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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몸에서 난 후사 (창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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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며 교회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로 성장시키시기 위 하여서 말씀의 은사자를 세우셨습니다(엡4:11-12). 그러므로 교회가 함께 모여 하나 님의 말씀을 듣고 경배하는 것은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말씀의 사역자가 행하는 성경의 해석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의 바른 해석과 선포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되게 하는 시금석입니다. 성경 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삶의 본으로 해석하면 교회는 어느 정도 신앙적 열심과 도 덕적 개선의 노력으로 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 시는 평강과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율법주의의 멍애도 벗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 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개념을 알려주는 교리책으로 이해하 면 교회는 어느 정도까지는 신앙사상을 정립하여 신앙이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모르는 사이에 종교철학으로 무장된 사상집단으로 머무르기 쉽습니 다. 성경을 역사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대한 기록으로만 이해하면 역사 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을 오늘의 삶의 현장에 적용하여 어느 정도 경건의 모양 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 님의 생명의 능력을 충만히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봉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상의 해석법들은 상당 부분에 있어서 진리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인 성경 해 석법의 근본에 온전히 선 것은 아니어서 그에 상응한 신앙의 결핍을 가져옵니다. 주 님을 얼굴로 뵈올 때까지는 성경의 해석에 완전할 수는 없으나 바른 해석의 중심을 확고히 하는 것은 바른 교회를 이루며 성장하는 일에 관건입니다.

성경을 교회에서 해석하는데 있어서 여러 요소들을 감한하여야 합니다. 특히 설교 를 듣는 회중은 중요한 변수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본문에 대한 설교의 다양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속사적인 성경해석법의 중심에서 벗어나면 성경의 본래의 뜻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먼저 창세기 15장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는 본으로 제시하고, 이어 서 창세기의 본문을 건너 뛰지않고 해석하고자 합니다. 나 자신이 이 일에 심히 미 숙하지만 성경과 함께 성령의 증거로 친히 교회에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으로 이 일에 전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복주시어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며 나타내기를 항상 기도합니다.

구속사적인 본문 해석의 본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저의 목적을 위해서 성경해석에 대한 이론 설명을 곁들이고 그 이론에 맞추어서 본문을 전체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취하겠습니다. 본문 전체를 또는 작은 주제를 전체의 주제에 비추어 설교할 수 있는 구조로 강론하겠습니다. 15장에서 설교자가 택할 제목은 여럿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두려워 말라', '방패요 상급이신 하나님', '몸에서 날 후사', '믿음의 의', '언약 체결식', '고난을 통한 구원', '구원의 시기', '구원의 영광', '언약의 신실 함과 영원성' 등등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설교의 주제에 대한 선택은 먼저 15장 전체를 해석한 후에 하여야 하며, 15장의 주제에 일치된 내용이어야 합니 다.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는 이론은 생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해석의 방법론>

성경은 기록한 목적과 문학적 구조에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창세기는 단순히 인류의 고대사와 족장들의 역사를 역사적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시내산에 모인 언약백성에게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과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 시기 위한 신학적 목적으로 편집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역사적 배 경을 연구하는 것이 성경의 언어와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 은 해석된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에 확정된 본문을 그 문맥에서 해석하여야 합니다.

기록목적과 전체와 부분에 대한 본문의 구조파악이 되었으면 거기에 비추어 먼저 강론할 본문의 내용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15장의 앞과 뒤를 읽어서 문맥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을 장으로 나눈 것은 13세기의 일이 며 영감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장으로 나눈 것이 내용을 파악하기에 편리하지만 각 장을 독립된 본문으로 이해하는 경향성을 주어 문맥을 아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 습니다. 또한 15장은 아브라함의 전체 역사에 비추어 보아야만 구원역사적인 바른 내용을 파악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역사는 창조의 처음 역사(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언약)와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구약 경륜의 완성인 가나안 왕국에 걸친 전역 사를 배경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역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비 추어볼 때만 바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신학적 기독론적 해석이 본문의 구속사적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경은 전체에 비추어서 부분을 해석한다는 문맥해석과 같은 말 입니다. 문맥해석의 필연성은 문장해석의 일반규칙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성경의 유기적 통일성 때문입니다. 성경의 전체 문맥은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 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단번에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에 배치된 해석은 정죄됩니다.

