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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의 기름부음 (삼상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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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어제의 사람, 사무엘은 오늘의 사람, 다윗은 내일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현재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부어지고 있지만, 왕관이나 혹은 서야할 강단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내일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가지는 하나님이 주신 기름부음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개발되어야 합니다. 기름부음이 개발된다는 말은 없는 기름부음을 개발한다는 말이 아니고,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성품에서 다듬어지고 자라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경우를 요셉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의 저서 가운데 요셉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 지를 잘 묘사한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다루시는 바를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량없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제한이 없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위다우트 리밑(Without Limit)이란 말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제한 없이, 원없이, 한없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5장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하는 것을 배우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히 5:8-9)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진토에 불과한 우리들은 더 어떠하겠습니까.(렘17:9) 하나님의 다루심은 다윗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의 고난은 더 큰 기름부음에 이르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우선 요셉의 경우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셉은 매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너무 특혜를 받고 자랐기 때문에 버릇이 없고 자기밖에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자질하곤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가지고 형들 앞에서 자랑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성품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요셉의 행동은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요셉을 빚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통해 빚어진 그의 성품은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까지도 온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제5장 내일의 기름부음
반면, 다윗은 요셉과는 달랐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보면 순금과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이 더 제련되듯이 처음부터 다듬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겸손한 면을 볼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자기 사위로 삼으려고 했을 때의 일입니다.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삼상18:18)

뿐만 아닙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이 왕의 사위가 되라고 부추길 때도 참으로 겸손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대답한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가식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자세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네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던 그 마음입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겸손하고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난을 통해서 빚어져야 했습니다.

내일의 사람이 빚어져야 할 필수적인 요소 두 가지

첫 번째, 질투
내일의 사람, 내일의 기름부음에 있어서 빚어짐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내일의 기름부음, 혹은 내일의 사람에게 있어서 특별히 빚어져야 할 두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경쟁심’ 혹은 ‘질투’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들을 사용하시기 시작하면 그들은 오늘의 사람이 됩니다. 그 때 그들을 가장 반대할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전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어제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제의 사람이 오늘의 사람을 시기한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사람은 오늘의 사람을 질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투는 그 사람에게는 치명적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질투가 들어가면 치명적이 됩니다. 그것은 곧 끝입니다. ‘치명적’이란 말은 ‘끝났다’라는 말입니다. 치명상을 입었다는 말은 살 가망이 없을 만큼 중상을 입었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우리 모임 가운데 ‘질투가 들어왔다’는 것은 치명적이라는 말입니다. 제 속에 질투가 들어오면 저는 끝장납니다.

그런데 질투는 언제 들어옵니까 경쟁심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일어나기 시작하면 밖에 있는 적들보다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서로를 공격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또 의도적으로 서로를 치게 됩니다. 이 때가 바로 질투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들어온 증거입니다. 질투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불을 끄게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질투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그들이 구원하기 보다는 자기 주위에 위협이 된다고 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이것이 질투가 자리 잡은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사람 개인에게 치명적입니다. 사울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질투가 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생기는 걸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부음이 여러분에게 있게 될 때,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준비하지 못한 것을 여러분은 행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 안에서 질투가 일어나게 합니다.

함께 사역하다보면 어떤 때는 우리 속에 있는 죄들을 서로 고백할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유독 많은 목사님들이 어떤 목사님한테 찾아가서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들을 수 있습니다. 고백의 내용은 주로 이런 것입니다.“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질투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부음이 그 목사님에게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질투할 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항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이 진실로 내일의 사람이 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경우도 사울의 질투로 인해서 하마터면 끝장날뻔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매우 지혜롭게 행동하였습니다.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삼상18:14) 다시 말하면 그는 지혜롭게 행동을 취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질투할 때, 매우 지혜로워야 하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의 문제가 우리를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가능하면 그 사람의 질투를 부채질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동하라.”

