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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열심 (요 13: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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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제일 유명한 이름이 유다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원 래 국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남북 왕조로 갈릴 때 북 왕조는 이스라엘, 남 왕조는 유다로 각각 분리되었습니다. 이것이 포로 생활을 거치면서, 포로에서 돌아 왔을 때 그 정통성을 이어야 하기 때문에 유다라는 이름이 더 흔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태인이라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이름이 좋다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그래 보았자 신앙에 별 도움 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다 지파에서 나셨습니다. 이렇게 유다라는 이름이 나쁘게 쓰여진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은 베드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베드로라는 사람이 등장하기 위하여 몇 가지 배경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한 쪽에 는 유다가 있고, 한 쪽에는 요한이 있습니다. 유다에게서는, 예수님과 함께 3년간 을 함께 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은 모습을 봅니다. 즉 사람이 혼자의 힘으로 애써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 식이며 죄 짓는 것을 빼고는 할 것을 모르는 존재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 니다.

또 요한은 본문 23절 처럼 "예수의 제장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즉 요한입니 다. 사랑을 받기 때문에 예수의 품 안에 있는 요한이 유다보다 낫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요한에 대해 '우뢰의 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뇌성 벽력의 아들 이란 뜻으로서 성미가 급한 사람임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성미가 급 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젠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여행을 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어 가게 되었는데 그 마을에서 받아들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님,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이 마을을 불살라 라고 할까요' 하면서 나 섰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요한은 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두 사람 사이에 성경은 베드로를 위치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자기의 열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육적 그리스도인을 가장 잘 나타내는 베드로는 언제나 열심을 내고, 언제나 혼이 납니다. 베드로가 칭찬받은 것은 한 번 밖에 없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였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 때도 그 말을 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더라면 중간은 갈텐데, 더 큰 열심으로 말을 하며 주님 일에 참견하다가 터지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원래 베드 로는 인간적으로 따지자면 굉장히 좋은 사람입니다. 의리가 있고, 따뜻하고, 용감 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주 인간적으로 따질 때에는 제자 중에서 제일 낫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런 베드로를 자주 등장시키는 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과 우리 가 생각하는 신앙 사이에 어떤 면에서 가장 틀리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데 가장 대 표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설명은 우리나라 신자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 기일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대부분 베드로입니다. 감정적이고, 잘 격하 고 순진하고 열광적입니다. 그런데 거의가 소용없는 짓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베드로와 꼭 같은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 께서 가라사대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는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 라" 그러자 베드로는 이에 다시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시게 됩니다. 지금 이 대화가 끝나고 예수님은 게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관원들 을 데리고 와서 그리스도를 팝니다. 그래서 잡혀 가는데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 고 베드로는 멀찍이 좇아갔다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그때 닭이 울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 여러분 새벽에 닭이 몇시에 우는지 아십니까 일찍 깨는 닭은 새벽 4시에 울고, 늦게 깨는 닭은 새벽 5시에 웁니다. 그러니까 유 대인 시간으로는 제 9시 쯤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두고 볼때 베드로가 주님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따르겠다고 약속한 지 그저 8시간을 채 못넘긴 시간이었던 것입 니다.

