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배신자의 삶 (창 04:16-24)

첨부 1


오늘은 하나님을 뜻을 저버린 가인과 라멕의 결과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함께 살펴 보고자 한다.

 오늘의 본문은 한결같이 여호와의 뜻을 저버린 사람들의 기록이다.

 16절의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가인인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갔다고 했다.

 또 떠나서 나간 곳이 에덴 동편 놋 땅이라고 했다.

놋은 도주와 추방을 의미하는 땅이다.

 그 후 거기서 살면서 많은 자식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각기 세상의 문화의 조상들이 되었던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 자식들 중에 유별나게 성경이 많이 말하고 있는 자식이 있는데 그가 바로 라멕이란 자식이다.

 이 라멕은 가인의 후손이라 그런지 가인을 너무도 빼다가 밖았다.

 그래서 가인과 라멕을 같은 차원에서 함께 생각을 해 보고자 한다.

 1,하나님의 뜻을 잘 못 이해하고 있었다.

 지난시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겠다고만 했었다.

그런데 가인은 지금 여호와의 낫을 떠나고 있다.

 여호와의 앞만 떠난 것이 아니고 부모의 앞을 함께 떠난 것이 되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라멕도 하나님의 보호 같은 것은 생각에도 없다.

칼과 창이 있으면 얼마든지 보호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면서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다시 뵈올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 더 관신이 있었다.

 물론 여호와의 앞을 떠난 자의 자신의 보호는 스스로로 해야함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겠다.

 라멕은 인류 최초로 두 아내를 거느린 일부다처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의 삶에는 계속적인 살인이 있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보호도 행복도 있을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때 늦은 감은 있지만 이렇게 유리하는 자가 되고 방황하는 처지가 되고 또 살인에 살인을 계속해서 사는 삶이 불행이라는 것을 느꼈어야 했는데 전혀 그런 것을 발견 할 수가 없다.

 가인 스스로도 회개의 삶으로 돌아와야함은 물론 그의 자식들에게는 자기의 전철을 물려주지 말아야 했는데도 계속해서 대를 이어가고만 있는게 아니라 가인 보다도 더 악한 자식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2,세상적인 일에서 만족을 구한다.

17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가인이 처음에 아들을 얻었을 때 에녹이란 이름을 지었을 때 그런대로 희망을 가졌다.

이 "에녹"이란 이름의 뜻은 "설립" 또는 봉헌"이란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자기는 이미 버림을 받았지만 이 주신 아들만큼은 봉헌을 한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성도 아들의 이름인 에녹이라 불렀었다.

그런데 그의 삶의 결과는 또 아들들의 삶의 결과도 그렇지를 못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무었이 가인으로 하여금 그렇게 되게 했을까

장가를 들고 또 자식에 자식을 보면서 거기에 재미가 들었던 모양이다.

또 성을 쌓으므로 자기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제는 그 성이 그와 그의 자식들의 안식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이 거하지 않는 성, 인간의 냄새로 충만한 성, 타락과 퇴폐가 넘치는 성 그 성이 좋았던 것이다.

 그렇다 영적인 일에 열중하지 못하면 결국 육적인 일에 열중할 수 박엔 없다.

 그런데 가인과 그 후손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세속적인 것들로 영적인 것을 대신 할 수는 없지만 영적으로는 세속적인 삶을 능히 이겨나간다는 진리를 몰랐다.

 이젠 교회와 제단은 그에게서 멀리 멀리 떠나 간고 말았다.

 오늘도 우리들 주변에 영원히 멸망할 것들을 위하여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비록 거기에 충요가 있고 환락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가인이나 라멕은 강력한 자요 유능한 자라 할 수 있다.

번영도 부귀도 영화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땅이 복을 주지 않음으로 땅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서 행복의 조건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다는 장막에 거하며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목자)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조상이 되었고 (음악가) 씰라의 아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고 (대장장이) 라멕은 시를 지었다.

 육축이 풍부했다.

음악이 있고 계계문명이 발달했었다.

 행복했을까 참 자유가 있었을까 마음에 만족이 있었을까

사도 요한의 경고를 들어보라 계18;2-3절에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당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음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휘황찬란히 반짝이는 선물들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오로지 짧은 시간에 어두운 밤으로 지고 말 것이다.

그들이 희망을 가지고는 있겠으나 이는 꿈을 꾸는 것과 같은 것이다.

 3,세상에서 유명해지기를 원한다.

저들이 만든 것 그 어느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들의 향락과 쾨락을 위한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들의 인격을 닦기보다는 도시를 세웠다.

그들은 그들의 업적으로로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을 희망햇다.

그들은 그들의 공적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하늘 나라에서 보다는 세상에서 유명해지기를 희망했다.

가인이 자기가 쌓은 성의 이름을 무어라고 지었나 자식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란 곤 단 한가지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축복하실 수 없었다.

 23-24절을 같이 보자.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재이로다 하였더라"

여기의 이말을 하고 있는 라멕은 이 말이 무었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가인을 지켜주신다는 의미와 함께 그마만큼 더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인보다 더한 칠십배란 무었을 뜻하는가

하나님을 떠난 자는 결국 버림 받은 생활도 자처해서 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난 자의 형벌은 누가 주어서라기 보다는 스스로 받고 있음을 본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