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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남편을 불러오라 (요 0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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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문외한인 그녀에게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끊임없 이 왜 인간에게 영적인 차원의 문제들이 필요한 지를 질문을 통하여 유도 하시고 계시는 데에 비하여, 이 여인은 얼마나 인간적인 범위 내에서만 이해하고 반응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오셔서 '물을 좀 달라'고 하면서 요구하였을 때 의 사마리아 여인의 반응이나, 또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반응한 것들은 모두 인간 적인 이해의 방법론을 넘어서지 못하는 반응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었을 말하는 것입니까 인간이란 하나님 앞에서 적어도 그와같이 한심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 라"(요3:3)고 말씀하시자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 능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겄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 이렇게 인 간은 그저 자기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영원한 초월적인 영적 진리를 납득할 수 있 을 것이라는 자세를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인 간의 지식과 이해력으로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들입니다. 그럼에도 이해 할 수 있을 문제를 이해 못하는 것인 양 계속 반문만 해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 게 반문이 나옵니까 그것은 나도 납득할 수 있다는 자만심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만심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자만하지 않습 니다. 일반적으로 자기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병입니다. 그래서 교만이라는 병은 언제나 무지와 함께 붙어 다닙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잘 아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 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잊을 때에는 교만하게 됩니다.

 11절 말씀을 보시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 겠삽나이까" 이에 예수님의 대답이 "네가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군 줄 알았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다." 그랬더니 여인은 다시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는 당신은 물 길을 두레박도 안 가지고 있고 우물도 깊은데 도대체 무슨 재주로 생수를 주시겠다는 말 입니까" 하면서 대답합니다.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는데 이 여인은 기껏 무슨 생각을 합니까 자기가 늘상 먹고 있는 그 물 만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생수가 우리가 먹는 물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에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하면서 반응을 합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여인에게 는 야곱이 제일 큰 사람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다면 제 가 한번 관심을 가져보겠습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앞에 두고서 철저히 인간적인 이해력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려고만 합니 다. 우리 신자들도 하나님을 이해할 때에 얼마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려고 하 는지 모릅니다.

어느 주일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심과 무소부재하심을 설명하 는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르시는게 없어요. 귀신같이 다 알아맞추시지요."라고 했습니다. 여러 분 이 설명이 그럴듯하게 들립니까 도대체 하나님과 귀신 중에 누가 더 셉니까 우리의 이성과 이해력으로 알고 있는 최대의 대상은 귀신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 님을 귀신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까 어처구니 없게도 하나님은 귀 신보다 조금 낮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좀 더 심한 사람은 이렇게 비교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우셔, 꼭 족집게 무당 같으셔!" 여기서는 하나님이 무당이 되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묘사할 때에 세상적인 지식이나 경험들을 근거로하여 묘사하고 설명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우리가 얼마만큼이나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 영적 으로 정리가 안 되어 있느냐 하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물며 사마리아 연인은 지금 막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의 표현이니 오죽하겠습니까 이런 광경이 이미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자들에게는 안타까우실 것입니다. 얼른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주여!"하고 매달려야 할텐데 왜 저리 딴청을 부리고 있는것 일까 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왜 이러한 마음이 앞설까요 그 이유는 나는 안 그랬 으리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애초부터 하나님을 알아보고, 영원 을 알고, 진리를 인식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내가 그 런 과정을 거쳤으리라는 사실은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아직도 나에게는 그런 인간적으로 이해하려는 안타까운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서,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무었인지 아십니까 '내 마음도 그런 데 하나님은 오죽하시겠는가'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내가 필요하게 되면 하나님도 필요해야 하고 내가 싫어하면 하나님도 싫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나와 하나님이 일치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치하지 않는 것은 더 많다는 것 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과오를 왕왕 이 범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과정보다 결과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보 편적인 이해방식입니다. 이렇게 과정을 무시한 채 결과만을 추구하려는 이해방식은 결국 아무런 결과도 붙잡지 못하게 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예로,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을 존경합니다. 주님께서 그 죽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으면 하늘 문이 열리고 보좌 우편에 늘 앉아 계시던 예수님께서 일어서셨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스데반의 얼굴이 성령충만한 얼굴이 되어 장렬히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개 미화된 스데반의 죽음에서 비록 돌에 맞아 죽 었지만 아프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스데반같이 되리 라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결심을 하는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옆 사람이 던져오 는 말 한 마디를 가지고도 자존심이 상한다고 펄펄 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육체적 인 극도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과 동시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정신적이고도 영적인 아픔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고통이 없는 과정은 영광의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쉽게 흐르는가 하는 점을 볼 수 있습니 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누구를 가장 존경하는가고 질문을 하면 불행히도 대부분이 한국 사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사람들 중에 제일 많이 나오는 사람이 베 에토벤이나 슈바이쩌, 아니면 나폴레옹이나 힛틀러 그리고 에디슨 같은 인물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존경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렇게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존경한다는 뜻은 그런 것이 아닙 니다. 존경한다는 것은 그의 삶의 목표와 방법과 자세를 나도 좇고 싶다는 것입니 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경한다고 할 때에 그 위인의 위인됨의 과 정과 의지와 자세가 아닌 그의 저명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중간의 과정을 잘 모르고 결과만을 맞보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를 스스로 분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는 속이 텅텅 빈 어드벌루운같은 결과를 한 줄에 매달아 띄우는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바로 이것 이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신앙의 약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런식으로 기도합니다. '이번 시험에 우리 아이를 합격시켜 주시면 선교 사로 내 보내겠습니다'하는 식이 나옵니다. 주일도 제대로 안 보내면서 약속은 '아 프리카 선교사로 보내 주시옵소서'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능 력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적하고 계시는 인간이란 누구인가 하는 사실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였으며, 지금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아직도 어떤 것들이 썩여 있는 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지적하는 인간과 죄에 대해서 너무 무식합니 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꿈에만 부풀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무었을 할 수 있고 무었이 될 수 있다고는 꿈꾸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와같으며, 심지어 우리가 신자임에도 우리 중에 대부분이 이 여인이 했던 동일한 질문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큽니까'하면서 질문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 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3-14)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에 여인은 선뜻 '주여 그러면 그 물을 저에게 주 십시오!'하며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진전이었습니다. 드디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도록 달라는 것입니다.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하는 이 말은 신자들이 처음으로 기 독교에 입문할 때에 사실상 영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세상적인 이익 때문에 입문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기독교에 들어오는 것을 부끄 럽게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실 수한 것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세상적인 이 익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기독교에 발을 디딘 첫번째 이유가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에 동의 하셔야 됩니다. 어느 누구도 기독교의 정신적이고 영적이고 도덕적인 이유 때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욕심 때문에 발을 들여 놓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동시에 도덕과 윤리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를 논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신자로서 마땅히 장성하여 알만한 때가 지났는데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자들이 가지 고 있는 가장 큰 병중의 하나입니다.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구하고 긍휼을 구해야 되는 자인데도 스스로 모든 것을 걷어 차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께서 여인을 향하여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왜 갑 자기 예수님께서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남편에게 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기독교에 귀의하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자기의 이익과 호기심에서 시작됩니다만 어떤 사람도 죄를 지적 당하지 않고서는 기독교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 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뭐 별다를게 있는가 이웃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정직하고 떳떳하고 성 실하게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마음 속 제일 깊은 곳으로부터 확인하는 것입 니다. 무었에 대한 죄를 확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것에 대한 죄를 확인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얼마나 떳떳하고 정직 하게 사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는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을 몰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죄를 인식시키는 방법으로 '네가 나를 모르는구나'하면서 짚고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그 죄 문제가 인식되지 않기 때문 입니다. 아예 죄라는 감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었부터 지적하여 들어가시 는가 하면 죄의 한 현상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그 러신 것입니다.

