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적의 참 뜻 (요 04:46-53)

첨부 1


복음서를 읽어보면 이 가운데 제일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 신 내용들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좇아 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의 기록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자체 내에서 복음이 영적인 것만이냐 혹은 육체적인 것도 포함되 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거리로 대두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예수 믿고 은혜 받아 구원 얻은 자들은 다시는 아픈 것도, 실패 하는 것도, 심지어는 슬 픈 일도 없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 제입니다.

여기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렸다고 쉽게 단언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둘 다 진리의 한 면 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 지를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 을 내어 쫓는 일련의 기적 사건들은 하나 하나 중요한 내용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질병이 마귀의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병은 모두 귀신의 장난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역사로 말미암은 질병이 아닌데도 실지로 본인이 그렇게 생각해서 낫는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는 데에 어려 움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모든 좋지 않은 일을 만들어 내는 원인자를 사탄과 마귀로 규정 짖 고 들어 가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만,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점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예수를 잘 믿기만 하면 마귀가 틈타서 고통을 당하거 나 슬프하는 일이 없다고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논리대로면 영적 수준이 상 당한 사람들은 사탄을 능히 제어할 능력이 있기에 고통이나 질병으로 고생하지 않 아야 하는데, 상당히 능력있는 영적 수준을 가진 사람도 아프다는 데에 문제가 있 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어떻게 해석해야 옳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방식에 젖은 사람들은 대개 이쯤 되면 '당신도 아픈걸 보니 당신의 신앙도 별 볼일 없다'고 거침없이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미묘한 감정 적인 갈등은 물론 대립으로 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인간에게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없게 되 는 날은 우리가 부활체의 몸으로 살게 되는 날 새 예루살렘에서 부터라고 계시록21 장은 말해 줍니다. 계21:4절에 "다시는 눈물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서 부활체의 몸으로 살게 되는 그 날이 오기 까지는 인간 세상에서는 여전히 고통과 질병과 슬픔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요, 예수님이 계신 곳이므로 감히 귀신이 발을 내 딛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명함을 내 밀다가는 이내 쫓겨가게 되어 있으 며, 감히 눈을 치켜들고 쳐다 볼 수도 없습니다. 그 만큼 성도는 존귀한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부활한 몸이 아니며,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죄악이 관영하고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이기에 모두가 그 영향 아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신자는 불신자와 다릅니다. 성경에서 신자의 죽음을 가리켜 죽었다 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 안에서 잠 자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축복된 일이란 그 운명이 절망과 후회스러운 곳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으로 소망을 가지며 마음에 평안을 가지는 것에 있는 것이지, 오늘 내 손에 쥐어지는 세상적인 능력과 여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도 테니스 코트에 나가서 경기를 하더라도 지 는 일이 생깁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하고 나가도 도무지 잘 되지를 않습니다. 이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입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어떤 왕의 신하가 그의 아들의 병 고 침 받는 사건을 통해 신중히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만나 보지도 않고 다만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하는 말씀 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행하셨던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보고 온 사람들로 인하여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곧 갈릴리 지방에 널리 퍼 졌습니다. 마침내 소문을 들은 왕의 신하가 그의 아들이 심히 아파서 거의 죽게 되 자 예루살렘에서 별난 일을 행하셨다는 분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 왔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으로,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걸어서 약 4시간 정도인 길을 찾아와서 예수님께 '내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오셔서 고쳐 주십시오'라고 간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라! 네 아들이 낳았다!'하셨고, 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 을 만나서야 그의 아들이 나았다는 얘기를 듣게 되는데 나은 시각을 물어보니 예수 께서 '가라!'고 하신 바로 그 시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환자를 보지도 않으셨고, 걸어서 4시간의 먼 곳이고, 더구나 무슨 병인지도 모르시면서 말씀으로만 낫게 하셨다는 기록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왔던 왕의 신하가 드디어 그와 그의 집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기록한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잘못 읽으면 오해할 구절이 있으므로 말씀을 차근 차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47절을 보면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얘기 하는 것을 볼때에 그에게는 상 당한 믿음이 있어 보입니다.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참으로 뜻 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48절에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 니하리라" '내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하는 간청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에게는 도 무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없구나'하는 의미의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이 오직 자기의 필요에 따르는 절실함 밖에는 없다는 말입니 다. 이것이 이 사건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라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왔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하는 대목에 있습니다. 그 간청에 예수님은 '너희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 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왕의 신하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 서'라고 다시 간청합니다. 이것을 볼 때에 아직 이 사람은 예수님이 병 고치는 의 사에 불과하다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러한 기록이 성경에는 몇 군데 있습니다. 그 한 예로서 나사로의 죽음을 기록한 대목에 있습니다. 요11:17-21절을 찾아 보십시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ㅓ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 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 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 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 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든가, '주께서 손을 얹어 내 아이에게 안수하여 주십시오"라는 등등의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어떤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가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것 같은면서도 사실은 부분적으로 밖에는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예수님은 의사 정 도의 대접만을 받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런 형편없는 믿음의 요청들, 아니 믿음이라고 볼 수 없는 자신들의 절실한 요청들에 대해서까지 어떻게 응하셨는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 나사로 사건만 해도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요11:39-42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 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렇게 예수님에게는 병 낫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우 리에게 보내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차원이 낮은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렇게 해서라도 주님께서는 한 가정, 한 영혼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사건의 좀 다른점 은 다른 경우에서 소경을 고치기 위하여 눈에 친히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고 실 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든가, 벙어리를 고칠 때에 '에바다'라고 친히 명하시면서 입 을 열게 하셨는데 이 사건에서는 환자에게 가시지도 않고 어떠한 행동을 취하시지 않고 다만 '가라!'고 명령만 하시므로 고친 것이 특이한 점입니다.

