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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영광의 집 (엡 04: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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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시대의 여러 특징을 나타내는 말 중에 하나가 우주 시대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더 높은 우주 공간에 잠겨 있던 신비한 비밀들을 캐내기 시작한 지식적 탐구 영역을 가리켜 이른바 우주 과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주 과학의 더 높은 만세 소리는 사람들이 달나라를 갔다 오는 인공위성의 우주비행 성공과 더불어 극에 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생각할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어떤 요지경 속에 살고 있는 듯한 감정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이른바 인공위성(人工衛星)을 타고 여러 번이나 달나라에 갔다 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착하여 달나라 정복의 표시로 미국인들은 미국의 성조기를,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인들의 깃발을 꽂아 놓고 돌아왔습니다. 이른바 우주 과학의 개가라고 할 만합니다.

저는 인공위성 시대를 보면서 일찍이 신공위성(神工衛星)이란 말을 썼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높고 높은 저 하늘의 영광보좌에서 이 낮고 낮은 세상(지구)에까지 오셔서, 33년을 지구 위에 사시다가 다시 부활하여 하늘로 생환(부활 승천)한 사실을 가리켜 신공위성이라고 불러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달나라에 갔다 오면서 거기에 사람이 갔다 왔다는 표적을 남겨 놓고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세상(지구)에 오셨다가 가시면서 이 세상에 남겨 놓은 위대한 자기 표적이 바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달나라에 남긴 표적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있다면 비이성적인 기계의 작동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가 세상에 오셨던 표적으로 남겨 놓은 교회는 위대한 동력을 가진 생명의 단체가 되어 2,000년이 가깝도록 전세계 인류의 역사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엄청난 생명의 파동과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표적인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생명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산 돌로서 기초(모퉁이의 머릿돌)가 되어(벧전 2:4, 엡 2:20)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마 16:18). 그래서 교회는 사실상 신공위성(神工衛星)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적 산물입니다.

교회는 지금 세상에 한시적(잠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이 세상에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택자 구원 운동의 기능을 다하고 있습니다. 택자 구원 운동이 성취되는 그날에 예수는 다시 오시고, 지상에 자리잡은 교회는 다시 하늘로 옮겨 영원한 천성의 영화로운 교회로 영화할 것입니다. 대단한 비밀입니다. 그러나 만천하에 알려진 공개적인 복음의 비밀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교회를 내 영광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에서 주님은 사도를 통하여 당신의 교회(집)를 어떻게 영화롭게 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 위하여 여러 직분자를 세워서, 그 직분들을 통하여 당신의 집(교회)을 영화롭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Ⅰ. 교회의 직분은 신적인 은사라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4장 7절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χρι)를 주셨습니다(엡 2:8).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은혜란 말은 믿어 구원받은 자에게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주신 각양 선물의 은사(χρισμα)를 가리킵니다(고전 12:4-31).

바울은 구원받은 우리 각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께로부터 주신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도 선물이고,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여러 기능과 직분의 은사들도 거져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본문에 「그가 …주셨다」고 한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 다음 교회 직분의 내용들을 알려 줍니다.

 먼저 사도가 있습니다(엡 4:11).

이는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하고, 그의 사역을 증거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셨습니다(마 10:1-4). 지금 교회 시대에 사도직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래서 사도적 이름과 권위와 이적(계시적 이적) 등은 없습니다. 주께서 처음 교회를 세우실 때 특별한 사람들에게 한정하고 주신 직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상직분이라고 합니다.

 다음 선지자가 있습니다(엡 4:11).

이는 장래 일에 대하여 미리 말하는 은사를 받은 자였습니다. 이 선물은 사도 시대에 주어진 특별한 은사 중에 하나였는데 예컨대 안디옥 교회의 유다와 실라(행 15:32), 빌립의 네 딸(행 21:9) 등이 있습니다. 저들은 종종 사도들과 연명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습니다(엡 2:20, 3:5). 이 직분도 사도직처럼 교회를 세우는데 기초 사역을 한 은사들이었습니다. 나중에 교회가 성장하고 자리를 잡을 때 이 은사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역시 비상 직분이었습니다.

 그 다음 복음 전하는 자가 있습니다(엡 4:11).

