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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로 때문에 (요 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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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에는 주님께서 죽은 지 사흘된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이유는 이미 무덤에 장사지냈을 뿐만 아니라 썩어 냄새가 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팔레스타인은 날씨가 덥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시체를 오랫동안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 장례를 치러 버렸습니다.그 나라의 기후 조건으로는 죽은 지 나흘이라면 썩어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그러나 주님은 그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임을 발견하게 됩니다.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능은 생명이요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죽은 나사로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사건은 그 당시 베다니는 물론 예루살렘 조야와 모든 시민들의 화제 거리였습니다.
본문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주님을 모시고 그의 누이인 마리아와 마르다가 잔치를 베푼 이야기와 나사로의 부활을 에워싸고 일어났던 반응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그 자리에서 나사로의 누이인 마라아는 순전한 나드로 만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나사로의 부활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부활의 축복을 예시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25-26에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부활과 생명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에워싸고 일어났던 반응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나사로 사건 때문에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1:47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고 했습니다.그리고 11:53을 보면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했습니다.유대 나라의 서울인 예루살렘에는 산헤드린 공회라는 최고 법정이 있었습니다.그 공회는 사두개파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의 장로들과 서기관들 72명으로 숭고한 사건을 종교 재판의 안건으로 상정하여 의논하고 예수님을 제거할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유대인 중 반대파들은 예수 죽일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의하기 시작했습니다.그들은 모일 필요도 없는 일 때문에 모여서 시간을 낭비해 가며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악을 행하기 위해 모였던 것입니다.
중세의 신학자들이 온종일 모여서 의논하고 토론한 주제들 가운데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설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그들은 그것을 놓고 떠들고 소리치고 때론 심각한척 이론을 제시하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한 마디로 죽은 신학자들이었고 밥먹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 때문에 교회에 모였으면서도 예수님은 제쳐놓고 다른 것을 이야기하다가 흩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끼리,예수님 때문에 모였다면서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만을 주고 받다가 흩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방저방 모여 앉아서 세상 이야기나 지껄이고 남의 흉이나 들춰내고 앉아 있다면 중세기 신학자들이나 산헤드린 공회의 회의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행하신 기적과 능력은 맹렬한 환영과 지지를 받았는가 하면 엄청난 반대를 동반했습니다.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를 반대하는 그곳을 주님은 조용히 떠나셨다는 것입니다.“떠난다”는 것은 결별을 말합니다.다시 말하면 “헤어짐”인 것입니다.헤어져도 그만인 사람과의 헤어짐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고,꼭 헤어져야 할 사람과의 결별이라면 오히려 시원한 일이겠지만 예수님과의 결별은 생각만해도 두려운 것입니다.
요한복음 15:5에서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6절에서는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와 헤어진 사람은 줄기에서 잘려진 가지가 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가지는 며칠이 못 되어 시들고 말라 버린다는 것입니다.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쓸모없는 쓰레기를 주워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한 마디로 예수와 헤어지면 죽고 심판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무서운 심판이 예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리고 자신의 가능성을 집합시켜 예수를 반대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그러나 순간을 살아가는 인생이 영원하신 예수를 반대한다고 해서 예수의 이름이 지워지지도 않으려니와,오히려 반대하는 세력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며 쓰레기처럼 불타고 말 것입니다.예수는 반대해서는 안 되는 분이며 반대할 수도 없는 절대적 능력이며 영원한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2.나사로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1:45을 보면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다”고 했고 12:11을 보면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나사로 사건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는 물론 나사로도 죽이려고 했습니다.그러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과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충격과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를 확신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가 하면,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그 마음이 완악하여지고 경직되면서분노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고침받고 죄인이 새롭게 변화되는 사건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놀라고 감격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더 견고히 다져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어떤 사람들은 똑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안목을 넓혀 나가고 불신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7:54이하를 보면 초대 교회의 집사였던 스데반의 장렬한 순교 장면이 나옵니다.그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를 지적하고 회개할 것을 외쳤습니다.그러한 그의 설교를 듣고 난 유대인들의 반응을 7:54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찔렸다”는 것은 걸렸다는 뜻입니다.그리고 그들의 분노를 터뜨렸다는 뜻입니다.극도의 분노한 모습을 표현할 때 이를 간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볼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본 자세입니다.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기본 자세가 바로 정립되어야 말씀을 들을때 긍정적으로 들을 수 있고 기적을 보고 들을 때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종래는 이를 가는 배교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때 강렬한 인상과 충격을 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그가 바로 박해자들의 괴수 사울이었습니다.스데반은 죽음을 통하여 박해자를 회개시킬 수 있었습니다.“나”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반응이나 결과를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나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모 직장 선교회 책임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그에 의하면 자기네 계열사에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무려 500명이 넘는데 자신이 교인임을 밝힌 사람의 수는 불과 200여 명에 불과할 뿐 나머지 300여 명은 직장 안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처신하기가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출세나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교회 출석이나 하면 됐지 귀찮게 직장에서까지 예수 냄새를 풍길 필요가 있겠느냐는 등 대강 그런 이유들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내가 앉아 있는 그곳에서 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고 빛이 밝아진다면 나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나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세상 사람들은,자신들은 무슨 짓을 하고 살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자이기를 바라고 천사이기를 바라고 예수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그리고 걸핏하면 한다는 소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되느냐”라든지 “예수 믿는 것들이 그래서 되느냐”라고 대들고 공격합니다.
그 이유는,우리는 산 위에 드러난 동네이며 높이 매달린 등불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5:14-15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던 남편이 아내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그리고 믿지 않던 아내가 남편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최상의 축복이며 행복일 것입니다.그러나 “나”때문에 믿던 사람이 예수를 멀리하고 잘 나오던 사람이 “나”때문에 교회를 멀리하게 된다면 그것은 서로를 위해 큰 불행이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나”때문에 다른 사람을 예수 믿게 한다는 것은 자기 희생과 자기 포기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힘겹고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러나 그 결과를 생각하고 상급을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는 일만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다니엘 12:3을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중국의 선교사로 가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병이 나서 돌아오는 모리슨 선교사와 휴가차 아프리카에 가서 사냥을 즐기고 돌아오는 당시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같은 기선을 타게 되었습니다.
배가 뉴욕에 도착하자 악대의 연주가 울려퍼지고 수많은 인파가 소리를 지르며 사냥하고 돌아오는 루즈벨트를 환영하였습니다.대통령 일행이 사냥한 짐승을 높이 치켜들고 환영 인파에 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모리슨 선교사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 모리슨에게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너는 20년간 십자가를 졌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느냐 넌 아직 고향에 도착하지 않았어!”라는 그 음성에 모리슨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의 본 위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전하고 예수 위해 헌신하고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한 고향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거기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군왕도 받지 못한 성대한 환영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사로가 됩시다.나사로처럼 다시 살아납시다.다시 태어납시다.다시 일어납시다.그리고 나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전도의 주인공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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