두 번째, 성품
하나님께서는 내일의 사람을 고난을 통해서 훈련시키십니다. 여러분! 훈련받고 세워지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를 우리는 성경에서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주된 이유는 그가 훈련받지 않고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고난을 통해서 훈련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손에 그의 모난 성품이 빚어질 시간도 없이 너무 급하게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에게는 배우고자하는 겸손함이 없었습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 가운데 있기를 원하고, 주님의 행하심을 따라 순종해감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다루심이 길거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음을 알라.”

내일의 사람이 받을 두 가지 테스트

우리는 보통 이 기간동안에 두 가지를 테스트 받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에 대해 얼마나 민감한가 하는 부분을 테스트 받습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킬 수 있다는 것. 둘째, 우리는 성령을 쉽게 근심시킬 수 있다는 것. 셋째,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방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의 사람이 되려면, 혹은 내일의 사람으로서 빚어져서 하나님께서 세우실 그 때에 세움을 입게 되려면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방법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성령을 근심시킬 때, 우리가 성령을 근심시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실 때 그 분은 예고하고 떠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미풍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이 조용하게 떠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경우는 삼손의 경우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1.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방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그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의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폴 케인 목사님께서도 그렇게 강조하시기를 “첫째도 기름부음을 사랑하라. 둘째도 기름부음을 사랑하라. 셋째도 기름부음을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삼손의 경우는 기름부음을 소홀히 여겼던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이 금기한 비밀을 누설함으로 그에게서 기름부음이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서 기름부음이 떠난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드릴라가 삼손이 진정을 토함을 보고 보내어 블레셋사람의 방백을 불러 가로되 삼손이 내게 진정을 토하였으니 이제 한번만 올라오라.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드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본즉 그힘이 없어졌더라. 드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 16:18-20)

