요, 공 재물 얻어 난처함을 당하고 결과로 자손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는 생활이요, 애굽에서 얻은 여종 하갈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반목 질투는 중동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조그만 원인이 씨앗이 되어 복잡하고 중대한 결과의 열매를 맺게 된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말 한마디 내뱉은 것이 상대의 가슴에 못을 박고 평생 한을 심게 되고 자손 대대 한을 갖고 원수를 맺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험의 때

하나님께서는 “시험의 때를 만나면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 같이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벧전4:12-12)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고(벧전1:7),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하여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약1:3-4) 또 “성도들에게는 감당할 시험밖에는 당하지 않게 하시고 피할 길을 내사 능력 감당케 하신다”고(고전10:13)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극심한 기근의 시험의 때를 잘 통과하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범죄의 직전에 놓인 아브람과 사라를 지켜 주시고, 건져 주셔서 깨끗한 성결을 보호해 주시고, 되돌아올 때 은금과 육축이 풍부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명령 순종을 순종하므로 보이는 축복인 은금과 육축이 풍부한 복과 보이지 아니하는 축복 성결의 복을 받았습니다.
항상 보이는 축복 후에는 이것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귀하게 중하게 여기고 애착하느냐 하는 시험이 오게 됩니다.

창13:5-6 『아브람의 일행 롯도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치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사람이 사는 곳마다 문제가 있고, 교회마다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의견이 생기고, 의견을 주장하다 보면 시비, 다툼, 말썽이 일어납니다.
아브람과 롯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은금과 육축이 풍부하여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람의 2단계 순종은 음성이나 명문된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맘의 갈등의 시비에서 자기 맘을 가라앉히고 진정시켜 깨끗케 하여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성령의 감화 감동의 인도에 따라 순종하는 주관적 순종입니다.

 목자의 다툼

창13: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소유의 풍부로 가족 내에 이견이 있게 되고 다툼이 생겼습니다. 이견과 갈등과 다툼은 우리의 삶을 성숙되게 성장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고 불만과 원한과 감정으로의 후퇴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목자들의 다툼을 성숙되게 성장을 위한 한 단계로 접근하였습니다. 다툼을 보는 아브람의 관점은 문제 해결에 앞서 하나님이 왜 이런 현실을 주셨을까 감정으로 대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입장과 심정에서 하나님이 하라는 방법을 장기적 안목에서 보고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이견을 내세워 마찰, 충돌, 시비가 생길 때 일을 크게 벌리는 말썽꾼이 있고, 일을 작게, 없게 하려는 해결꾼(일꾼)이 있습니다. 시비나 다툼은 맞대응 할수록 커지고 참고 이해하려고 용서하려는 데서 맞대응을 하지 아니하면 작아집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훈련 즉 수양이 요구됩니다.

롬12:2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하셨는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갈등까지도 달리보려면 시간과 훈련이 요구됩니다.
다툼은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논쟁을 다룰 때는 일어난 근본 원인을 찾아내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불씨를 묻어 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커지고 큰 화재를 불러옵니다. 곪아 가는 상처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낫는 것이 아니라 수술의 칼이 필요합니다. 노름한 손가락을 끊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습성, 생각,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논쟁에 휘말리면 원인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목자들의 다툼은 물질적인 여건 변화 즉 소유가 많아지므로 생겼습니다. 물질적 여건 변화는 하루밤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요, 점진적인 변화의 결과요, 평소에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대비가 없으므로 폭발 수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땅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거하였다”는 말씀은 8절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하는 말씀으로 보아 땅이 좁다는 면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고, 그 땅의 가나안 브리스 사람들이 목자들의 다투는 행동을 보고 있다는 면을 강조하기 위한 데 목적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경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과 잘못된 언행을 흉보고 비웃고 지적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툼의 해결 방법

창13: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롯에게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일을 하지 말게 하자고 권했습니다. 목자들의 다툼은 다른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나 되지 덕이 되지를 못하고 욕이 되며 나아가 하나님 영광을 가리우고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일이 되니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나누는 게 좋겠다고 권했습니다. 싸움의 근본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는 방법을 하나님께 맡기자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경 정함을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고 하나님이 선택하게 하시는 대로 따라갈 것을 롯에게 권했습니다.
다툼이 일어날 때 주의할 것은, 다툼의 근본 원인보다 감정적 자극이 일을 더 크게 벌이고 일으킵니다. 다툼의 원인은 의견 차이인데, 아브람에게 유리한 주장은 롯에게는 불평 불만거리 시기 질투 거리가 되어 불화가 일어나고 마찰이 일어나고 여기에 자극적인 요소인 감정, 욕심 등이 가세되면 더 큰 문제 큰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아브람의 경우, 숙질간의 신분 차이, 세대 차이, 오늘의 롯이 있기까지의 공로 등을 생각하고 주장하여 좋은 땅을 아브람에게 선택케 함이 윤리적이요 합리적이요 마땅한 일이나, 롯의 경우 평소 이런 요소들 때문에 늘 불평 불만 시빗거리였는데 또 그 문제 때문이냐 하는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시비요 다툼입니다.
아브람은 함께 동거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을 때, 서로 다툼으로 해결하려 않고, 당면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려고 롯을 불러 드러내 놓고 말했습니다. 대화의 장애물은 흑백 논리 명분 체면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고입니다. 다툼을 중단시키고 해결을 지으려면 흑백 논리 체면 명분에 붙들리지 않는 성숙한 인격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사실에 깨달음에 이견이 있어도 다른 면에 같은 깨달음을 가질 수 있고, 한 가지 사실에 같은 깨달음이라도 다른 면에 다른 깨달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백부답게 연장자답게 롯을 찾아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불러 대화로 맘을 열어 놓고 해결하려는 것이 성숙된 인격의 표현입니다.

