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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 그 첫째 갈대아 우르 (창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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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믿음과 구원을 이야기할 때면 으례히 아브라함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제 몇회에 걸쳐서 아브라함의 생애를 단 한사람의 신앙 행로로만이 아니라 다각도로 추적해 보고자 한다. 그의 생애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복음의 비밀, 구원의 비밀인 믿음을 가장 잘 설명하는 사실 때문에 상당히 주의 깊게 추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 하셨을 때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다. 떠나라 하면 떠나고 바치라 하면 바친 그의 신앙 앞에서 우리는 기가 죽는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은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음이니라(히 11:8-10)” 아브라함은 정말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일까 오늘은 그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라함과 나흘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흘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흘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흘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하란은 갈대와 우르와 가나안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란에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하란까지는 누가 그를 데리고 나왔는가 아버지 데라가 여행의 주도권을 잡고 나왔다.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 7:2-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흘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수 24:1-3)” 이상의 말씀을 종합해보자. 가나안에 오기 전 갈대아 우르에 살 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누구를 섬겼을까 여호수아 24장을 보면 데라만 이방신을 섬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너희 조상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너희 조상들’이라는 말을 보아 우리는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고 아브라함도 동일하게 우상을 섬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증거들을 또 다른 곳에서 살펴보자.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창 11:31)” 여기에서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가나안으로 가라는 명령에 갈등은 데라와 아브라함 사이에 벌어져야 한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의 주도권은 데라가 쥐고 있다. 최소한 데라와 아브라함이 같은 편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행 7:2)”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면 여호와를 믿는 아브라함과 믿지 않는 자기 친척 집을 떠나는 싸움이라면, 그 집과 혈연을 깨고서라도 믿음을 지켜야 되는 싸움이라면 아브라함은 일단 데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고 데라와 함께 행동한다. 결국 아브라함도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사 “아브라함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내가 네게 복을 주려 하노라. 너는 네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꿈의 내용을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데라는 이방신을 섬겼을지언정 종교심은 있었던지라 알지 못하는 신의 명령일지라도 거절하지 못하고 스스로 주동이 되어 혈연들을 모아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갈대아는 그 당시에 문명권이었고, 하란은 갈대아 문명의 最邊方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향을 떠나기는 했으나 국경은 차마 넘지 못했다. 당시에는 자기를 방어할수 있는 것은 자기 밖에 없었다. 그 정도의 환상을 가지고 자기 문명권을 벗어나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갈 수는 없었다.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들은 떠밀려서 온 것이다. 안갔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밀려 온 것이다. 그 이유를 성경은 지금 이렇게 된 상황의 멧세지로 우리에게 설명을 한다. 아버지 데라의 이름의 뜻은 ‘지연하다’ ‘연기하다’이다. 데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도움보다는 방해를 받았다. 하란에서 데라는 죽는다. 창세기 12:5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마침내’들어갔다고 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지금 인식하고 경험하고 있는 것이 원인도 조건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란까지 밀어내셨고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밀어내고 계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이리저리 밀리고 있는 것이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든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어갔더라(창 12:5)” 성경은 마침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출발한 것이라면 하란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희박하다. 하란에서 특별히 쉬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하란에 거하기 전’이라고 해서 그 기간을 특별히 한 기간으로 설정하고 그 여행을 설명한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이 땅에 있기 전 그리고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라’고 지적함으로써 하란에서 상당 기간을 보냈던 것 같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리에서 나타나시고 하란에서 다시 한번 더 나타나셔서 또 다시 권고하실 수 밖에 없었다. 아브라함은 불신으로부터 출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자신이 자신을 설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는 작업이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설득당한 자들이다. 설득 당하는 것 중 맨 나중에 설득 당하는 것이 이해이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드느냐 하는 싸움이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우리가 추적해야 될 가장 중요한 메세지이다. 그렇게 우리도 이 자리까지 왔다. 하나님 손에 있는 인생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 신앙에서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하면서 근본부터 정리하고 확인하는 기회가 되길 빈다.