이 직분은 일정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한 경우입니다. 예컨대 일곱 집사 중 하나였던 빌립을 전도자라 불렀습니다(행 21:8). 디모데에게도 전도자의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딤후 4:5). 현재의 경우 선교사와 가까운 입장의 은사였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복음 전도자들입니다. 보통 경우에 따라 이 은사는 비상직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은사는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목사와 교사들이 있습니다(엡 4:11).

목사(ποιμν)는 목자라는 뜻으로 양들(교인)을 먹이고 보호하고 양육하는 영적인 면을 나타내는 은사의 이름입니다. 교사(διδσχαλο)는 사실상 목사와 같은 의미인데 목사의 사역 중 한 면은 지목해서 가리키는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말씀은 가르치는(도리)면을 말한 것입니다. 이 두 이름은 내용적으로 한 묶음의 은사입니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직분입니다.

그리고 목회서신에서 나타낸 장로와 집사의 직분입니다(딤전 3:1-13). 이 장로와 집사의 직분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교회사 시대에 상존한 교회의 기본 직분은 목사와 교사로 불리우는 직분과, 장로(감독)와 집사의 직분입니다(행 6:1-6). 그리고 교회 중에 여러 지체로서의 직분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통상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의 직분들은 그 이름과 내용과 성격과 목적이 모두 신적인 산물이고, 영적인 구령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기관들에서 일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조직사회의 직분과 그 이름과 성격과 내용과 목적이 판이하다는 사실입니다. 신적 산물이요, 영적 은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주께서 자기의 집(교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영의 직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적인 신분의 직위를 가지고 일하는 장소가 전혀 아닙니다.

 Ⅱ. 교회 직분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 첫째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온전케 함」(χαταρτιαμ)이란 의학적 의미로 외과의사들이 골절된 수족을 다시 맞추고 어긋난 관절을 다시 제자리에 꿰어 맞추는 경우에 사용된 말입니다.

또 정치적 의미로는 정치적으로 대립된 당파들을 서로 합칠 때 사용된 말입니다. 성경에는 찢어진 그물을 깁는 데 사용되었습니다(막 1:19). 또 부족을 채우는 경우(살전 3:10), 이전에 잘못된 상태를 바로 잡는 경우(갈 6:1)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어떤 잘못된 일이나, 잘못된 사람을 바로 있어야 할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해 준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 직분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은 그 직분자들로 하여금 신자들이 신자답도록 교육하고, 도와주고, 인도하고, 돌보아 주고, 또 길을 잃었을 때 그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오게 해주도록 하기 위함이란 뜻입니다. 말하자면 그릇 행하여 제 갈길로 가버린 양들을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에게로 되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직분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둘째 목적은 봉사의 일을 하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 12절이 또 말하기를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봉사(δικονια)란 실제적 섬김을 가리킵니다. 그 뜻은 하인, 봉사, 집사(διακονο)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신학적 교리나 교회의 규칙을 가르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한 것을 실제적 행동으로 옮기는 직분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육탄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세 번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 12절 마지막 부분에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에베소서 2장 20-22절에 나타난 말씀대로 모퉁이 돌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터 위에 세움을 입어,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산 돌의 역할(벧전 2:5)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직분은 파괴가 아니라, 건설이란 말입니다. 무너뜨림이 아니라 세움이란 말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엡 2:22). 말하자면 하나님의 교회를 굳게 세우기 위하여 직분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교회의 직분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하고, 성숙한 신자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엡 4:13, 15). 교회의 머리요, 몸이 되신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각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의 몸된 교회를 자라가게 하고 세워가게 해야 된다(엡 4:15-16)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딤전 3:15). 큰 집이라고도 하였습니다(딤후 2:20). 그리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였습니다(딤전 3:15).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엡 1:23, 고전 12:27). 뿐아니라 성령의 전이라고 하였습니다(엡 2:21, 고전 3:16, 고후 6:16, 벧전2:5). 벌써 그 이름들이 특이합니다. 영적입니다.