삼손은 여전히 자기에게 힘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름부음은 그에게서 떠난 후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성령의 기름부음이 떠났다.” 또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걷혔다.”라는 말은 우리 속에서 성령님이 떠나가심으로 우리가 지옥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떠났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신임이 떠난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걷힌다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님이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경우는 자신이 전과 같이 힘을 쓰려고 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예전에 삼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늦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의 떠나심은 아무 고통도 없고, 혹은 아무런 느낌도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한 가지 개인적으로 설교를 정리하다보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근래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육신적으로도 아주 힘들었고, 영적으로도 아주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길수 목사님하고 김정길 목사님에게 전화해서 그런 얘기들을 나누고 기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길수 목사님이나 김정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뭐냐면 새물결 선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 그 때에는 내가 비젼을 가졌는데.... 저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낌새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구멍이 뚫려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웠는데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사역의 확장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하시는 것이고, 안하시면 안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여태까지 기다리고 인내하면서 지내왔습니다. 그렇게 많이 희생한 것 같지는 않지만, 희생할 것이 있으면 희생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니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 밑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서 기뻐하시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그러면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물결선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데, 어떤 한 분의 예언을 통해서 “오늘 너희가 축배의 잔을 들리라”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그 말씀이 가장 큰 위로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도, 지금 이런 상황이니까 견디기 힘든 겁니다. 그래서 고통을 참는 중에 화요모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제 머리가 혼란스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연후에 성령께서 쭉 조명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비추셨습니다. 우리 선교회 사역자 한사람 한사람은 다 새물결 선교회를 대변하는 사람들입니다. 새물결 선교회에 속한 목회자나 사역자가 기도사역을 할 때, 그 사역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새물결선교회를 대표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이 세우시고 인도해 가시는 새물결선교회의 가치관을 진실로 이해하고 있는 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 그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와 삶의 방법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대변하고 있는 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답은 “아니다”였습니다. 물론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 자라가는 과정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그 한사람 한사람이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늘 통회하며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 제가 이 상태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저를 만져주셔서 주님으로 채워주시고, 저의 한마디 한마디의 말과 행실이 인간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상대방을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로 섬기게 하시고, 나의 인간적인 생각과 사고가 들어가지 않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람들을 섬기게 하옵소서.”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애통하고, 절실하고, 절박하게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있느냐 하는 부분이 중요한데 과연 그러한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사역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지만 그것은 둘째 문제이고, 우리 스스로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지고 빚어지고 주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는 한분 한분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할 것입니다. 격려할 것은 격려하고, 또한 지도할 것은 지도하고, 한사람 한사람이 누구에게 사역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새물결 선교회를 세우신 목적과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사역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새물결 선교회에 속한 모든 사역자와 교회와 목회자가 다 새물결 선교회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하루는 또 한 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너는 기름부음이 없으면 육신적으로는 시체고 머리는 먹통이다.” 사실 저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없으면 머리가 혼돈스럽고 전혀 생각이 안납니다. 어떨 때에는 시체같이 됩니다. 이제 50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집회를 앞두고 약함이 뒤집어 씌어지는 것 같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인간적인 것을 죽이시려고 그러시나봅니다. 여러분은 이해 못하실지 몰라요. 이해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50밖에 안됐는데 기름부음이 없으면 몸은 시체 같고 머리는 먹통이라니.... 그러니까 그걸 어디다 쓰겠습니까 진짜 아무데도 쓸모가 없습니다. 폴 케이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Im too old to disobey (나는 불순종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기다려 왔는데 지금 불순종해서 그 모든 것을 망치면 나는 끝이다. 그 얘기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이렇게 조언합니다. “죄 짓는 것과 회개하는 시간 사이에 있는 시간적인 간격을 줄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동참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을 관찰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의 시간적인 차이를 줄이는 것일수록 중요하다. 그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저게 하나님의 역사지.... 가만 가만, 아니지, 아니야.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지도 몰라.”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의 역사일 것도 같아서 연구를 많이 합니다. 또 때로는 관련 서적을 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맞는 것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아닌 것도 같고, 계속 관찰을 합니다. 그러면서 “저거 나중에 열매를 봐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관찰을 합니다. 이러다가 몇 년이 지난 후 확신이 생기면 “이제 조금 적극적으로 구해볼까” 생각을 가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만큼 시간이 길수록 하나님을 따라가는 게 늦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관찰하는 것과 동참하는 것 사이의 간격이 좁혀질수록 하나님의 인도에 빨리 동참하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죄짓는 것과 회개하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혀야 합니다. 예를 들어, 6년 전에 제가 새물결 선교회에 처음 왔을 때, 하나님께서 저의 어떤 부분을 다루시되 특별히 혈기부리는 부분에서 다루실 때의 일입니다. 처음에는 미련해서 왜 그런지 전혀 몰랐습니다. 똑같은 일을 몇 번씩 반복해서 겪은 뒤에야 깨닫게 된 일입니다. 처음엔 저는 그냥 감기에 걸린 줄로 알았습니다. 증상이 꼭 몸살감기같이 소화도 잘 안되고 머리도 열나고 너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두통약하고, 소화제하고, 종합 감기약을 계속 먹는데도 전혀 증상이 가라앉지 않고 아픈 것이 너무 오래가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 짜증나게 고통스런 것입니다. 그런 힘든 상태로 2주가 지나고, 3주가 지나고 한달 가까이 그런 상태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참다못해 징징거리며 성령님께 무엇이 문제인지 비춰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제가 아내에게 혹은 운전하다 혈기부린 것들이 떠오릅니다. 물론 혈기를 부릴만하니까 부린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20) 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두 손 들고 항복하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아내를 찾아가서 용서를 빕니다. 그러면 언제 아팠는지 정말 거짓말 같이 순식간에 그 지겨운 고통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미련해서 거의 한달 갔습니다. 그러다가 잊을 만 하면 또 비슷한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미련하게 모르고 있다가 다행히 한달은 안가고 25일쯤 지나서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빕니다. 그러면 또 거짓말 같이 괜찮습니다. 그러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경험을 통해 회개의 시간이 단축되기를 나중에는 20일 만에 깨닫고 회개하고, 또 그러다가 이번에는 15일 만에 깨닫고 회개하고, 그러면서 10일 만에 깨닫고 회개하고, 5일 만에 깨닫고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그러면서 지금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많이 다루셔서 길면

