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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사 41: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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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야곱이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자를 가르킵니다. 본문에 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하였고, 사43:1 에도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하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위해서 택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에 서가 장자이지만 야곱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 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 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3:6)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야곱이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축복하시기 위해 택하신 자를 가르킵니다.

 그런데 본문에 왜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칭하면서 지렁이 같은 야곱이 라고 하셨을까 이하에서 이런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지렁이 같은 야곱은 온유한 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지렁이는 빈모류에 속하는 연형동물로서 흙을 먹고 살아갑니다. 우리 가 화 한번 안내고 남과 충돌 한번 못 하는 사람을 가르켜서 [뼈없이 좋은 사람]이라 하는데 지렁이는 뼈가 없는 무골충입니다.

 지렁이는 비 오는 날 밖에 나옵니다만 가만히 있으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조차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발로 살짝 밟아보면 꿈틀합 니다. 그래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도 생각해 냈을 것입 니다.

 지렁이는 껍질을 벗겨 놓은 것처럼 피부가 얇습니다. 우리는 뻔뻔스 럽고 염치 좋은 사람을 [낯이 두껍다] 또는 [철면피 하다]고 말합니 다. 그러므로 지렁이는 낯 판대기만 아니라 전신이 얇으니까 남에게 실례 될만한 일은 전연 못할 것 같습니다. 하기야 흙속에서 흙을 먹고 나니 그럴만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렁이는 인간에게도 여러 모로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흙속에서 흙을 먹고 살기 때문에 지렁이 가 많이 사는 밭은 밭을 갈아주는 효과가 있어 농작물이 잘 된다고 합 니다. 또 지렁이는 약에도 쓰이고 낚시꾼들의 낚시 밥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지렁이는 얼핏 보면 앞뒤도 없고 내장도 없는 것 같지만, 지렁이도 분명히 머리가 있고 꼬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렁이도 내부에 염통, 창자, 모래주머니 등 있어야 할 내장은 다 있습니다.

 지렁이는 자기들 끼리나 다른 어떤 동물들과도 싸우는 일이 없습니 다. 자기보다 약한 어떤 벌레를 잡아 먹는 일도 없습니다. 지렁이 같 이 온유한 동물을 달리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11:29에["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편 22:6에 주님의 수난에 대한 예언시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 니라] 하였습니다. 주님은 마5:5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 말씀하셨습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적은 미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존경쟁이 치열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온유한 지렁이가 생존경쟁에 나선다면 백 이면 백 모두 다 잡혀 먹히기만 하지 무엇 하나 잡아 먹지를 못할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온유한 연형동물에게 하나님은 흙을 기업으 로 주신 것입니다.

 누구나 싸우거나 다툴 필요없이 흙속에서 편안히 살면서 무궁무진한 흙을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벧전 3:3-4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 의 썩지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하였습니 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사울왕이 교만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 리고 이새의 아들중에서 왕을 세우겠다고 사무엘 선지자들에게 말씀하 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병을 들고 이새의 집에 갔습 니다. 그리고 이새의 장자로부터 사무엘 앞을 지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고 한 것입니 다. 이새의 아들들은 모두가 용모가 준수하고 훌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말씀이 들리기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 심을 보느니라] 하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새에게 다른 아들이 또 없느냐고 물어보게 되었으 며,들에서 양을 치던 다윗이 부름을 받고 집에 돌아와 사무엘 선지자 앞에 이르자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지시하시는 것이었습니 다. 다윗은 아직 다 자라지도 않고 얼굴이 붉은 소년이었습니다. 그런 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이 좋고 순종을 잘하는 겸손한 다 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며(약 4:6)때가 되면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벧전 5:6). 예수님은 마 11:29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롬 12:16에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체 말라] 하였고 빌2:3에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 각 자기보다 남을 나세 여기라] 하였습니다.

 조선일보에 예수 칼럼에 밀알처럼 살자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습니다.

[밀알은 꽃과 잎사귀처럼 美와 향기가 없다.땅속에 묻혀 썩어야 할 존재이다. 다르게 살 길이 없는 존재이다. 오직 한길 밖에 살길이 없 다.죽어서 사는 길이다. 없어지는 길이 아니다. 보다 높은 영원한 삶 을 위하여 보다 낮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크리스챤은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들이다. 좀 밑지고 살자. 결혼도 좀 밑지고 하자. 영광은 남 에게 주고 욕은 내가 먹어두자. 나는 주를 위하여 시집도 장가도 안 간 자들을 존경한다. 강원도 산골에서 보리밥 먹고 사는 Torrey 목사 처럼 청춘도 재간도 조국도 명예도 흙속에 묻고 살고 싶다. 스타가 되 지 말고 무명한 전도인이 되자] 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 셔서 모진 고난과 수모를 당하신 후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무 덤속에 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시고 높 이시어 하늘 보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네가 누구냐] 고 물을 때에 [나는 광야의 외치는 자 의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자기의 예수님의 신들매 를 풀기도 감당체 못한다고 하였으며,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자기 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겸손한 말을 하였습니다.