하나님은 이 집에 여러 일꾼들을 세웠습니다. 그것을 비유하기를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과 같다고 하였습니다(딤후 2:20). 그릇 자체의 재료 여하를 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그릇이 언제나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 유용한 그릇이 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딤전 2:21). 천히 쓰이는 그릇이든, 귀히 쓰이는 그릇이든 그 그릇이 주인의 손에 잡혀 주인의 의향에 따라 주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유용하게 쓰임을 받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주께서 교회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목사와 교사, 장로와 집사, 그리고 권사, 주교교사, 구역장, 성가대 등 등의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이름값을 해야 합니다. 그 이름대로 쓰여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각자의 분량대로 직분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의 교회, 하나님의 집을 세움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인 몸이라고 하였습니다(엡 4:4). 성령도 하나라고 하였습니다(엡 4:4). 소망도 하나라고 하였습니다(엡 4:4).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라고 하였습니다(엡 4:5). 하나님도 하나인데 곧 만유의 아버지라 하였습니다(4:6). 그 아버지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각각 다른 직분의 은사들은 결국 출처가 하나요, 진행도 하나요, 마침도 하나입니다. 주신 대로, 받은 대로, 현재의 모습 그대로 주인께 쓰임을 받을 때, 그 결과 교회는 영광스럽게 되고 맙니다.

 저 대영제국의 여왕 빅토리아가 언제인가 여행 중에 있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많은 신하들과 여행하던 도중 갑자기 밀려드는 안개로 인해 그만 길을 잃고 헤매이게 되었습니다. 왕을 보좌하던 많은 신하들이 큰 근심 중에서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들은 우연히 그 곳 지리에 익숙한 한 목동을 만나 무사히 길을 다시 찾게 되고, 무사히 궁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목동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궁으로 돌아온 여왕은 그 소녀에게 사례를 하고 싶어 찾았으나, 이미 목동은 멀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몹시 안타까운 여왕은 신하들을 시켜 백방으로 그 목동의 거처를 찾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마침내 이틀이 지나고서야 그 목동이 사는 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왕은 지체하지 않고 급히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신하를 시켜 소녀에게 보냈습니다.

그 목동 소녀는 왕의 편지를 들고 왔다는 신하의 소리에 놀래고 말았습니다. 그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급히 집에서 뛰어나와 여왕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그 편지를 받아 들었습니다. 여왕의 편지를 받은 소녀는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한낱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여왕이 이렇게 친서까지 보내어 찾아 주었다는 사실 앞에 소녀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소녀는 생각하기를 만약 여왕께서 나른 부르신다면 난 어떻게 하지 나에겐 마땅한 옷도 없고, 짐승의 냄새마저 나는데 어떻게 이 초라한 모습으로… 그 목동 소녀는 순간적으로 이러한 생각들이 스쳐가는 흥분된 마음으로 여왕의 편지를 꺼내어 읽게 되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너무 간단했습니다.

너는 내게로 오라. 지금 오라.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왕이신 주께서 우리에게 내가 나의 집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너는 오라. 내게로 오라. 지금 오라.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 내가 네게 목사와 교사의 직분을 주겠노라. 내가 네게 장로와 집사와 전사의 직분을 주겠노라. 내가 네게 구역장과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의 직분을 주겠노라. 내가 네게 건축위원의 직분을 주겠노라…고 하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겠노라고 하십니다. 목사와 교사, 장로와 집사와 권사 그리고 여러 지체의 직분들! 이것은 하나님의 집을 영화롭게 하는 신적 직분이요, 은사들입니다. 목사가 목사될 때 하나님의 집은 영화롭게 되고 말 것입니다. 장로가 장로될 때, 집사가 집사되고 권사가 권사될 때 하나님의 집은 영화롭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영광의 직분인 것입니다.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살리는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축복의 직분인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4:1-2).-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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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광의 집(10)-제자 삼으라-마태복음 28:16-20

예수는 책 속에 있는 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살아 있는 현존의 인물입니다. 예수는 추억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예수는 결코 역사 속에 사라져 버린 분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역사의 한가운데서, 주(主) 중의 주로, 왕(王) 중의 왕으로 그가 세운 교회의 한가운데 임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고, 그의 몸된 교회를 영화롭게 하고 계십니다. 그가 지금도 개인과 역사의 한가운데 살아계신 확증은, 바로 그가 남긴 최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그 위대한 명령이, 그의 교회 운동을 통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 때문입니다. 아니 그의 이 최후 명령의 진행 때문에 역사가 존속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내집=하나님의 집)의 영광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최후명령, 곧 위대한 명령 앞에 전인격을 동원하기를 원합니다.