2. 3일 아니면 대부분 그날 중이나 아니면 몇 시간 혹은 금방 깨닫고 회개합니다. 제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혹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제 속에 많은 상처들 특히 분노 때문에 주님 따라갈 수 없으니까 또 그대로 두면 저도 안세워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상처를 주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저의 그 부분을 다루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내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바로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은혜가 걷힌 것을 저도 알고 옆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다루심이든 그 다루심에는 고통이 따르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우리 연약한 인간은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의 철저한 다루심을 받았다 해도 자동적으로 면역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걷히면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는 경계심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또 잠언 16장 18절, 18장 2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교만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떠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다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습니다. (조정열 목사 간증)

여러분 우리는 성령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성경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주된 죄 중에 하나가 원망과 서운한 마음입니다. 성도들을 보면서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안변할까 지금 예수 믿은지 도대체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저 모양이야,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왜 왜 왜” 그러면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그럼 성령의 임재가 걷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눈으로 성도들을 바라보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하면서 바로 그 다음에 원망 불평이 너희 가운데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엡 4:30)

저는 한 사건을 통해서 요즘 배워 가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저는 그들에게 최대한 좋은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 성도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에게 주신 사명은 그들을 섬기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최대한으로 좋은 마음으로 그분을 바라보며, 주께 하듯 그저 그분을 섬깁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때 원망하는 영이 우리 가운데 틈타지 못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의 경우는 성령을 근심시켜놓고, 자신이 성령을 근심시켰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아마 몇 초 아니면 몇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빨리 깨달았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삼상24:4)

사울이 다윗을 엔게디로 잡으러 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다윗은 부하들과 함께 동굴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그 동굴에 용변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용변을 보는 순간은 무방비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가장 허점이 많은 순간입니다. 그 때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당신을 죽이려하는 저 원수를 당신의 손에 하나님이 붙이셨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을 왕으로 세우실 절호의 기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이 용변을 보고 있을 때, 겉옷자락만 베었는데,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안 기뻐하시는지를 다윗은 바로 그 다음 순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금방 깨닫고 자기의 잘못을 회개합니다. 얼마나 빠른가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사람을 외모를 보지 않는 것.

그것이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을 때에라도 하나님이 내일의 사람이 될 자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것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놀라운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잘 다뤄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입니다. 외모로 취한다. 그러니까 꼭 이 사람은 부자니까 가까이하고, 저 사람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니까 멀리하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별로 상대할게 못돼” 이런 식의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포함되지만, 그러한 것뿐만 아니라 상황과 상태를 판단하되, 외부적인 인간적인 사고와 상황적인 증거만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반드시 다루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기기가 쉽지 않고,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기 위해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셨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보내시면서 ‘이새의 집’까지를 말하면서 다윗이라고 말씀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순종한 다음에 그 다음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가서 큰아들을 보는 순간 “바로 저 자다!” 하면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순간에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니야, 저 사람은 내가 버린 자야” 그 말은 ‘내가 택하지 않았다’ 그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사람은 외모로 취하나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중심을 보는 것은 성령님의 계시로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은 이 부분을 잘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와 같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나 나는 아무도 외모로 판단치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판단할 찌라도 내 판단은 옳으니 이는 나의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심이라”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서 11장에서는 칠중성령이 예수님께 임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는 “공의로 판단하실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판단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중심을 살피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한데 그러기 때문에 정황이나 사건을 따라서 판단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잘 넘어지는 부분도 이 부분입니다. 또 제일 많이 다루시는 부분도 이 부분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성령을 순식간에 근심케 합니다. 그것이 올바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끊긴 채 행동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거둠.