 이상의 해석 방법에 의해서 창세기 15장을 해석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의 문학적 구조에 비추어서 15장의 위치와 의미를 알아봅시다. 창세기 의 기록 형식의 특징은 10개의 톨레돗트(대략, 후예, 계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출생의 역사입니다. 계보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고, 거기에서 시작하신 일이 그 계보에 속한 모든 자에게 미치며, 계 보의 마지막 인물은 그 계보에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일의 완성이요 새로운 계보를 시작하는 머리가 되면서 그것의 궁국적 완성을 향하여 역사를 진행시키십니다. 하나 님의 출생의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로서 이스라엘과 세상에 임하심으로 그 목표에 이르렀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류를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며 하나님은 그러한 영광으로 만유 안에 계십니다.

창세기는 인류의 고대사와 족장들의 행적을 역사적 목적으로 기록한 역사서류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권세에서 구원하사 시내산으로 모으시고 만 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창조의 목표를 봉사하는 민족으로 그들을 어떻게 지으셨으 며 이제 그들을 구원하사 인도하시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한 신학적 목적으 로 해석하여 기록한 구원역사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 중에서도 셈의 계통에서 생명의 역사를 계속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데라의 후손 아브라함을 택하사 가나안으로 옮기시고 그 땅을 새로운 성 소로 삼으시고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사 하나님과 동거하며 동행하며 새 인류를 출생시키는 새로운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습니다. 여기 15장에서는 늙어서 자 식을 둘 소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몸에서 날 후사를 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계시합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알아 봅시다. 본문의 내용을 아는 것이 해석의 근본 토대입니 다. 당시의 구원역사 배경에서 본문을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을 파 악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역사적 문법적 해석입니다. 이 단계가 주석적 과정이며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는 기초입니다. 김 영철 교수가 창세기를 이러한 방식으로 탁 월하게 해석한 "주님의 주님되심"(여수룬 출판사)을 참고하시면 본문의 내용을 바르 게 파악하는 방법을 이해하는데 큰 유익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한 것만 말해야 하며 그 문장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 해하였는가를 알아내는 것으로 그쳐야된다는 선에 머루르면 않됩니다. 그러한 방식 의 해석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역사가 아니라 여러 시대에 여러 모 양으로 말씀하시는 단절된 역사의 기록으로 전락시킵니다. 그러한 방식의 해석에 의 하여서는 본문에서 옛 역사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배워서 불변하시는 하니님 의 그러한 속성을 오늘에 의지하여 사는 소위 적용을 할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 서 구원역사의 오늘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함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구약성경은 일차적으로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책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리스도가 임하신 교회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역사적 문법적인 의미만 관심하 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빛에 비추어 해석하지 아니하면 본문의 의미를 말한 것 이 아닙니다. 구약의 역사적 문법적 의미만 본문의 의미라고 이해하면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가 임하신 신약의 교회에도 여전히 휘장으로 가리운 책이 되고 맙니다.