 Ⅰ. 모든 권세자의 명령이란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인류속죄 사역을 완성하시고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에게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서의 권세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구속사의 대 전환점에 서 있는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야 왕국의 새 통치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자였습니다. 상천하지의 모든 권세를 말합니다. 하늘은 전 영계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땅은 존재하는 전 피조 영역을 가리킵니다. 하늘은 하늘의 영물인 천군천사들과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는 곳이요, 땅은 미래의 구원을 향해 전진하는 지상의 성도들이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미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를 통하여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고(요 19:30)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후(롬 1:4), 그의 지고하신 권세가 더욱 확고하게 되고 또 행사된다는 의미입니다(빌 2:9-10, 엡 1:21, 골 1:16-20).

 그렇다면 그의 최후 명령은 바로 교회 존재의 전 의미와 목적이요, 영광이 됩니다. 아니 존재하는 전 피조세계와 역사 현존의 의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의 이 최후지상명령은 바로 전 존재의 힘이요, 존재하는 역사의 구심력이 되는 것입니다.

 Ⅱ. 그 명령의 내용은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로 20절 상반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예수와 관계된 제자라는 말은 세 가지 경우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예수를 따르는 자, 좇는 자입니다.

이 경우 헬라어로는 아콜루데오(κολουθεο)라고 합니다. 예컨대 마태복음 4장 20절에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뒤따름을 의미합니다. 또 마가복음 5장 24절에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고 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동반의 경우입니다.

또 마태복음 9장 9절에 예수께서 세관에 있던 마태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하는 경우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9, 22절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경우입니다.

이 말은 특수한 목적을 두고 제자를 부르실 때 사용했는가 하면, 일반 군중들이 길에서 예수를 좇는 경우에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소경이 눈뜨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경우나, 죄인들이 예수를 따르는 경우에도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의미하고,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는 새 방향과 목적을 두고 사용된 경우들입니다. 이런 경우 예수를 따름은 ① 거처나(고향), 친척이나, 세상 직업을 버려 두고 떠나는 값을 지불함이 있었습니다. ② 뿐만 아니라 집과 전토와 부모와 친구, 형제와 이웃과 세상의 영화를 내 버려야 되는 희생도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③ 그것은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따름을 의미하였습니다. ④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예수를 따름(좇음)은 그들에게 무상한 기쁨이요, 축복이요, 영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본문의 경우인 제자(μαθητ)입니다.

이는 생도로서의 제자를 의미합니다. 배우다, 익히다(고전 14:35), 알게 되다(행 23:27)라는 뜻인데, 이것은 어떤 이론적인 교훈보다 실제적 경험이나 실천을 통해서 깨우치다(히 5:8)라는 뜻인 만다노(μανθνω)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그 스승의 훈계나 교훈이나 주입식 교훈에서 뿐아니라, 그 스승의 삶과 행실에서 직접 몸소 체험되어지는 구체적 배움, 실제적 배움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바로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경우에 사용된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가르치는 단계의 제자(μαθτευω)입니다.

훈련시키다, 학습시키다라는 뜻인데, 이는 학습시켜 성도(제자)로서 명부에 올린 자들을 가리킵니다. 「천국의 제자」(마 13:52)라고 하였고, 아리마대 요셉을 말할 때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마 27:57). 사도행전 14장 21절에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라고 한 바울의 선교 사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좇는 단계의 제자에서 배우는 단계의 제자를 거쳐 가르치는 단계가 된 제자를 뜻합니다.

 중대한 예수의 최후 명령의 내용은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삼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더 확실히 말하면 구원인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을 좇고,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만들라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삼기 위한 세 가지 요건을 알려 주었습니다.

 첫 번째 요건은 가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고 하였습니다. 명령형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지존무상하신 예수의 명령입니다. 그의 제자들 곧 「너희」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가야 할 영역은 모든 족속이 사는 곳들입니다. 이는 천국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모든 민족(마 24:14, 25:32)을 가리킵니다. 혹은 온 천하 만민입니다(막 16:15).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들입니다(계 7:9). 말하자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입니다(행 1:8).