성경이 왜 닭 울기 전에 3번 부인하는 것을 이렇게 꼭 보여 주어야만 되었느냐 하면, 이와같은 베드로를 등장시켜서 우리에게 지적해 주고 싶은 내용이 있었기 때 문입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열심을 바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열심 빼놓고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합니까 그러면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신앙이 될것 아닙니까'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참으로 어려운 부분인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렇게 나서는 것을 자만했다 혹은 교만했다고 그럽니다. 성경이 자만했 다든가 교만했다는 말을 쓰는 것은 육체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지혜, 세 상적인 가치를 묶어서 하나님을 지칭하려고 하는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란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붙이거나 하나님 의 어떤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작업으로 요구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 서 우리를 고치시려고 하는 것으로 고쳐 나가는 작업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내가 좋아하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품, 원리, 방법, 목표를 붙잡는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내게 훨신 익숙되고 좋아 보이는 것들을 버 리고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성품의 것들을 잡으려는 싸움이기에 내 게 갈등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가 가진 제일 좋 은 것을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는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이 '교만하다, 자만하다'고 하는 얘기는 결코 자신감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자신감이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 식으로 말하자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 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은 얼마나 큰 자신감입니까! 그 자신감은 백점입니다. 그 러나 지금 베드로가 말한 '주여, 제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주를 따라 가겠 나이다!'하는 이 자신감은 빵점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그 자신감의 근거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처럼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는 말씀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 해 지금 베드로 네가 나를 좇아 오겠다 하는 것은 모든 힘과 원리와 그 근거가 너 자신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에 나를 다라 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 네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충만케 되는 날이면 그 힘과 원리와 근거로서는 비로소 나 를 따르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그 인간적인 열심을 외적인 것으로는 그 것이 참인지 가짜인지가 잘 구분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바로 앞 에 있었던 가룟 유다의 경우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에게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할 때 제자들은 누가 그런 일을 할 것 인가를 그때까지만 해도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기에 서로의 얼굴만 쳐다 보았 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보아서는 이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안 난 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열심이라 할지라도 그 열심이 어떤 원리와 방법론에 입각한 것이냐 하는 것을 본인 알고 있지 않으면 스스로 속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7:21-2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 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 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신앙을 하나의 개념으로 생각하거나, 하나의 정성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는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종교심 그 자체가 가장 큰 적입니다. 기독교란 무조건 종교심을 갖고 정성만 쏟으면 무언가 되어지는 것 이 아닙니다. 기독교란 대상이 있는 종교입니다. 내가 경배할 대상, 내가 항복할 대상, 내가 말을 나눌 대상으로서 인격적 존재자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런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허공을 치는 자가 아닙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고, 어디로 가려고 할 때에 내게 그것을 먼저 지시하시고 명령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것을 놓쳐버리고 그냥 착하게만 사는 것, 거룩하게만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의 전부 라는 개념을 점점 굳혀 간다면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는 점점 잊어버리고 착하게 살 고 거룩하게 사는 것 그 자체에만 얽매여 열성을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 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서 출발된 자기의 열심과 공로만이 번득일 뿐인 것입니다. 분명히 나는 주의 이름으로 열심을 내어서 주의 일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 또한 눈에 나타나는 확실한 업적과 능력들 을 보고서 만족해 왔었는데 주님의 판결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내게서 따나가라!는 청천 벽력같은 심판인 것입니다. 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요 그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열심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인 열심으로 일했기 때문 입니다. 육적 열심으로 주의 일을 한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 니다. 베드로가 육적 열심으로 무언가를 할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요 책망을 면 치 못했던 것처럼 육적 열심은 조금은 대단한 것 같이 보이나 결국은 아무것도 아 니요, 책망을 면치 못하는 열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고후12:7-9절을 보십시다.