아직 계시되지 않은 미래의 빛에 의해서 지금의 본문을 해석하면 잘못된 것이 아 니라 그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성경 기록 자체도 역사적 목적으로 그때 그때 역사적 사실을 순서대로 기록한 서류철이 아니라, 이전의 역사적 열매를 오늘에 누리는 백 성에게 이전의 구원역사를 해석해 주면서 미래의 성취를 소망하게 하기 위한 신학적 목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더욱 진행되고 발전된 언약과 역사의 빛 에 의해서 해석되고 동시에 이전의 언약을 갱신하면서 진행합니다. 그리하여 역사의 최고 정점인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전의 모든 언약과 역사가 하늘의 참된 빛으로 성취되고 해석됩니다. 그리하여 이전의 모든 언약을 폐지합니다.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통해서 본문의 구원역사에서의 내용을 알았으면 다음에 할 일은 그 내용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문법적 본문의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와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독론 적 해석이 성경 본문의 의미입니다. 역사적 문법적 의미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에 의해서 해석될 때만 그것이 본문의 구속사적인 의미입니다. 구원역사의 과거와 미래 는 계시 역사의 정점인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에 의해서만 해석됩니다. 옛 언약 역 사에서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친히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구약 성경은 신약교회의 말씀듣는 백성에게 휘장을 걷우시고 친히 말씀하시는 그리 스도의 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 해석 곧 기독론적 해석이 본문의 의 미를 해석한 것입니다.

본문의 역사적 문법적 내용이 본문의 근본적 의미임을 항상 명심하여야 합니다.

역사적 문법적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충만한 실재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 러므로 역사적 문법적 의미와 상관성이 결여된 기독론적 의미는 비록 그 내용이 성 경적이어서 경건한 감화를 줄지라도 본문이 말하지 아니한 자의적 해석임을 항상 주 의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영해가 성경의 유일한 계시적 권위를 파괴하는 자유주의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영감된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는 것 보다는 본문을 교회에서 읽고 나서 성경을 덮고 본문 강론과는 무관하게 일반적인 경건한 교훈을 하는 것이 교회에 오히려 유익할 것입니다.

문맥에 의한 성경해석법은 역사적 문법적 해석과 신학적 기독론적 해석을 함께 말 하는 의미입니다. 신약의 그리스도가 성경의 전문맥입니다. 옛 언약 역사에서 일하 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아버지이십니다. 옛 언약 역사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와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은 옛 언약역사에서 그림자적으로 이스 라엘에 임하신 하나님께서 구원역사의 오늘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실체로 교회 와 세상에 임하신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역사의 통일성과 함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역사의 불연속성을 강조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는 단순히 옛 언약의 발 전의 한 단계가 아니라, 이전의 언약을 폐하는 새 언약입니다. 그것은 옛 창조와 새 창조의 대비이며, 땅의 아담과 하늘의 아담의 대비이며, 썩어질 생명과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대비이며, 죄의 종과 하늘의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은 자의 대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질서가 땅에 임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15장의 내용 곧 역사적 문법적인 의미를 알아보고 이어서 그리스도 와의 관계에서 본문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할 일은 15장을 일별하여 15장의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주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앞뒤 문맥에 비추어서 주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와의 관계를 해석하여야 합 니다.

그러면 15장 자체는 무엇을 말합니까 15장을 일별해 봅시다.

1절의 "이 후에"는 14장 사건의 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 여호와께서 내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나는 아들이 없으니 다메섹 사람인 종 엘리에셀이 나의 상속자가 되겠습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종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아브라 함의 후사가 되며, 그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번성케 하리라고 언약하셨 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한 언약을 하시는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려고 갈대아 우 르에서 아브라함을 이끌어낸 여호와로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 적과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주실 증거를 구하는 아브라함의 요구에 응답하시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취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 하였습니다. 언약 체결식에서 여호와께서 하 신 말씀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소유하기 까지의 역사적 과정과 영광이었습니다. 약속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 4대만에 성취될 것입니다. 그동안은 이 방 땅에서 종살이 하지만 여호와께서 압제자를 치시고 그들의 큰 재물을 취하여 나 오게 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아모리 족속의 죄가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서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키듯이 그들을 치시고 그 땅을 정결케하사 아브라함의 후손 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의 형상으로 쪼갠 재물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자신이 생명으로 언약성취를 보 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에게 주실 땅의 경계와 정복할 가나안 10족속을 열거하셨습니다.