다시 말하면 전세계입니다. 그래서 18세기 저 영국의 유명한 전도자 요한 웨슬레는 온 세계가 나의 교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주께로부터 세계를 받은 것입니다. 전세계로 가야 합니다. 육로로, 항로로, 해로로 가야 합니다. 때를 가리지 않고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선교 운동입니다.

 두 번째 요건은 반드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명령형입니다. 필연적인 명령형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인치는 행위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사 그를 하나님의 소유로 세상에서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자에게 그 표징으로 물세례를 주어 주님 교회(공동체)의 일원(member)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를 세상에서 구별시키는 표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시키는 표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행사하게 하는 표가 됩니다.

 세 번째 요건은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중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가르치다(διδσκω)라는 말은 전투 임무 수행을 위하여 군인에게 전투 지식(이론)을 주입시킬 뿐 아니라, 훌륭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숙련되게 훈련시키는 실제적 교육을 말합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천국 복음)입니다(막 1:15, 16:15, 마 4:23).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기록된 계시로 나타난 성경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영생)을 얻게 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5:39, 20:31).

 그 다음 「지키게 하라」(τηρω)고 하였습니다. 이는 천국 복음의 파수와(행 12:4), 보존(요 2:10), 붙듬(엡 4:3)을 뜻하는 것으로 앞에서 나온 가르침에 대한 실행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참된 교회를 정의하기를 진정한 말씀을 전파하고(가르쳐 지키게 하고; 마 28:20), 거룩한 성례(세례와 성찬; 마 28:19)를 집행하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개혁주의 교회들은 이 두 가지 사명을 예수님의 지상 명령, 최후 선언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최후 명령은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교회는 모든 족속에게 가야 하고, 세례를 주어 인을 쳐야 하고,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Ⅲ. 그 명령에는 예수의 최후 보장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하반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γ μεθ μν εμι πσα τ μρα ). 여기에 예수님 자신만이 전용하시는 강조 용법 에고 …에이미(γ …εμι)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 자신만이, 필연적으로, 꼭 그렇게 하겠다는 절대적 의지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보장입니다. 그 보장은 주님 자신이 모든 족속을 예수의 제자로 삼기 위하여 선교하는 교회나 사람들에게 함께 해주시겠다는 보장입니다. 바로 임마누엘의 약속이 아닌가!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임마누엘은 33년간 화육 강세로 나타났습니다.

 지금은 그가 약속한 보혜사 성령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요 14:16, 15:26, 16:7). 그 보혜사 성령님이 교회 중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가 교회 중에 함께 하시는가 교회는 모든 족속에게 가서 예수의 최후 명령인 제자 삼는 사명을 받은 단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중에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께서 기록한 주의 말씀(성경)을 따라 제자 사명에 충실한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임마누엘의 보장은 교회가 받은 세계 선교 사명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주님이 항상 함께 하는 교회요, 선교가 없는 교회는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이 보장은 세상 끝날까지입니다. 바로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마지막 순간까지입니다. 그때는 세상 끝이 오고마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4:14). 세상을 향한 예수의 마음은 그 이상 계속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의 일이 끝난 그 시간은 세상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도 이웃에게 주님을 믿으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다시 중대한 말씀을 반복합니다. 주의 복음 운동을 하는 교회에는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유는, 그 교회는 주님의 최후 명령을 준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 운동이 끝날 때까지 주님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 복음 운동이 끝나는 날에는 세상을 향한 주님의 관심도 끝나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 끝날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끝날은 복음 운동의 끝날이요, 또 세상의 끝날은 곧 심판의 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하나님의 집)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단체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상의 교회는 모든 권세의 원천이신 예수의 최후 명령을 받고 있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 명령의 내용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브라함의 족속들을 제자삼는 사명입니다. 더 확실히 말하면 구령운동 복음운동을 사명으로 받은 집입니다. 교회는 복음의 집입니다.