지난 주간에 박은길 목사님께서 어느 세미나에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오신 분이 강사였는데 그분의 가치관이 새물결 선교회와 비슷한 점이 많다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강사 분이 하루저녁에는 사역을 전혀 안하시고 가만히 1시간 동안 앉아 있다가 그냥 들어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날 밤에 사람들은 시간이 되기도 전에 집회 장소에 가득 모여서 설교가 끝난 후 사역하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작은 인원도 아니고 한 300 여명이 세미나비로 4만원이나 내고, 은혜 받고, 예언의 능력을 받아가지고 돌아가서 사역하려고 앉아 있는데, 강사는 설교도 안하고, 사역도 안하고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날 사람들은 속으로 “무슨 집회가 이런 게 다 있어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강사가 나와서 하는 얘기가 “여러분, 어제 집회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밤은 내가 할테니까 너는 가만히 앉아있어.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라고 대답한 후 그대로 앉아있다 들어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거 쉽지 않습니다. 이건 사람 두려워하는 것이 다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얘기하기를, “여러분이 저를 뭐라고 칭찬하건 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사역의 성공을 했다는 말을 들어도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호텔에 들어가 침대에 누울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에게 임하시면서 칭찬하시는 그 한마디가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주님과의 그 친밀한 교제가 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이 모든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더랍니다. 똑같은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만을 의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여러분을 칭찬하건, 사람들이 여러분을 욕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 그분의 평가만이 소중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릭 조이너가 쓴 책 중에서 「The Prophetic Ministry (예언적인 사역)」과 후편으로 나온 「The Call (소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릭 조이너는 이 책들을 통해 예언사역에 임하는 자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언사역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방향보다는 원칙적인 자세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도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과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참 좋은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도 번역되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사역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함을 갖는 것은 필수 중에 필수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은사가 많아도 엉뚱한 얘기를 하기 쉽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열왕기상17장 1절에 보면 엘리야가 아합 왕을 직면하였을 때 한 말이 있습니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기서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란 말은 NAS 영어성경에 보면 “내가 그 앞에 서 있는 그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서있는” 에 해당되는 단어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지금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엘리야는 더 나아가서 그 시점에 만군의 여호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겁니다. 그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자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갈라디아 1장 10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시 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릭 조이너 목사는 늘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에게 인정되기를 구하는 정도만큼 우리의 사역과 우리의 예언과 우리의 말은 타락한 것이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기도사역하면서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만큼 그 기도사역은 타락한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과 언어(예언) 에 있어서 인정을 받으려 하는 만큼 예언은 타락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넘어집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란 문구를 붙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타락한 것입니다.

릭 조이너 목사님은 진실성과 올바른 동기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사역에 있어서 중심이 순수할수록, 진실성과 동기에서 중심이 순수할수록 그곳에서 더 순수한 물이 나온다.”

이 말은 중심이 순수할수록 순수한 하나님의 예언이 주어진다 그 말입니다. 그는 또 “예언사역에서 더 어떻게 자라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예언사역을 자라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나는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형상으로 자라나야 함을 뜻합니다. 보시겠습니까 같은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사역할 때 “내가 이 사람을 예언함으로써 이 사람의 관심을 끌어야지” 혹은 “내가 더 정확하게 알아 맞춤으로써 다른 사역자들보다 더 정확하게 예언하는 것을 알게 해야지.” 이렇게 사람들의 평가와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고자 하는 자세가 여러분 속에 완전히 제거 되지 않는 한, 여러분의 사역은 타락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사역 시간에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좋았을텐데, 기도해준답시고 자꾸 예언해 주려고 하는데 그게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정직성과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그를 향한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할 때에도 사람들은 안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상대방에게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사역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예언이 다른 사람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나 또는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죽는 길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모두가 죽는 길입니다. 그런 일이 제 눈에 보이면 그분에게 얘기할겁니다. 그러기 전에 그러한 것은 버리십시오.