아브람은 대화의 시작을 “너와 나는 한 골육이라”로 시작하였습니다. 한 골육이란 둘의 관계는 물질 권세 명예 어떤 것보다 능가하는 혈육의 관계요 혈육의 관계는 다툼보다 사랑을 촉구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골육, 친척의 원리에 입각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하면 쟁점되는 문제들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고 함정을 면하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문제가 생긴 후엔 원리 원칙(성경)에 입각해서 문제를 해결할려고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파란과 분쟁으로 고통을 당하는 고린도 교회에게 고전1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 논리,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인은 지체임을 원리 원칙에 입각해서 시작하여 당파심이 강하고 소심한 교인들끼리 상대방을 걸어 법정 투쟁을 벌일 준비를 갖춘 참담한 상황에서(고전6:1-9) 고전13장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좋든 싫든 주님의 사활의 대속의 공로로 구원을 얻고 진리와 성령으로 거듭나서 한 성경 법도대로 살아 한 목적지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엡4:3-4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로 바울은 권면하였습니다.
하나가 되려면 엡4:1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로 냉철하고 힘들며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람은 두 사람이 동거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였습니다. 피차 갈라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패배로 알면 안됩니다. 현실을 인정한 아브람은 롯을 불러 서로 갈라설 것을 제안하고 하나님께 선택권을 맡기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성숙된 일면입니다. 대개 분쟁의 와중에 손해에 대한 방어하려는 것이 맘을 열지 못하는 심리입니다. 분쟁시 자기의 입장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논쟁하는 것은 상대에 대해 골만 더 깊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느리라”(벧전2:23)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분쟁과 불화시에 이기느냐 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악령과 성령 둘 중 누구의 병기로 쓰이느냐 하는 문제와 구원의 유익이 어떠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막보고 살면 안됩니다. 오늘만 있고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피하지 못하게 숙명적인 만남이나 문제를 만나게 해 주시는 것이 세상을 많이 살아보신 분들의 경험담입니다.

 지경 선택

아브람은 지경을 선택함에 있어서 자기 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더 중히 여기고 먼저 생각해서 신앙 위주로 하나님 섭섭하게 말고 기쁘시게 하려고, 자기 좋은 대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여론, 중론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뜻과 대립되고 배치될까 선뜻 여론, 중론에 따르지 않았고, 환경 조건보다 하나님 축복을 크게 여겨 하나님의 은혜라야 될 줄 알았기 때문에 선택권이 주님의 수중에 놓인 것을 알고 자기는 손 떼고 하나님께 맡기려 했습니다.
이에 반해, 창13:10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환경 조건을 보고 지경을 선택했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기 전인 것을 보지 못하여 영적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유황 불비로 멸할 땅인데 살다가도 피해 나와야 되는 곳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논이나 기도도 없이 자기에게 유리 한대로 자기 중심 위주로 지경을 선택하셨습니다.
진실된 신자라면 살다가도 도망쳐 나와야 될 땅을, 롯은 찾아 들어가 부패한 주변 환경의 유혹과 지배를 받아 딸들이 성내의 풍습을 그대로 흉내내어 아비를 술취하게 하여 동침하므로 불의의 자손을 낳고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선택한 그 땅을 뒤도 돌아볼 틈도 없이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기 보다는 사람의 여론 중론을 따라 지경을 선택하였습니다. 목자들의 다툼은 풀 좋고, 물 좋은 땅 차지하려는 다툼입니다. 목자들의 중론에 따른 선택이 포로와 노획물이 되기도 하고, 유황 불비에 재가되기도 했으며, 탈출은 했으나 롯의 처는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2단계 순종

아브람과 롯이 지경을 정하는 문제는 누가 무어라 한다고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생사화복, 흥망성쇠가 달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이같은 문제에 부딪혔을 때 형편, 사정, 환경 등 여러 주관적인 문제에 얽매이거나 붙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과 마음의 갈등을 느낄수록 괴로워하거나 속상해 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외로와 하지 마십시오. 신경성이 됩니다. 마음의 갈등을 가라앉히고 맘을 깨끗이하여 어떤 것에게도 영향을 받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람의 신앙단계중 2단계 순종은 객관의 어떤 누구에 의하지 아니하고 양심을 써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는 걸음입니다.

2단계 명령 순종 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13:14-15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 있는 곳에서’ 라고 하심은 어디에 서 있든지 자기의 서 있는 위치를 한 번 돌아보고, 찾아 알게 하신 후,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바라 본 동서남북은 창12:7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신 땅입니다. 창13:15-16 보이는 땅을 다시 한 번 네 자손에 줄 것을 재확인시키시고 ‘네 자손을 땅의 티끌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라’는 말씀대로 시야를 넓게 높게 바라보아서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 하심을 볼 수 있는 넓고 높은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창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리라』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되고 속히 될 실현 가능성 있는 실제입니다.
그 때 그 당시 실제적 현실은 좋은 땅은 롯이 다 차지하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고, 자식도 없는 현실이었으나 아브람은 더 넓고 높은 안목으로 약속을 끝까지 소망하면서 장막을 옮겨 거하면서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은 2단계 양심을 써서 영감의 인도에 따라 순종함으로 보이는 면에 창14:14보면, 재산을 지키기 위해 집에서 길리우고 연습시킨 318명의 군대를 거느리는 2차 순종의 보이는 축복은 보관하고 관리하기 쉬운 권세의 축복을 받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축복은 히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나니 이는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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