이 사명 수행을 위하여 교회는 모든 족속에게로 가야 하고, 가서 세례를 주어 인을 쳐서 구별시키고, 천국 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 수행을 감당하는 교회에는 주님 자신이 친히 임마누엘 해주심으로 그 교회를 영화롭게 해준신다고 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예수의 최후 명령을 받은 교회들이 2000년 기독교 역사를 창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빛냈습니다. 다가오는 21세기의 미래에도 이러한 교회들만이 살아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불길 같은 미래의 영광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예수께서 최후 명령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신 이 갈릴리 산상은 지상의 교회가 세계를 향하여 달려가는 점화 지점이 되었습니다. 지상의 교회가 영원을 향하여 전진하는 새 출발 지점이 되었습니다. 아니 세상에서의 주님의 교회가 영화롭게 되는 새로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집을 제자삼는 집으로 영화롭게 하리라! 복음의 집으로, 복음 전파의 집으로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입니다.-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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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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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 영광의 집(11)-천상의 승리 교회-요한계시록 21장 1-5절

Ⅰ.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또 내가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끝날에 대한 엄청난 진리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대단하고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지식은 결코 어떤 과학이나 정치나 문화나 법학, 의학, 천문학, 지리학, 경제학, 사회학, 생물학… 등등의 부분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본질적인 지식이요, 근원적인 지식이요, 잠정적이거나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지식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 그 상황을 따라 변하는 유동적인 지식이 아니라 불변부동(不變不動)의 지식입니다. 말하자면 상대적인 지식이 아니라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바울의 영감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이 세상 초등학문이 아닌 고상한 지식입니다. 인간 자신의 소산인 자율주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타율주의 지식입니다.

 그 지식은 존재 자체에 관한 지식입니다. 말하자면 존재의 근원을 아는 지식입니다. 존재하는 우주의 창조와 통치와 섭리에 관한 지식이요, 사람 자체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우주와 역사의 마지막(끝날)에 관한 종말의 지식입니다.

더욱이 인생에 관한 구원의 지식입니다. 인생은 원래 영생할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는데, 죄로 인하여 타락하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었으나,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지식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자는 교회라고 하는 특별한 하나님의 집에서 성화에 이르는 양육을 받다가, 죽음에 이를 때 그 영혼이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육신은 무덤에 잠자고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재림의 날에 무덤에서 부활하여, 영과 육이 새로운 영생체(부활체)를 받아 불사(不死)의 몸으로 새 하늘 새 땅에서 영원히 산다는 영생의 진리 지식입니다.

그리고 존재하는 이 세상과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을 불러모으는 구원사 현장의 무대(선교 무대)로 사용하시다가, 그 추수 작업이 끝나면 타작마당(세상과 역사)을 정돈하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택자구원 역사가 끝나면, 이 세상과 세상의 역사는 그 존재 의미나 목적이 상실되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어진 본문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영원히 진동하지 않는 나라의 출현을 위하여, 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한번 진동하고마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히 12:26-29).

그렇다면 지상에 살아가는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은 여기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인생의 영원한 본향이 아니고 외국인이요, 나그네요, 행인이요, 거류자임을 알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 세상에 살 동안 주께서 세워 주신 교회, 곧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현세적인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현세적 표현인 지상의 교회를 가견적 교회(可見的 敎會), 혹은 전투적 교회(戰鬪的 敎會)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이를 미래적 교회를 천상 교회(天上 敎會) 혹은 승리적 교회, 영화로운 교회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지식 곧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세상에서 천국으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마침내 영화롭게 되고 말 것이라고 하는 본질적이고, 궁극적이고, 영원한 지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 오직 성경에서만 받는 특별한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무대로 사용되는 곳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끝이 나면 세상과 세상의 역사는 끝날이 되고 말 것이라고, 예수님은 그 종말의 한날을 예언하였습니다(마 24:1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시는 집(교회)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끝남과 함께 성취를 본다는 말이 아닌가!

Ⅱ. 새 하늘, 새 땅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도래할 인류의 영원한 미래적 황금 왕도(王都)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1.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였습니다(계 21:2).