이상이 15장을 일별한 내용입니다. 15장에서 말하고자한 중심되는 사상은 무엇입 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어 가나안 땅을 기업으 로 주시고 거기에 권능있는 하나님의 평와와 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언약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여호와게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자 신이 아브라함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이 상속할 자식이 없음을 여호와께 아뢴 사실에서 알 수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몸에 서 날 후사를 주시는 것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방패요 상급되시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아 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방패요 상급입니까 이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찾아 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은 그의 몸에서 날 후사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는 것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두렵지않도록 여호와의 방패가 되며 여호와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됩니까 아브라함은 이전에 자기를 도와 큰 승리를 걷운 318명보다 더 큰 군대를 구하거나 세상 군왕들 의 멸망을 기도하지 않고 몸에서 날 후사를 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아들로 초능력을 가진 아이를 주셔서 세상의 군왕들을 정복하여 아브라함을 보호하 고 많은 재물을 얻게해주시라고 아브라함이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이전에 자기가 쳐서 정복시켰던 연합군이 아닙니다. 아브라 함이 연합군의 재침입을 두려워한다는 해석은 우리의 상식적 가정에 의한 것이지 본 문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가정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건지기 위해서 세계적 강국의 연합군과 전쟁하기 전에는 그는 한낱 가나안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 족장이었지만 이제는 왕중의 왕으로서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 인물이다. 그런데도 아 브라함은 소돔 왕의 연합 제의를 거절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살렘 임금인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의 일을 바치고 그를 섬기며 살았다. 그러므로 이 제 아브라함은 세계로부터는 고립되었으며 오직 의지할 분은 멜기세덱을 통해서 복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이러한 신실한 자기 의 종에게 나타나사 자기가 친히 보호해 줄 것이니 세상의 군왕들을 두려워하지 말 라고 말씀하시며, 소돔 임금으로부터 전리품을 하나도 취하지 않은데 대해서 자신이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가정이 옳다면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이전 보 다 더 큰 군대와 그들을 무장할 많은 재물과 적군에 대한 계속적인 승리와 그들의 멸망을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은 해석된 하나님의 구원역사이기 때문에 본문이 말하는 바가 하나님의 해석 입니다.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세상의 군왕들이 아니라 상속할 후사를 낳지 못한 것 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집에서 길리운 이방인 종이 상속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두 려움입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자기의 모든 것을 맡아 자기를 대신해서 충성스럽게 관리해온 종 이 모든 것을 상속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브라함 의 두려움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상속시키기를 원하는 가나안 땅의 본질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대대로 상속시키기를 원하는 가나안 땅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 까 아브라함이 그의 몸에서 날 후손에게 상속시키기를 하나님께 기도한 가나안 땅 의 본질은 14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14장에서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의 승리를 통해 서 세워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살렘 왕인 멜기세덱의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하여 롯과 가나안의 모든 것을 소유한 왕 중 왕이 되었어도 가나안의 참된 왕은 아브라함이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드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살렘 왕인 멜기세덱은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 라함을 영접하여 떡과 포도주로 잔치하였습니다. 그는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 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승리케 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아브라함에게 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취하여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대리왕으로서 전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맞 아 잔치하고 아브라함은 자기를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친 것입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축복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바친 것입니다. 아 브라함의 허리에 있는 자들은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바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축복과 헌신이 레위지파로 대표된 그 후손인 이스라엘에게서 계속된 것입니다(히7:1-7). 멜기세덱의 존재는 족보 표현법으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며,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살렘왕이니 평강의 왕이요 멜기세덱이니 의의 왕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 께 하시는 성소요 의와 평강의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섬기 며 증거하는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왕이요 자기에게 속한 자를 출생 시키는 새로운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의 소망과 두려움,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격려와 약속은 다 가나안 에 설립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하나님 께서 함께 하시는 이 생명의 나라는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영원한 나라와 생명의 약속은 처음의 구속언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인의 후손의 출생에서 진행되며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아브라함을 가나 안으로 옮기시고 새로운 성소 가나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새 인류를 출생시키는 조상 으로 그를 세우시고 하나님이 이루실 나라의 모든 것을 그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몸에서 난 후손이 조상의 것을 상속하는 것은 영원성을 나타내는 구약의 방식입니 다. 구약에서 대제사장 아론과 다윗 왕의 아들로 그 조상의 지위와 직무를 종신적으 로 상속케하신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과 영원한 왕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을 의미합 니다. 그들은 영원하신 대제사장과 왕이신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형(모형)입니다.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사 이스라엘 중에 계시며 자신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 나라를 상속하면 이 왕국은 종인 엘리에셀의 이름으로 왕조가 바뀌는 것입니다. 왕이 나라를 대표합니다. 엘리에셀의 왕조에서는 아브라함의 이름 은 끊어집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아니라 자기 집의 집을 맡은 종이 아브라함의 가나 안 왕국을 상속하여도 아브라함이 죽고 그 후손이 상속하지 못하면 아브라함과 함께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끊어지는 의미는 같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상속할 자식이 없이 죽으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세 우신 멜기세덱의 나라는 아브라함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입니다. 시작도 없으며 끝도 없는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이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죽음이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브라함의 대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라 죽 음이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시기 위해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처 음부터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다고 기록합니다(창 1