사실, 저도 그런 죄인입니다. 어떤 때 사람들이 오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예언사역자들이 기도 하도록 해가지고 장난이 아닌 것을 한번 보여줘야지” 꼭 그렇게 생각은 안해도 이런 생각이 슬그머니 들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는데, 그런 동기 때문에 많이는 아니더라도 예언사역자들에게 기도 받아 보라고 최소한 한 두 번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합니다. 하나님께 먼저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2.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세우는 것을 거부하는 것

다윗은 두 번이나 자기 자신의 왕관을 가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기회가 바로 손앞에까지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자기 스스로 취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2장 19절에서 말하듯이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원수 갚는 것”이란 말은 반드시 “원수를 치는 것” 뿐만 아니라 “원수를 갚고 우리를 높이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우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경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원칙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6장 10절-11절 “만약에 ...... 손가락하나 대지 않겠노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기 개인적인 유익을 위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세우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중요한 점입니다. 성경에 보면 심지어 예수님도 자기를 스스로 세우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의 책에 보면 요셉이 2년 동안 더 감옥에 있게 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풀려 나갈 때, 요셉은 다음과 같이 부탁했습니다. “당신이 나가거든 나를 왕 앞에 얘기해서 나를 꺼내달라고 얘기해 달라” 이렇게 아직까지도 자기를 스스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 남아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더 훈련시키시느라고 2년을 더 감옥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은 전혀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당신을 위해 호소할 때, 당신의 모든 것을 알 때, 하나님의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일의 사람이 거쳐야 할 두 번째 단계의 테스트입니다. 스스로 세우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맡기신 일에 순종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도하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알리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 같아도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세우는 노력뿐이요, 발버둥뿐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입을 열지 않아도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마디 입을 열지 않았을 때 다른 사람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대변하고 호소하고 나서며 우리에 관한 모든 일을 아시고 계십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 얘기에 의하면 그때가 하나님의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도 보십시오. 2년 동안 더 갇혀 있었는데, 하나님의 때가 되니까 바로가 꿈을 꿨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아무도 해석 못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 나라에 수많은 박수들과 무당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 나름대로 꿈을 해석 못하겠습니까.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 얘기가 의미하는 바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석 했으되 바로의 마음에 그것이 그 꿈의 해석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술맡은 관원장의 추천으로 요셉이 바로 왕 앞에 서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주신 해석이 정확하게 바로의 마음에 “바로 이거다.” 라고 받아들이게 하신 것.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일의 사람이 많이 있는 줄 믿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조화입니다.

내일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생각하기에 “나는 기름부음이 없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오늘날 쓰임 받고 있는 어느 누구보다 더 강한 기름부음이 여러분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폴 케이 목사님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윗의 경우에는 자기가 전혀 기름부음이 없다고 생각할 그 때에도 그는 시편의 반을 썼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더 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하나님께 계속해서 구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아직 무대가 없어요. 물론 교회에서 강단은 있지만, 하나님이 앞으로 세우실 강단이 여러분에게 아직 주워지지 않았다 그 말입니다. 그 사역이 아직 여러분에게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는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고 스스로 세우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되어지게 될 때에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분이 여러분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기름부음을 소홀히 여기시리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다윗에게 부은 기름부음을 소홀히 여기셨다고 생각하세요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었습니다. “나에게 기름 부으셨던 것을 잊어 버리셨나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잊어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눈이 그의 뒤를 좇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로써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손에 여러분을 전적으로 맡기며 하나님에 의해서 빚어지십시오. 세우심을 위해 수고하지 말고 순종하기 위해 수고 하십시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수고하지 말고 그것을 배우십시오.

읽고, 또 읽고, 또 읽어서 되도록이면 암기하고 잊어버리세요.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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