 약육강식이 생존경쟁의 자연현상이지만 하나님의 법칙은 그러지를 않 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어 땅을 차지하는 것입 니다 (마5:5).

 옛날에 지구상에 존재하였다는 크고 사나운 공룡은 지구상에서 사라 진지 오래이며 호랑이,사자,늑대같이 강하고 사나운 동물들은 점점 사 라져가고 있어 동물원에서나 자연 농원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토끼,닭,양,소 등 온유한 동물들은 인간의 보호를 힘입 어 더욱 번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남을 짓밟고, 사기치고, 도적질하 고, 폭력을 일삼는 악하고 사나운 사람들이 결코 잘 되는 법이 없으 며, 남을 속일줄도 모르고 해 할줄도 모르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온유 한 사람들이 잘 되고 자손만대에 복 받아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을 복 주시며 온유한 사람을 들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무력에 의해 자기 만족을 구해볼려다 실패하고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 사십년간 시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사십년간의 연단을 통해서 온유, 겸손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들어 가 지 민족을 구원하는 역사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무술을 익혔던 모세, 단숨에 애굽의 장정 하나를 쳐 죽여 모래속에 묻어버릴만큼 사자같이 사납고 무서운 모세가 40년간의 시련을 통해서 양과 같이 온유해 졌을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에 능 력의 지팡이를 들려주시고 수십만명의 병력으로도 이룰 수 없을 출애 굽의 대 사명을 완수하게 하신 것입니다.

 민12:3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히 다라]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과 모세처럼 온유하게 되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은총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귀히 쓰는 종들 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지렁이 같은 너 야곱은 겸손한 자를 의미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렁이는 흙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를 노출시키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무엇을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속담에 [잘났거 나 못났거나 다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처럼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듯 싶습니다. 그러므로 잘난 것이나 못난 것이 나 제 자랑은 다 있는 법입니다.

 지렁이가 땅속에서 햇빛도 받지 못하면서 흙만 먹고 살아간다는 것은 생의 기적이요 자랑스런 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자 기나 자기의 생활방식을 보이거나 자랑하려고도 않습니다.

 비단 그것뿐 아닙니다.모든 벌레도, 물고기도, 새도, 풀도, 나무도 다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색과 무늬를 가지고 있는데 지렁이는 그러지 를 못한 것 같습니다. 피부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합 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를 꾸밀줄 모르고 자랑할 줄 모른다는 말이 되 겠습니다.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생물은 모두 자기를 아름답게 보이려고 자기르 리 꾸미고 치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렁이는 자기를 잘 보이게 하려는 데도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벌거숭이의 모양 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길을 치장하는 것 보다 우리의 속이 아 름답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야말로 위의 조선일보 예수 칼럼의 글과 같이 죽어서 살았 고, 밑지고 살았으며, 영광은 주님께 돌리고 욕은 자기가 먹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청춘도 지식도 건강도 조국도 명예도 흙속에 묻고 살았습 니다. 인기 절정의 스타의 길을 마다하고 무명의 전도인으로 그 사명 을 다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례요한처럼, 그리고 토 레이 목사님처럼 겸손하게 낮아져서 주님을 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 로 축원합니다.

 셋째, 지렁이 같은 야곱은 과묵한 자를 의미합니다.

 지렁이는 흙속에서 살고 밖에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보기도 드물지 만 비오는 날이나 비가 갠 후에 땅위를 기어다디는 것을 볼 수가 있지 만 울거나 노래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며 심지어 발로 밟아도 아프 다는 소리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이 너무 많으며 말이 많다보니 실수도 많은 것입니다.그 러므로 야고보 선생은 약 3:2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잠21:23에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하였으며 약3:10 에 [ 한 입으로 칭찬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였습니다.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 는 격언도 있지만 말이 적고 괌구할 수록 사람은 더 무게가 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혼 여성들 에게 어떤 형의 남성을 결혼상대로 바라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이 키가 크고 과묵한 남성을 원한다고 답변하염아다고 합니다. 분명히 수다한 사람보다 과묵한 사람이 더 무게가 있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 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수다를 떨므로 그 사람의 무식이 더 폭로되는 일도 있습니다. 차라리 침묵을 지켰으면 중간이라도 들 것인 데 아는 척 하고 떠들었으므로 자기의 무식만 들어낸 것입니다. 지렁 이는 건드려도 발로 밟아도 아무런 소리를 안냅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사랑하는 독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을 받았을 때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명령 을 순종하므로써 그 시험에 승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그 신앙을 인정 받았고 약속하신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그 고난을 감내하였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사53:7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 다. [그가 고난을 당하며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자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 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에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침묵으로 지켜보시고 계셨습니다. 침묵은 인내 의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 이 침묵은 인내 의 침묵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아픔을 스스로 극복하는 길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심한 아픔을 당할때에 [아이가 나 아파서 죽겠어,나 좀 살려 주어요]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이 심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묵묵히 참아 넘기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시험이나 환난이나 박해를 당할 때에 묵 묵히 참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승리의 길입니다. 그 러므로 약1:12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 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 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행20:21에 [모든 겸 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기었 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바울과 욥처럼 환난과 시험을 당할 때에 묵묵히 참고 승리하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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