1.30). 사라의 특징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에도 불구하 고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은 여인의 출산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함으로 이루어 나갑니다. 그런데 사라의 태는 하나님께서 복주신 생명을 생산 하여 번성시킬 수 없는 무덤입니다. 생명을 생산하는 어머니로서는 죽은 자와 방불 합니다. 나중에 약속의 성취로 여호와께서 이삭을 주셨을 때에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다 같이 생명을 출생시킬 수 없는 죽은 자와 방불하였다고 언급합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아브라함에게 몸에서 날 후사를 주사 그나라를 상속케 하시겠다는 여호와의 언약은 죽음의 저주와 세력을 제거한 영원한 생명의 언약이요, 하나님과 영원히 함 께 하는 새 인류를 출생시키시는 새 창조의 언약이요 부활의 언약입니다.

이상이 아브라함이 두려워하며 자기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신 하나님께 아들 이 없음을 기도한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이 종에게 모든 것을 상속시킬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두려워한 이유는 그가 상속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는 하나님의 생 명의 나라에서 끊어지며 죄와 사망을 정복하시는 여인의 후손이 승리하시는 나라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면 하나님의 생 명의 약속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며 가나안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승 리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는 것이 죽음의 세 력을 이기신 하나님의 방패요 하나님이 친히 생명의 하나님으로 사람과 함께 하시는 영원한 상급입니다.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므로 가나안 땅에서 아 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케 하셨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새 창조의 능력이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출생을 통한 구원의 약속이 죽은 자와 방불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씨를 주심으로 새로운 인류를 출현시켰습니다. 상속자 이삭은 혈육의 힘으로 낳은 씨가 아니요 죽은자와 방불한 자의 몸에서 출생시킨 약속의 씨입니다. 약속의 씨인 이삭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이 스라엘은 새로운 인류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요 백성입니다. 죽 음이 정복된 생명의 나라입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아브라함에게 몸에서 날 후사를 주사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케 하신 여호와께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열방의 세력들을 심판하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고 그들 중에 거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섬긴 나라가 그 후손에게서 구현 된 나라이며, 그 나라를 회상하며 그것의 온전한 성취를 소망하는 나라입니다. 법궤 위에 좌정하신 의의 왕 여호와는 그 수도를 평강의 도시인 예루살렘에 두시고 자기 백성의 경배와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출생의 실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결혼관계를 통해서입니다. 그리 고 이삭도 죽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처럼 생명의 언약을 따라서 기도하여 야곱을 얻었어도 그들도 다 죽었습니다. 여전히 죽음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조상들 을 무덤에 장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스라엘을 번성하고 번성하게 하 셨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와 방불한 아브라함에게 상속할 씨를 주심으로 죽음을 정 복하사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고 진행하셨어도 그것은 사망에 대해서 생 명이 승리하는 전형이요 그림자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사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를 가나안 땅에 세우신 여호와 께서 아브라함의 씨로 이스라엘과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혈육을 입은 몸으로 이스라엘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하사 영으로 사는 새 인류의 머리이시요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보좌 우편에 앉히심으 로 죽음의 세력을 영 단번에 정복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벗으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새 인류의 조상으로 살려주는 영이 되셔서 영을 따라서 사 는 신령한 이스라엘로 교회를 출생시키시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드리시고 하늘 보조에 앉으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며 생명에 속한 모든 은사를 공급하십니 다. 음부의 권세가 신령한 이스라엘인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로 말미암아 자신을 이스라엘의 방패와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브라 함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영원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감추인 바 된 교회의 생명을 깨뜨릴 어떤 권세도 없읍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가 교회가 영원히 의지할 하나님의 방패요 영원히 누릴 상급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즐거워하십시요.