이러한 지적을 받자 여인은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고 말합니 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여인은 아직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 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의 진전은 있습니다. 그녀 앞에 서있는 사람의 말 과 무게에서 영적인 임재력을 느끼게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로 보았던것 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언제 구원을 얻습니까 이 여인은 '당신은 선지자입니다'라고 말하고 조금 더 나아가서 구원을 얻습니다만 이것은 우리의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구원은 이미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에 이루어진 것입 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녀는 창세 전에 예정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좀 어려워 졌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한 번 하시고자 하는 일에는 결코 실패하 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마음 먹은 것은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창 세 전에 예정하신 구원을 이루시는 것은 시간속에서입니다. 그리하여 어느날 갑자 기 찾아오셔서 흔들고 깨우십니다. 그리고 야곱이 씨름한 것같이 씨름을 해서 기어 코 항복 시키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보고 '공부해라'고 하면 늘 '네!'하면서 순종합니까 때로는 하기 싫다고 뻐팁니다. 그렇다고해서 포기시킵니까 때려서라도 시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계획을 이루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설득하시고, 말씀하시고, 간 섭하심으로써 합니다. 우리의 생활이나 개인의 생각 속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사리 항복을 하지 않다가 어느 날엔가는 '예, 믿겠습니다!'하고 항복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이 '믿겠습니다'고 고백한 날 부터입니까 영원 전부터입니까 이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 전부터 구원을 얻은 자이지만 '오늘 믿겠습니다!' 라고 해서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것이 뭐냐하면 '믿겠습 다'라고 항복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의 조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경은 끊임없이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 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와 축복을 받은 자인가 하는 사실이 명백해 지는 사건이 사마리아 여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간섭으로 인하여 드디어 어느날 우리는 내가 누구이며, 인생이 무었이며, 생명과 진리가 무었인지에 대하여 항복으로 알게되어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은혜와 보살핌과 고집 속에서 인도함을 받은 자들인가 하는 사실을 알며, 또한 지금도 그렇게 인도함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받을 것이라는 아 는 것이 신자의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나로하여금 이 자리에 있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감수하셨다 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나는 은혜를 조금 받았다는 말 을 감히 입에 오르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사실을 기억함으로 감 사와 감격이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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