  제 2 강 아브라함2,애굽에 가다(창 13:1-4)

하나님의 강권하심 속에 가나안에 마침내 들어온 아브라함은 잠시 지내다가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간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것은 신앙의 타락인가 하나님의 섭리인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믿음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이 출발지점에 있어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여러 정황들을 가지고 설명을 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없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애굽에 내려갔던 이 사건을, 만일 우리가 전제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이미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은 타락이 된다. 그러면 결론은 분명해 진다. “보라, 그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애굽에 내려가자 그가 거기서 어떤 수치를 당했는가!” 말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애굽으로 내려가 아내를 빼앗길 뻔했던 사건은 해석에 어려움이 뒤따른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을 떠밀어서 가나안까지 들여 보내놓고 그 시점에서 기근을 보내어 그를 애굽으로 몰아내시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추적해 보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애굽으로 내어 쫓으실까 하는 문제,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해 놓고 당한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첫째는 애굽에 내려간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의 꾸짖음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의 꾸짖음이 없다. 꾸중은 창세기 17장에서 처음 나온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창 17:1-2)” 하나님이 이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땅에 엎드린다.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어떤 의미로는 최초이자 마지막 듣는 꾸중이다. 왜 이것이 꾸중이 되는가 16:15 이하를 보자. 그가 86세 때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가 자기 뜻대로 시작해 놓은 역사를 하나님은 17장에서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라는 나이로부터 새롭게 출발시키신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시점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하는 것은 이것이다.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 15:1-4)”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참고 기다리지 못했다.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고 후사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거기에 대한 꾸중을 17장에서 이렇게 상징적으로 하신다. 그가 이스마엘을 얻은 나아가 팔십 육세인데 이걸 꾸짖으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 구세에 나타나신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유일하게 하나님만 믿고 떠나왔다. 그런데 그의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13년을 침묵해 버리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꾸중이라는 것을 17장에서 여러가지로 나타난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왜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느냐”는 뜻이다. 그리고 드디어 명령하신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러나 이 앞에 오늘 우리가 읽은 12장 마지막에 있는 애굽에 내려간 사건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꾸짖음이 없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적 작품이다. 애굽을 다녀온 것으로 아브라함이 어떻게 변했는가 아브라함은 그 이후에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결단을 내린다. 하나는 롯과 헤어지는 것이고 둘째는 가나안 전쟁 속에 그가 감히 끼어드는 담대함이다.

롯과 헤어졌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 그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때는 혼자 나오지 못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나오면서 조카까지 끌고 나와야 했던 상황 배경을 설명했다. 자기 목숨을 자기 힘으로 밖에 지킬 수 없는 때였기 때문이다. 애굽에 내려가면서 사라를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 말할만큼 살벌한 시대이다. 재물이 많고 쓸만한 물건이 많으면 언제, 누구에게 죽을지 모르는 때였다. 자기네와 혈연관계가 없고 안면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 나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되는 시대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졌다. 그뿐이 아니다.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왕과 싸우니라(창 14:1-2)” 한쪽은 네 왕이 연합했고, 한쪽은 다섯이 연합하여 싸운다.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자기 목숨 하나도 버티고 있기가 바쁜 상황이다. 이 와중에 자기 조카 롯이 잡혀 가자 집에서 길러온 하인 318명을 데리고 가서 싸워 조카를 구출해 온다.그는 이제 과거의 그가 아닌 것이다. 이 배짱은 애굽에서 생긴 것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서 떠밀려 왔다. 이제는 그분 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기근이 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이 기근 속에서라도 나를 먹이실 수 있는 분이라는 그 수준까지 와 있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아주 자연스럽게 물이 있고, 자기 양떼를 먹일 수 있는 곳,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갔다. 가면서 생각하니까 아내가 걱정이었다. 너무 예쁘니까 아내를 빼앗고 자기를 죽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당신이 나의 누이동생이라고 하자’짜고 내려간다. 가서 아내를 빼앗겼는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육축을 얻어 부자가 되어 되돌아 왔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회개한 장면이 없다. 왜 이는 아브라함의 잘못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로가 회개하였다. 바로는 그 시대 전 세계문명의 최고 통치자였다. 그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하나를 빼앗은 것 때문에 밤새도록 혼이 나고 회개하였다. 바로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다 데리고 가라” 하면서 금은보화까지 얹어 주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이것은 우리를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의 열심이다. 믿음은 인격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설득이다.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이 심으시고, 키우시고, 열매 맺으셔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훈련을 받는다. 바로가 얻어 터짐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에 드디어 눈을 뜨게 된다. 그래서 롯과 헤어지는 결정을 내린다. 싸움터에도 나가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하란생활과 애굽생활을 허락하신다. 가야 되지 않을 곳을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틀림없이 간섭하고 계신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러나 그 수준에 이르지 않은 사람에게 심지도 않고 거두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희망에 많은 전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라. 이것이 겸손이다. 우리에게는 성장을 위해 차근차근 한계단씩 올라가는 지속성이 없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훈련을 시키고자 하는지, 어느 누구를 취하시려는지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경청하는 것이 없다. 의욕만 충만하다. 그러나 의욕만으로는 일이 되지 않는다. 균형이 무너진다. 의욕이 없으면 죽은 자이다. 그러나 그 의욕은 잘 다스려야 한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이삭을 요구받지 않았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생애 맨 마지막에 요구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다. 그래서 힘을 내야 한다. 우리가 혹시 애굽에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직접 경험시켜 주시기 보다는 옆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실지도 모른다. 말씀에 의지하여 참으로 힘차게 사는 바로 우리 옆의 믿음의 영혼으로 말미암아 도전을 주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을 믿지않고 도망갔다가 뼈가 부러져 온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다.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쉽게 넘겨버려서는 안된다. 그가 바로왕이다. 우리는 그 옆에 서 있는 아브라함이다. 무릇 자녀를 포기하는 부모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가 살아계셔서 우리를 설득하고 계시며 완성하고 계신다. 이것 외에 아무 말도 필요치 않은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제 3 강 아브라함3, 믿음(창 15:5-7)