그를 의지하여 모든 두려움을 이기십시요.

 하나님께서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의 형상으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습 니다. 하나님 홀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명으 로 이 언약을 보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언약 성취의 보증입니다. 사람 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사 약속을 성취하십니 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언약 범죄의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사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 으로 이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죄와 사망 아래 있는 사람의 몸의 질서를 입게 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저주 받은 죽음으로 언약 파 괴의 형벌을 받게하시므로 언약을 완성하셨습니다. 죽음에 던지우기까지 순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가 죽으심으로 완성하신 언약의 체결자이십니다. 죽음에까지 낮 아지사 순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는 생명의 언약을 완성하시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신실치 못해도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으 신실하심이 하나님께서 죄인과 함께하시는 영원한 보증입니다. 우리가 원수되고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 고 이제 존귀케되신 아들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심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원한 보증입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시고 영광의 보좌에 계신 주님이 우리가 의지 할 하나님의 방패요 영원히 누릴 상급의 보증입니다.

  몸에서 날 후사-함께 하시는 의

아브라함에게 몸에서 날 후사를 주사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시는 나라를 영원히 상속케 하시겠다고 언약하신 여호와를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그 나라는 시작도 끝 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과 함께 하 는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말은 여호와의 존재를 믿었다는 의미 가 아니라, 죽음이 정복할 수 없는 영원한 나라를 자기와 후손에게 주사 함께 하시 는 여호와를 신뢰하고 자기 몸의 죽음과 사라의 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치 않 고 확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 럼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약속한 것을 능히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창조 주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새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언약에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습니다(롬4:16-22). 이러 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신 목적과 그의 후손에게서 성취될 언약의 과정과 영광과 기업을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여기심은 함께 하심의 의미입니다. 함께 하시기 때문에 동행자인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모든 계획의 과정까지 소상히 알리 시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의 본질적인 주제인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음"에 대해서 좀더 자새 히 살펴봅시다.

 이제까지 정통신학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하심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 "하 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이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 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제까지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면 하나님이 저주하시는데 아무도 율법을 온전히 항상 지키지 못하여 모든 사람 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를 저주하지 않고는 하나 님은 죄인을 용서하실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의 의의 기준인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하나님은 그에 대한 상급으로 영생을 주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표가 되시어 무 죄자로서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다 받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수동적 순종이 다. 그리하여 우리가 받을 율법의 저주를 제거하셨다. 그리고 아무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예수님이 온전히 지키시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동적 순종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한 영생의 공로를 세우시고 하늘의 보좌에 오르시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를 믿어 그와 연합한 자에게는 율법의 저주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생에 참여한다.