"여러 계시를 받는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 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 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을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 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키우거나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구별되이 묶어서 바치는 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성한 것이나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자꾸 지 적하는 말씀입니다. 나의 약한 것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 다. 즉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자기 파산 선고를 한 자리 위에다 그리스도께서 일을 행하시므로 내가 이루어 나가는 일이 나의 능력이나 원리나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꾸 증명해 내시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전 생애를 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귀의시키고 주의 말씀을 전 파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사도 바울이 주의 일을 하면서 확실히 배운 것은 자기가 가진 것을 주님께 바치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악착같이 스데반을 죽이게 한 다음에 하나님의 종으로 쓰셨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그 말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괴인 중에 괴수였노라'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부적합한 사람입니까 말하자면 사도 바울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가장 부적합한 자입니다. 그 러나 성경적으로는 사도 바울이 가장 적합한 자가 사도 바울이라는 얘기입니다. 인 간적으로 생각하자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에는 부적합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나 치명적인 실수를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때려 죽인 사람입 니다. 그 꼴에 무슨 자격으로 복음을 전합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적합하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렇게 부적합한 자가 복음을 위하여 많은 열매를 맺혔다면 그것은 그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실력이 아니었다는 것이 쉽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본문의 베드로는 자꾸만 주 앞에서 쓸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부분을 기리켜 자만했다, 교만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51:14-17절으 보시셌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 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 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제사와 상한 심령을 번제와 통회하는 마음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제사라는 것은 그것 자체가, 우리가 우리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뭔가 제 3의 것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나로부터 해결할 방법과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제사를 드린다는 것 때문에 '내가 양을 잡아서 드렸다'라고 생각을 해서 자꾸 '나는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해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무엇으로 다시 소개되느냐 하면 상 한 심령으로 소개됩니다. '상한 심령'이란 이런 것입니다. 선에 대한 요구는 있는 데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도와 주고 싶은데 도울 수가 없습니 다. 그럴 때 사람은 가장 마음이 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상한 심령입 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싶고 남에게 유익 을 끼치고 싶은데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럴 심성이 없으며, 그럴 심보가 아닌 것을 발견한 마음입니다. 상한 심령입니다. 그리고는 하는 짓이라고는 늘 해서는 안되는 짓만을 합니다.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잘못했다고 회개하며 항복했 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거기로부터만 신앙이 출발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다시 확인해 보시겠습니다. 그러면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출14장은 홍해를 건너는 사건입니다. 출15장은 홍해 를 기적으로 건넌 사건에 감격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모세와 함께 기뻐 찬송하 는 대목입니다. 출16장은 홍해를 건넌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난 원망 사건 입니다. 출16:1-3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이월 십 오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 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 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렇게 홍해 기적 앞에서 기뻐 춤추며 감동하던 그들이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원망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13절 이하에 보면 만나를 허락하게 되는 것입니 다. 출16:13-15절을 보시겠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 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 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그래서 만나라는 이름의 뜻이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입니다. 만나가 허락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상징입니다. 지금 여기는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이 아닌 곳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 만나는 끝이 납니다. 만나 를 출16:31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니 깟씨 같고도 희 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나를 왜 꿀 섞은 과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꺼내시면서부터 의도했던 장소가 가나안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을 늘 '젖 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완성의 자리, 풍성한 자리, 충만 한 자리로 가는 노상이기 때문에 거기를 바라보게 하며 약속된 목적지를 자극하고 도전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매일의 양식입니다. 이것은 꿀섞은 과자 같은 것입니다. 과자에 꿀을 섞으면 얼마나 섞습니까 아주 적은 량을 보통 씁니다. 