오늘 본문 말씀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를 의로 여기시고’하는 말씀이 나온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문제에 있어 정답 이상이요, 아는 것 이상이요, 알아도 아는 것에다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매달리고 전적으로 거기에 나를 맡기고 싶은 지경에까지 들어간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 그런 의미로 그의 출발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이라고 기록한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이 믿음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갖고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 이 시점에 이르러 왜 하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근거로해서 의(義)라는 것을 그에게 주었을까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은 여기에서 처음 나온다. 그래서 ‘이 믿음 자체가 아브라함 쪽에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냐’하는 것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이 내려진다. 우리는 지난 두 시간에 걸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신앙의 출발을 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아는 차원에서 신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오히려 그는 떠밀려 가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달아 간다는 설명을 드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애굽에 내려간 사건이다. 그것을 근거로 해서 그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조카 롯과 헤어지고, 14장에서는 연합군 전쟁에 나가 싸워 조카를 구원하는 일까지 벌인다고 말씀을 드렸다. 15장에서는 자신의 상속자가 다메섹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의 신앙은 무지에서 점점 자라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에셀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래와 같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다. 이 말을 아브라함이 믿은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그 믿음이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이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냐를 물어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집에서 불러내셨고 이방신을 섬기던 곳에서 이상 중에 부르셨다. 사건 속에서 역사하시고 그의 생애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며 설득하신 결과로 오늘의 아브라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15장에서 얻어야할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 삯은 은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댓가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었다’라는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것은 삯이 아니라는 설명부터 한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에 대한 또 다른 말씀을 보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방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럼으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삯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랑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이 믿음을 말할 때 그것이 자랑으로 가지 않고 삯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강조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려고 하는 대상에게서 조건을 찾지않고 결과를 주셨기에 은혜요, 선물이라는 말의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그에게 있을 수 있는가 없다. 창세기 11장에서 15장까지가 그것을 증명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설득해서 하나님을 믿게하는 행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모든 결과를 원인으로부터 추적해서 확인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무슨 결과를 확인할 때는 현실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확인함으로 결과를 확인한다. ‘믿었다’는 것으로 자기의 결과를 자기에게 납득시키고 싶어한다.

죄인이란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구원의 필요성을 모른 장님, 잠자는 자, 사망한 시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회개는 구원을 받아서 그의 영혼이 중생하여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구원은 우리의 믿음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폭적인 독자적 은혜의 행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다. 성경이 죄와 구원을 얻은 자를 갈라놓는 기준은 단 하나이다. 이쪽은 사망의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오히려 증오심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쪽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인식도 있고 그분과 모든 것을 연결하여 생각한다.

오늘 아브라함이 15장에 이르러서 그가 하나님 앞에 ‘의로 인정함을 받았다’하는 문제를 그 자리에서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구원을 얻었다기보다는 거기서 이제 드디어 그만큼 인식되어 그가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만큼 알게 된 것이다. 그의 구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인식하기 훨씬 이전 하나님의 은혜로 그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제 4 강 아브라함4, 할례(창 17:1-8)