신자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감사함으로 지키는 것이다. 율법이 하나님의 의의 표준 인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사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케 하셨다. 그 리스도 예수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신 의로우신 자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 다.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 자의 죄는 예수님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영생의 공로는 믿는 자에게 전가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전 가시키는 것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의에 참 여한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선고된 의가 우리가 믿는 때에 우리에게 전가된다." 이 상에 말씀드린 것은 개혁파 교회에 속한 성도는 익히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증거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지키시어 하나님의 법적 기준에 일치했기 때문에 무죄한 자로서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고 그 일로 공회에서 정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은 구약 율법의 중심입니다. 성전을 허는 것은 옛 제도를 끝내는 것입니 다. 율법에 일치하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의를 얻는다는 사상을 성경에 서는 정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그의 무죄성과 그에 대한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무죄하심 때문에 보좌에 오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님은 창조자이시요 구원역사를 이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이제 참사람이 되사 십 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을 파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종점에서 완성하셨기 때문에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신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고,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의의 길이 예수 안에서 완성되 었음을 증거합니다. 거기에서 법을 지킨 의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 서 5장에서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의 죄와 한 사람 예수의 순종의 의를 말할 때에도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가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은 죄 때문에 더해진 것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그 아내 사라의 태 의 죽은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후사를 주신다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같은 선에 두고 믿음을 정의합니다(악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 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은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 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4:21-24). 그리고 "예수는 우리 범죄함 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예 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해석합니다(롬4:25).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는 무엇입니까 먼저 알아볼 사실이 있습니다. 창세 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것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 시기 전에는 아브라함은 불의한 죄인이요 하나님의 원수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에 대해서 불의한 원수인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나안에서 그에게 나타나 그 땅을 주시리라고 언약하시고 그의 제사를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은 불의한 죄인의 씨를 하 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번성시키사 인류를 죄의 나라로 완성하실 것을 목표로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불의한 죄인인 아브라함을 승리케 하시고 자기의 제사장 멜기 세덱을 통해서 원수인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죄인 아브라함의 십분의 일을 받으셨 습니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죄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하 심을 입기 전에도 그러한 은혜를 그에게 입히셨다고 설명할 것입니까 15장에 와서 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이전에 여호와께 제사하며 그 이름을 부른 예 배는 거짖이었습니까 이제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신 것은 불의한 죄인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제는 무죄하다고 선언한 하나님 의 법적 선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다고 여기신 역사적 사 실을 떠나서 믿음의 의를 정의하는 것은 성경의 정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 의적 의미로 성경을 읽어낸 결과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믿음의 의는 우리를 대신 해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어 영생의 공로를 세우도록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무죄하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믿음의 의는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믿음의 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의 온전함으로 성취 된 의입니다.

또 주의할 점은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행적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성장 과정 을 알리어서 우리에게 본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브 라함이 자신을 부르시고 복주시고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만을 알았으나 이제 신앙이 성장하여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을 알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필요한 대로 아브라함에게 여러가지를 경험하게 하시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 신을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신앙이 하나님의 계시와 함께 진행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개인의 발전 과정을 기록한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또한 세상 구원을 위해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계시합니 다. 성경의 인물과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자신과 세상 구원을 위한 자신의 일을 알리시며 아브라함과 동행하시 는 것입니다. 계시의 진행 때문에 성경 인물의 신앙의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신약 의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계시의 빛과 능력에 있어서 구약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 는 풍성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과,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신 처음 단계에서가 아니라 여기 15장에 와서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 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해석의 초점입니다.

만일 의롭다하심이 죄인을 무죄한 자로 선언하는 것이라면 부르심의 처음 과정에 서 의롭다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승리케 하시고 멜기세덱이 함께 하는 나라를 세우시고 난 뒤인 15장에 와서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 믿음을 의 로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는 죄인이 용서받아 구원되는 개인 구원의 의미가 아니라, 15 장에서 계시하신 것처럼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는 것과 연결된 의미입니다. 믿음의 의는 아브라함이 믿은 여호와의 언약 즉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신다는 여 호와의 언약의 의미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주의할 점은 아브라함이 아직 보지 못한 미래의 일을 믿었다 는 의미로 믿음을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아직 보지 못한 일 을 믿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은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는 여호와를 믿은 것 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신다는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면 다른 어떤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아니 라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는 여호와를 믿는 것이 의로 여기심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 니까 바로 그것이 믿음의 의를 아는 요점입니다.