또한, 우리가 여기서 유의하여 살펴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걸어서 4시간 거리인데 왕의 신하가 돌아가던 중에 하인들을 만나보니 어 제 7시쯤(오후 1시)에 이미 아들의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즉시 돌아 갔더라면 적어도 오후 5시 쯤에는 집에 도착했어야 했습니다. 본문 50절에 보면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믿었다는 말씀은 복잡한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면 만약에 그 신하가 진실로 믿었다면 불과 4시간 거리에 있는 가나의 자기 집으로 곧장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의 종들을 만난 시간을 보니 그 다음날 입니다. 그것도 집을 향해 가던 도중에 만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이 신하는 아들이 병고침을 받기가 툴렸다고 포기 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을 낫게 해 주십시요'라고 간 청할 때에 '가라 네 아들이 낳았다'는 말씀만을 하시니 희망이 없는 모양이라고 포 기하다가 어차피 집에는 가야 하므로 다음 날에야 비로소 집을 향해 가던 중 종을 만나 '어제 7시경에 아드님의 열기가 떨어졌나이다'는 전갈을 전해 듣고 그 시간을 따져보니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때 인줄 알고 그와 온 가족이 다 믿게 되었다 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의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아무런 희망이 없을 듯해 보이다가 마지막에 가서 극적인 전환이 생겼습니다. 이 신하의 아들이 병고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그의 가족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갖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특별히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병고치는 사건들에 대해서 친히 이 문제에 대한 오해가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많은 경계를 하십니다.

막1:40-44절을 보십시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 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 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 끗하여진지라 엄히 경계하사 곧 보네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 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이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 이 깨끗해 졌다는 확인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그 행하신 일의 완벽성은 가서 확인케 하시면서도 아무에게나 소문을 내는 것은 금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주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병이 나은 것 외에는 관 심을 갖지 않는 사람의 속성을 주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요 6장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 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요6:22-25절을 보십시다.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밖에는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 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도 없음을 보고 곧 배를 타고 예수를 찾 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후 하룻밤을 자고 나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온데간 데 없었습니다. 마침 해변을 보니 두 척의 배 가운데 한 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배를 타고 열심히 좇아가다 마침내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로다"라고 무섭게 꾸짖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 들 보면 도무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병이 낫거나 먹고 배부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여기서 표적이라는 말씀을 사용 하셨을까요 표적의 궁극적인 목표 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알리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는 우리가 요한복음11 장에서 본 바와같이 "아버지여, 내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하시면서 이 렇게 말씀하신 것은 둘러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 도 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생기는 재난과 환난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가 져야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픈 일이나 안타까운 일들은 모두 우리가 영적으로 선한 열매와 결론을 이루도록 하기위해 주어진 것이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같은 재난과 어려운 일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하나님 앞 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내 손과 내 발로 해결되는 문제 속에서는 하나님을 찾을 문 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문 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탄이 와서 묻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는데도 하 나님을 섬길 사람이 있겠습니까'하고 반문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욥을 꼽으시 면서 그의 허락 하에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쳐도 좋다고 테스트 해 볼것을 허용 합니다. 결국, 그 결과 사탄은 욥42:5절에 "내가 예전에는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보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후 욥의 축복이 이전 보다 갑절이나 더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적인 깊이도 갑절이나 더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조롱하던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 는 깊은 경지에 까지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심각한 병이 무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영 적인 문둥병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문둥병과 같이 감각이 없고 아프지 않는 병 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난로에다 손을 대 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손을 대면 뜨겁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아프다는 것만큼 인 간에게 큰 축복도 없습니다. 만일 아프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많이 상하게 하고 말 것입니다.