많이 섞으면 과자가 안됩니다. 말하자면 만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만 족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 싸움거리였습니다. 즉 베드로 식 의 육적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의 오해가 '이제 주를 위하여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칠 테니 주께서는 꿀이 꽉 찬 만나를 주십시오!'하는 것입니다. 이런 발상 을 갖고 있게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나란 그것 자체가 상급이라기 보다는 이 신자들을 몰고가기 위한 약속의 맛보기요, 방향 제시용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도전해야 할 상급인 줄로 착각하여 꿀로 꽉 찬 만나를 위하여 애굽에서 가 지고 나왔던 온갖 보석을 바치는 행위를 하기 시작하면 완전히 혼동 속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식의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제 항복할 주님 을 알게 되었사오니 내가 가진 모든 선한 것, 괜챦은 것, 나의 의지를 다 동원해서 '주여 이제 내 목이 달아 나더라도 주를 따르겠나이다.'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 동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근거가 내 것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열심이나 나의 것을 바쳐서 좀 더 나은 축복을 얻어보겠다는 것은 인간 적인 열심이요, 결국 탐욕에서 시작된 도전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원망 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민수기11:4-6절을 보십시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 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 과 외와 수박과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여러분, 이 불평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사람들의 기대는 애굽 에서 나오면 그때 먹었던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을 회고해 보면 언제나 이런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이 40년 동안 너희가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고 발이 부릍지 아니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이 이 땅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족하게 살아 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소극적인 축복들입니다. 적극적인 엄청난 축 복들이 가나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 도중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지나가는 동안은 나그네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상급이나 여기에 우리의 쉴 처소가 있지는 않습니다. 여기가 상급이며 쉴 처소라는 착각을 하지 못 하도록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것 그 이상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 필 요 이상의 양식이 있고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다른 뜻이 계신 것 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가진 자는 많은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 므로 우리에게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그 자체가 사실은 은혜요, 축복입니 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말씀인 만나를 통하여 영원한 본향을 찾으며,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사람으로 나를 채찍질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행복한 것이요, 고마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시내산에 이르러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산에 올라 간 동안에 산 밑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에도 만나 는 어김없이 내립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 앞에서 못할 짓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느 한 번도 우리를 내 팽개친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목 적한 곳으로 인도하시려고 당신의 수중에 우리를 붙잡아 매어 주셨던 것입니다. 포 기하거나 보류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어떻게 했습니까 여기 이 땅에서 살려는 마음으로 인해 항상 불만스러움 뿐이었지 않습니까 왜냐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만나 뿐이었으니까요. 이것에서 좀 탈피해보려는 우리의 몸부림 이 무엇이었습니까 만나를 좀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행했던 열심이 무엇 이었습니까 그것은 기껏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꺼내 놓아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금과 패물들은 애굽에서 갖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을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자기 열심으로 이 땅에서 좀 편해지 고자 하는 신앙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베드로식 신앙인 것입니다. 가장 좋은 의리의 사람이요, 용감하고 사나이다운 사람으로서 그럴수 없는 충성심이 있습니다만는 하 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세상적으 로 갖고 있는 것으로는 신앙에 아무 덕도 없습니다. 오직 영적으로 변화 되어야 합 니다.

물론 영적으로 변화한다는 거기에도 어려움은 있습니다. 앞에서 가룟 유다를 통해 서 볼 수 있듯이 진실된 충성과 가짜의 충성이 사실은 좀처럼 구별이 되지 않기 때 문입니다. 종교적인 놀이를 하는 사람과 실제 신앙과는 어떤 면에서 그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깨우치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매일의 만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 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이렇게 동원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제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안 십니까' 이러면 뭡니까 이것이 바로 베드로요, 만나 먹고 투덜거리다 광야 생활을 흘러 보 낸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성경을 한 번 읽어 주 고, 교회 한 번 나와 주고, 헌금 한 번 내어 주는 것으로 갑자기 무엇이 어떻게 되 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말씀을 통해서 내가 깨우쳐 내 가 걸어가야 하는 방향이 무엇이며, 어떻게 가야 하며, 무엇을 인내해야 되며, 무 엇을 절제해야 되는가 어디서 지혜로와야 되는가를 가르침 받는 것입니다. 그럼 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 열심과 자기의 욕심을 향한 집념이 신앙인 줄로 혼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시106:7-15절을 보십시다.