믿음의 의는 죽은 자와 방불한 노인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할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겠다는 여호와의 언약과, 그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뢰로 구 성됩니다.

믿음의 의는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을 배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 시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아브라함의 노년에 이르러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미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이 몸에서 난 후사가 없이 죽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 는 생명의 나라는 죽음에 삼킨 바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사 가나안 땅을 정복케하시고 멜기세덱을 봉사하는 하 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동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께 제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예배하며 그 이름을 이방인 중에서 증거하는 것이 아브 라함의 생명이요 모든 소망이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미 86세의 나이로 늙었 습니다. 아브라함만 늙은 것이 아니라 그는 본래부터 불임이며 이미 경수가 끊어진 지 오래인 아내를 두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웠습니다. 후사가 없이 자기가 죽 으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는 자기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인가 자기가 후사 가 없이 죽으면 자기와 동행하사 함께 하는 영원한 나라를 가나안 땅에 세우시겠다 는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후사가 없이 죽음에 임박한 자기에게 영원한 하나 님의 생명의 나라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서 몸에서 난 후사가 없는 자기는 끊어지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두려 웠습니다. 이제까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여호와의 생명의 나라가 아브라함의 노년 에 이르러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에게 몸에서 날 후사를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죽음의 권세에서 지키시고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상급이심을 아브라함이 믿었습니 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여인의 후손을 통 해서 이루시는 생명의 승리를 믿었습니다.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없 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믿었습니다.

죽음의 태에서 함께 하는 나라를 상속할 씨를 주시는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하나님 의 나라를 상속할 새 생명을 출생시키는 일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여호와와 두려움 이 없이 동행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믿는 아브라함과 함께하사 상속할 씨 를 주시고 함께 하시는 그 나라를 영원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는 말은 그가 가나안 땅에 설립된 하나님 나라에서 그에게 속한 새 인 류를 출생시키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의 근본 개념은 법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입니다. 하나 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신 것은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이 정하 신 바른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읍 니다. 이성적인 피조물인 천사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은 피조물과 다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에 일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으므로 하나 님의 보시기에 좋은 의로운 상태요 그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요구된 도덕적 의를 행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존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되심으로 하나님으로서 의로우시고 사람은 하나님을 순종하 여 동행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롭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 음에도 불구하고 후사를 약속하시는 여호와를 생명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몸의 죽음도 생명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 을 믿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사 영원히 함께 하실 후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소멸시키는 죽음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과 영원 히 함께 하심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요, 생명의 하나님을 대항하는 죽음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의 믿음의 의입니 다. 늙은 아브라함에게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실 언약에서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그 언약을 믿는 아브라함도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

 죽음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의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후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사 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후사인 언약의 씨 이삭도 죽었습니다. 이삭의 모든 후손도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과 함께 하시는 의는 죽음 의 세력이 온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누렸던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의의 그림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의가 모세의 율법에서 그 림자적으로 구현되면서 그 온전한 성취를 소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증거하였으나 줄 수 없었던 온전한 의를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스라엘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아브라함의 씨로 오사 죽음의 왕적 세력 을 영 단번에 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신 그 아들 예수를 죽 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의 생명을 교회에 선물하는 주가 되 게 하셨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으며 교회는 하나 님의 전이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한 영으로 사는 몸입니다. 성도는 그리 스오 안에서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의의 병기가 되었 습니다. 지금도 활동하는 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가 성령의 권능으 로 교회에서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생명으로 영원히 신령한 이스라엘인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신 그 아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히 죄 와 사망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는 우주적인 생명의 왕국을 건설하셨 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합시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신 그리스도가 하늘의 후 사이며 이 사실을 믿는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세 력을 이기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방 패요 상급이십니다. 죽음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여 러분의 기업으로 누리시고 우주적인 그의 나라가 완성되어 사망이 영원히 불못에 던 지울 때까지 그를 신뢰하고 동행하십시요.

 (강론을 끝내고 나서) 창세기 15장의 나머지 부분은 창세기를 차례대로 해석할 때에 강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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