이 말은 이 세상 큰 바벨론성(계 14:8, 16:19, 17:5, 18:10, 19)에 대조해서 쓴 말입니다. 불결하고 부정한 이 세상 죄악의 왕궁에 비교해 무죄와 성결의 나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상에 자리잡은 예루살렘성에 비교해 천상의 새 예루살렘이라 불렀습니다.

 2. 출처가 하늘이라고 하였습니다(계 21:2).

기독교가 말하는 실유의 천국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나, 인간 주관의 공상적 산물이나, 아니면 우화적, 우연적, 미신적 산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의 도래는 예수님의 약속이요(요 14:1-3), 성령의 보증이요(고후 5:5), 우리 신자들의 확실한 소망의 실체였습니다(히 11:9, 10).

 3. 새 생활의 영역이라고 하였습니다(계 21:1, 2).

새 하늘, 새 땅이란 실재하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였습니다(요 14:1, 2). 새 장막, 새 사람의 거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온전히 새 사람(불사의 몸), 새 교제, 새 통치, 새 경험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만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새롭게 될 장소입니다(계 21:5).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입니다(고후 5:17).

 4. 처음 것들이 다 없어져 버린 세계입니다(계 21:4).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하였습니다. 1) 처음 하늘, 처음 땅, 처음 바다가 가 버렸다고 하였습니다(계 21:1).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장소요, 또 구속사의 무대로서 그 기능이 끝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2) 사망이 없어져 버렸다고 하였습니다(계 21:4).

사망은 인간 본래의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은 아담을 영생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인류는 영생할 피조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사망은 그 본연(本然)이 아니고 죄의 삯인 이변입니다. 사망은 멸망받을 인류의 원수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26). 천국은 이 원수 사망이 없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곳이 아닌가! 3)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이 없어져 버렸다고 하였습니다(계 21:4).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은 욕구의 좌절에서 오는 불안과 고통과 절망의 표현입니다(사 28:8, 35:10, 51:11). 그것은 인류가 죄 때문에 만난 비극들이었습니다.

4) 아픈 것이 없어져 버렸다고 하였습니다(계 21:4).

아픈 것은 육신의 질병들입니다. 또한 동시에 영적이요 정신적인 것들입니다. 그것은 쑤시고 찌르는 성격의 것들입니다. 그 아픔의 표현이 눈물과 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5) 성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계 21:22).

새 하늘, 새 땅에는 어떤 공간적인 모임의 장소인 성전, 교회당이 필요없습니다. 그 이유는 새 하늘 새 땅 그 자체 전부가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고 거룩하고 영원한 성전 그 자체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자체요, 또 그를 모신 불사의 몸, 영광의 몸을 받은 성도들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6) 해와 달의 비췸이 쓸데가 없어져 버렸다고 하였습니다(계 21:23).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가, 어린 양의 영광 그 자체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사람을 상하게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계 7:16). 역사상의 수많은 무법의 광란자들과 폭군들이 이 태양빛과 달빛 아래서 역사를 비극으로 점철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영광의 빛 앞에서는 그러한 부조리를 구경조차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7) 밤이 없다고 하였습니다(계 21:25).

그래서 성문이 닫히지 않고 항상 개방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밤은 절망과 저주와 혼돈과 무질서와 불신앙과 반역과 불안과 공포의 상징입니다. 아니 그것은 깊은 죄악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다」(계 22:5)고 하였습니다.

8) 저주가 없어져 버렸다고 하였습니다(계 22:3).

저주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저주는 범죄한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저주는 무서운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그 저주의 표징은 죄요, 사망입니다. 영원한 괴로움이요, 부끄러움이요, 어두움이요, 고통입니다. 온갖 비극적 요소의 총체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처음 것입니다.

 5. 영광의 왕도(王都)라고 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색 중에 또 하나는 하나님의 자기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계 21:10-11). 그 하나님의 영광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어린 양이 저들의 등이 되고(계 21:23), 주 하나님이 저들에게 비취심으로(계 22:5) 그야말로 빛의 왕도(王都), 빛의 궁전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6. 완전무결한 물리성과 초물리성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계 21:9-21).