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 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 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 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 버리며 그 가르 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 도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힌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요구한 것을 어떤 의미에서 다 들어 주셨 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들의 영의 양식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목마 르다고 할 때에 반석에서 물을 내었고, 배고프다고 할 때에 만나를 주셨습니다. 고 기가 먹고 싶다고 할 때는 메추라기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영혼이 살찌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영혼이 살찌는 문제에 대해서는 요구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베드로가 '주여, 이 일이 결 단코 주께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 고 꾸짖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꾸짖으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만이나 자만이니 하는 얘기들은 바로 그런 인간이라는 기초를 놓 고서 그 위에다 무엇을 쌓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마치 기독교를 치장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도와 줄 수 있다는 발상이 늘 가장 어려운 신앙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단지 긍휼이 필요한 자이며, 은혜가 필요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 심을 어디에다 꺼 내놓아야 하게겠습니까 우리는 영원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이 며, 생명이 무엇이며,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 나의 열심과 각오와 목숨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열심을 일방적으로 내기 전에 주님께 먼저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며, 무엇을 만드시려고 하 는가 또한 나의 인생을 통하여 무슨 멧시지를 펼치시려고 하시는가를 물으셔야 합니다. 이것을 묻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의 열심은 모두 육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시다면 우리를 낮은 자로 쓰실지도 모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꺼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그가 자신의 힘으로 주를 위하여 봉사하겠다고 뛰어나갔 을 때에는 8시간도 채 버티지 못했던 것이 그 다음 주님 앞에 꼬꾸라지며 하나님의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고 주님과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그렇게 자신을 고친 다음에는 기꺼이 그를 죽는 자리 까지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사도 바 울을 쓰기 위하여 사도 바울로 하여금 손을 들어 스데반을 죽이게 할 수 밖에 없었 던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신앙의 출발점은 언제나 죄절입니다. 절망이 있어야 합니다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꼭 있어야 됩니다. '내가 잘못했구나! 다시는 안 그 러겠습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것이 통회가 아닙니다. '나는 악 밖에 행할 줄 모르는구나! 내가 꺼내 놓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방해가 되는구나!'를 깨달아야 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하다는 그 고백을 여러분이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은 지 꽤 오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원리와 이 말씀이 혹시 귀에 설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귀에 설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완전히 주거니 받 거니 식이었던 것입니다. '받기 위하여 내자! 그래서 받자! 하늘 보좌를 움직이자' 이런 식으로 밖에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맞는 설명이긴 하 지만 참으로 가난한 설명이었습니다. 유치한 설명이라는 말입니다. 더 풍성한 설명 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입니다. 내가 갖고 있던 지금 까지의 가치관과 보물과 열심을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성화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고백은 '나는 없어졌습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옛날의 내가 아 닙니다. 나는 완전히 딴 사람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참으로 자랑스러운 고 백이면서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따지면 얼마나 맥없는 고백입니까 '야, 그러니까 넌 이제 허수아비구나! 너야말로 이제 바지 저고리구나!' 그런 얘기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 길이 하나님께서 다만 우리를 이용해 먹고 우리를 농락하는 길이 아니 라, 그것이 우리의 축복의 길이요 우리가 상상치 못했던 영광의 길이요 만족한 길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성품을 자꾸만 묘사하고 묵 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하나님은 선하시며 인자하시며 사랑하 시며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이런 설명이 늘 따르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가운데서 열심을 부추기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틀린 길입니 다. 조만간에 벽에 부딪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만을 붙잡고 나갈 것이 아니라, 변화된 베드로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영원과 영 광과 충만을 향한 열심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여러분의 삶을 꺼내 놓고, 바쳐 놓고, 현실을 불만하고 불평하는 자가 되지 않기로 작정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가나안이 우리의 이정표요 자극제입니다. 그런데 가난안의 의 풍성함과 위대한 약속들을 몽땅 잊어버리고 오늘도 애굽을 꺼내 놓고 '이게 뭡 니까 주님!'하는 방향으로 가지 간기로 결심하셔야 합니다.

신자의 생활은 그런 의미에서 고달픕니다. 그러나 잘 보시면 그것이 엄청난 목적 지를 향하여 걷고 있는 필요힌 과정이라는 것을 아시게 됩니다. 그래서 결단코 눈 물의 길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길입니다. '이제 두고보면 알아!'하는 베짱을 힘 있게 가지는 길입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진리와 이 생명과 약속들을 제대로 깨우치시고 제대로 누리시고, 제대로 힘있 강자가 되시기 위하여 매일의 양식과 주님의 간섭을 확인하시고 항복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영위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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