신약과는 달리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이 어떤 상징이다. 야곱에게는 사닥다리로 위에 계신 분으로, 모세에게는 떨기나무에 붙은 불로, 또 엘리야에게는 세미한 음성으로, 욥에게는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다. 나타나시는 모습 하나 하나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상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본문은 좀 다르다. 하나님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굳이 밝히시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난 아브라함은 땅에 엎드렸다.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요 네 방패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되리라”하셨다. 그런데 16장 15절을 보면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라함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17장은 ‘아브라함의 구십 구세 때에’라고 시작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이 좋지 않게 여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에는 하나님의 책망이 없다. 그러나 15장을 통과하고 난 이후에는 그의 잘못을 꾸짖으신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 말씀 하나만으로도 아브라함은 할말이 없다. “지금까지 경험을 통하여 깨닫게 한 나의 능력을 알고도 기다리지 못했느냐” 그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땅에 엎드린다. 16장에서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17장에서 99세에 다시 나타나시기까지 하나님은 13년간 침묵하셨다. 대단한 책망이 아닐 수 없다. 그 뒤에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않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17:5)” 하나님은 이름을 바꿔 주셨다. 이 이름을 달고 다니면서 아브라함은 이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옛 상처가 쑤셔 올 것이다. 자신은 결코 이 이름으로 불릴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한 사실로도 그렇고 또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이 없는데 열국의 아비이다. 후에 하나님은 아들 하나 밖에 주시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열국의 아비’이다. 얼마나 이 이름이 갖는 상징이 놀라운가 우리는 죽어 마땅한 자들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야할 십자가가 아니고 우리가 달려야할 십자가 앞에 부름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에 내가 달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달리시고 우리는 내 잘못을 인하여 잘못을 지적받는 자리에 은혜가 있다. 아브라함이라고 지적을 받는 이 꾸짖음과 가장 상처 많은 사건 속에서도 떨어진 축복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가장 좌절된 실패와 수치로 범벅이 된 상황야말로 축복의 創始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잘못한, 도저히 그분을 뵐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자리에서 그의 꾸짖음이 우리에게 축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 믿는 자에게 은혜로운 것은 더 없다.

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명령하신다.