허리의 통증이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러질 때까지 무었인가를 하 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아프다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게 하고 우리를 보수하게 합 니다. 그러나 문둥병은 병 자체로 아프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영적인 아픔 있는가를 보시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불행은 여러 분이 겪고 있는 아픔이 문둥병일까봐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무감각함의 심각성에 대하여 롬1:21-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 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 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 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 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벌이 무었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더러움에 버려두는 것입니 다. 더러움 속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더러움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아파도 아픈 줄 을 모르는 문둥병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본문에서는 그 아픔에 대하여 병을 고쳐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었기에 결과적으로는 축복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만일 아픈 것을 모른다면 어떻게 병을 고칠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은 인간을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요 3: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 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우리의 가장 큰 병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죄를 짓고 더러움 속에 빠져 있는데 그 것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발에 무좀이 있어서 무척이나 가렵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마 가려운 무좀 걸린 발바닥을 긁는 것만큼 시원한 일이 없을것니다. 그래서 이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오히려 무좀 걸린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같은 상태가 우리의 영적인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긁는 맛에 문둥병 에 걸린 것도 모릅니다. 이와같은 영적으로 무감각한과 더러움에 내어 버려져 있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깨끗한 옷을 입는 것보다 더러운 옷을 더 좋아하는 사 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밤낮으로 우리를 가리켜 더럽 다고 꼬집어 주고, 이를 갈며 아파해야 하는 것이라고 제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주 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와같은 일을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임무라는 것을 라는 것을 이해 하셔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올 때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담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며, 아프게 찔러 깨닫게 해 주는 말씀 전하는 자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만 어떤 방법으로든 강권되어서 이 자리에 나아 오셔야만 됩니다. 오셔서 지적 당하시 고 싫은 이야기를 들으셔야만 됩니다. 이것이 정상적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칭찬 만 들으려고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괄세도 받고 욕도 먹으면서 밤낮으로 세상 의 험한 이야기를 들으셔야 됩니다. 물론, 이것이 쉽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 다.

그러나, 아파했기 때문에, 또한 심각한 것인 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게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구신 줄 알고 나오신 것이 아니라, 아파서 예수 님께 나와보니 예수님이 누구신 줄을 알게 되었다는 이것이 우리의 간증이요, 이야 기입니다.

여러분에게 이와같은 아픔이 있습니까 그 아픔이 없을까봐 걱정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 이 누구신 줄을 알고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개가 개인적인 욕심 이나 개인적인 필요로써 교회에 나왔다가 어느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발 거기 욕심에서 머물지 마십시오. 병고침 받은 것, 문제를 해결받은 데서 머물 것이 아니라, 그 뒤에까지 연결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셔야 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자신을 도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알고 계시며 그 분과 깊이 사귀고 계십니까 그 분의 필요성을 느끼고 계십니까 헌금이나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필 요성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자신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 심각성이 없 다면 여러분은 문둥병자들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장 큰 병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원래부터 우리는 더러움을 좋아하고 내어버려져 있는 것을 좋은 줄로 알고 있는 자 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옛 모습으로 되돌아 가려는 경향이 우리 속에 도사리 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오지 말아라'하면 얼마나 좋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의 직장에서 '이제는 안 나오셔도 됩니다'한다면 그 말에는 펄펄 뜁니다. 이러면서 도 우리의 심령의 문둥병에 관한 문제에 관해서는 그렇게 무딥니까 또한, 우리는 일요일이 한 달에 한 번씩 는다면 모두가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면 서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주일을 쉴 수 있을까 교회에 나오면서도 그런 생각을 합 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무슨 교독문은 그렇게 밤낮 읽는지, 찬송가도 1절만 불러 도 될텐네 무었 때문에 4절 까지 길게 불러야 되는가 또 주일마다 왠 설교가 그렇 게 긴가 저녁 예배는 하필 즐거운 TV프로그램을 못 보게 하는가 이렇게 우리는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런 생각을 늘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모든 관심과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사랑하는 바는 죄짓게 하는 더 러운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하여 아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 픈 감각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니까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인지, 되는 대로 즐기며 사는 것인지 구별이 안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