할례받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15장을 살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가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8절을 보면 이렇게 아브라함이 대답한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그때에 하나님은 “너는 이러한 제물들을 갔다 놓고 반을 쪼개 놓아라”하셨다. 그래서 새만 제외한 나머지 제물들을 쪼개어 마주 대해 놓고 그는 기다렸다. 해질 때에 연기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다. 두 제물을 가져다 놓고 반을 쪼개서 마주 보게 해놓고 계약 당사자들이 그 사이로 지나간다. 지나간다는 것은 쪼개진 틈이 한오라기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완전히 쪼개진 것이다. 두 계약 당사자가 다 지나가게 되어어 있다. 이 예식은 약속은 어긴은 자는 ‘이와 같이 되리라’는 것이다. 한군 데도 붙어 있지 않고 완벽하게 쪼개져 마땅하다는 저주의 약속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같이 지나가자’가 아니라 ‘하나님만 지나가신다’ 아브라함을 아브라함되게 하고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는 일은 아브라함의 어떤 조건이나 원인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완성하실 하나님만의 일이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표로써 그가 홀로 지나가신다. 이 예식을 보아놓고도 16장에서 아브라함이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그를 꾸짖는다. 이제는 언약이 깨졌다 말씀하지 않으셨다. “약속한 것을 내가 이루고야 말겠다. 너는 그것을 인식해야할 내 자녀이다. 그런데 너는 나를 믿지 않고 다른 길로 갔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네게 새롭게 명하노니 너는 네 집안 식구 모두와 함께 할례를 받으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잔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0-14) 왜 할례를 받도록 하셨는가 “너희가 그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23-25)” 여기에서 할례는 거룩함으로 연결되고 있다. 골로새서 2장에서는 십자가 사건을 할례받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너희가 무할례로 죽은 자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할례를 원문에서 찾아 보면 그 의미가 “잘라 버린다”이다. 그것은 지체의 일부를 끊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 53:7-8)”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할례는 생식기를 잘라낸다는 뜻이다. 더 이상 육체적인 종족보존 능력을 갖지 못한 자라는 뜻이다. 할례는 우리가 육체적 종족이 아니라 다른 힘으로 태어난 별개의 인종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의 몸에서 날 자’에 대한 인간적인 회의를 극복시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깊이 확인시키려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제 5 강 아브라함5, 이삭(창 22:15-18)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과연 이런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아브라함에게 이런 시험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우리는 우선 이 사건이 끝난 다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도대체 어떤 축복을 하셨는가 하는데 촛점을 맞춰야 한다. 이 축복과 창세기 12장 1절 이하에 있었던 축복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이 마지막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멧세지가 된다. 다음의 두가지 말씀을 비교해 보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1-3)”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5-18)” 둘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12장에서는 씨(種子)에 관한 이야기가 없고 22장에는 씨에 관한 말씀이 있다. 그런데 씨에 관한 이야기, 즉 자손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없는 것은 중대한 차이이다. 왜냐하면 22장의 ‘이삭 사건’은 이것 하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8)” 우리는 아브라함의 사건에서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과 모든 신자들이 생겨날 것을 지시하고 있는 복음의 한 상징이라는 것을 안다. 12장에는 이 말씀이 없고 단지 대상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하여 22장에 이르러 아브라함에게 납득시키고 있는 것이 “네 씨로 말미암아 내가 네게 축복한 것이 사실이 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장면까지 온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네 씨로 말미암아’이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이 주시는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창대할 것이라면서 ‘자손들’이라 하지 않으시고 ‘자손’이라는 단수를 쓰신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을 얻을 신령한 후손들이 네 자손 곧 이삭으로 상징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렇게 생겨나리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사건으로 납득을 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잔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9-14)” 할례는 저주요 동시에 거룩케 하라는 표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디에다 행하시는가 이것은 상징이다. 더 이상 생식의 능력을 끊어버리는 행위이다. 할례를 행함으로 아브라함에게 준 메세지는 이것이다. “네 자손은 육으로 말미암지 않은 자손이다” 더 이상 우리가 육신으로 난 자들로서 우리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육으로 우리의 권속을 삼지 않고 육으로 우리의 혈육을 삼지 않는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이제 우리의 권속이 된다. 하나님의 권속이요 자녀이다. 아브라함은 역사상 최초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할례를 받은 그 상징이 명한대로 따지자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이다. 그런데 그가 이삭을 낳았다. 그러면 이삭은 육적 차원으로써 그의 후손이 아니다. 이것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네 독자를 내게 바쳐라”고 하는 근거이다. 이삭은 더 이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 자이다. 이삭도 할례를 받았다. 이삭도 후손을 낳을 수 없는 자이다. 이삭이 없는 자라는 뜻은 아브라함도 스스로 있지 않은 자라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다 죽은 존재들이다. 죄인들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더이상 육적 후손이나 육적 존재가 아니며 거듭난 자라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아브라함도 거듭났다는 것을 알고 이삭도 거듭난 영적 차원에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육적 차원에서는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로 이삭을 잡으라고 한다면 이삭도 마땅히 죽어야 한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롬 4:17-19)” 지금 아브라함은 죽은 자이다. 육체적으로 따진다면 아브라함도 죽은 자요, 이삭도 죽은 자이다. 그들은 할례를 행함으로서 자기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라는 것을 또한 안다. 그래서 이삭을 바치라는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그도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점에 대한 아브라함의 동의이다. 물론 하나님이 막으심으로 이삭은 죽지 않는다.

우리가 어떻게 거듭나는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대속물을 하나님께서 취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갸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라(창 15:12-1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발 붙일만큼도 주지 않으셨다. 가나안 땅에 살동안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의 소유의 땅은 오직 하나, 무덤 뿐이었다. 막벨라 굴에 사라가 장사되었고 그도 함께 장사되었다. 그런데 그의 자손에게 준다고 하셨다. 이것이 구약의 화면의 아름다운 일관성이다. 왜 사대 후손이 되어야만 가나안 땅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되는가 하면 출애굽 사건이 구원을 상징한다.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 지난 뒤에야 가나안이 유업이 되어야 한다. 구원없이, 십자가없이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는 없다. 이 시점에서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하고 구원 얻은 자의 기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불렀지만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이 땅은 그의 기업이 되지 않는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4-6)”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는 부름의 목적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는, 신약식으로 말하면 구원의 완성이다.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천국의 시민삼으시는 계획을 가지고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적 차원에서의 자손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방법으로써,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깨끗함을 받는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구원의 비밀과 능력과 해결방법이 있다는 것을 안다. 자기가 아끼는 독자이건, 백세에 낳은 자식이건 간에 관계없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군말없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하여 달려가게 했던 가장 깊은 이유이다.

우리는 이제 ‘혈육을 따라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함으로 말미암아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다. 더 이상 우리의 후손도 우리의 선조도 혈육으로 따지는 자들이 아니요 영으로 따지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동일한 아버지가 계시니 하나님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이 큰 축복과 이 큰 감격의 서막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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