그 성의 크기, 성곽, 그 성곽의 열두 기초석, 열두 기초석에 새겨진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의 12사도의 이름 그리고 밤낮없이 개방되어 있는 열두 진주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열두 진주문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들을 새겨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상징적 표현들은, 1) 천상의 승리 교회는 신구약성경(선지자와 사도)의 예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 천상의 승리 교회는 신구약시대에 구원받은 성도들만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 천상의 승리 교회는 그 조직과 구성, 질서가 너무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 천상의 승리 교회는 완전 물리적 세계인 동시에 또한 초물리적 세계임을 보여줍니다. 예컨대 정금 같은 유리바다, 햇빛과 달빛이 쓸데 없음, 성곽의 기초, 문, 성곽, 길 등의 표시가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 택자들의 영원한 안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 뿐만 아니라 그 천국의 통일성(구조상), 거룩성(내용상), 세계성(범위상), 사도성(성질상), 영원성(본질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7. 영화롭고 거룩한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은 절대 순결, 곧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된 것 같은 곳이라고 하였습니다(계 21:2). 또한 절대 성결로 단장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의 정금, 열두 진주문, 열두 성곽, 열두 보석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절대하신 거룩의 속성들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완전성, 영원성, 단순성, 하나님의 지혜, 지식, 선, 사랑, 자비, 은총, 긍휼, 거룩, 관용, 진실, 권능 등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부정과 불의와 불법과 부조리가 용납될 수 없는 세계임을 알려 줍니다.

 8. 승자들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계 21:24).

요한계시록 21장 24절에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26절에는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지상에서 여러 시대, 여러 격전지들에서 예수 때문에 믿음의 선한 격전을 감행한 용사들입니다. 온갖 격전지에서 쟁취한 승리의 전리품들을 가지고, 열린 열두 진주문을 통하여 주께 바치려고 입성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천국은 승자들의 세계입니다(계 2, 3장, 히 11장). 저들이 주께 드리는 모든 승리의 전리품들은 그 어느 하나라도 자기 이름과 공로로 얻었다던가, 아니면 그 승리들을 도둑질하여 가지고 온 것은 결코 없었습니다.

 9. 영원한 낙원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계 22:1-5).

새 하늘 새 땅에는,1)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계 22:1).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강의 수원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라고 하였습니다. 그 강은 길 가운데로 흐르는데 이것은 영생과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2) 강 좌우편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계 22:2).

생명나무란 영생을 주는 나무라는 의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죄로 인하여 이 나무를 잃어버렸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얻게 됨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승자들에게 주는 상급이기도 합니다(계 2:7). 이 나무는 열두 가지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케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3) 축복만이 영속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계 22:3).

다시는 저주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주의 영속은 지옥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비유하신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는 부자가 있던 곳입니다(눅 16:24).

4)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계 22:3).

보좌란 왕의 좌석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 예수의 영원한 새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닌가! 5) 4중의 축복을 누리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계 22:3, 4).

곧 ① 영원한 예배, ② 항상 하나님과 주님의 얼굴을 친히 대면하는 일 ③ 그의 이름이 저희 이마에서 빛나는 일 ④ 주와 더불어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금년 첫 주간부터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사60:7)는 메시지를 지금까지 계속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계속된 메시지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지상에 세우신 당신의 교회(집)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지상의 역사를 존속시키심은, 그가 세우신 교회(하나님의 집)를 통하여 당신의 택한 백성을 불러 구원하시는 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교회)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당신이 구원하기로 작정된 사람을 예수에게로 불러 그를 믿게 하고, 성화시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도록 하신다는 것이 그 확실한 내용입니다.

결국 교회의 영광은 지상의 전투 교회에서 천상의 승리 교회로 옮겨질 때 그 성취를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 천상 교회가 이룩될 때 여기에서의 창검이 승리의 종려나무로 바뀌어지고, 싸움의 함성들이 승리의 노래로 변하고, 세상에서 피묻은 십자가는 면류관으로 대치된다는 말입니다. 그때 만유의 회복, 만유의 영광, 만유의 자유가 다시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여기 세상 고난의 현장에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를 따라가는 우리에게 새 하늘, 새 땅을 쳐다보게 하시는 소망의 약속이 아닌가!-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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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우선순위-먼저와 그 후에-열왕기상 17장 1-16절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아마 절망의 현실 가운데서도 낙심치 말고 소망의 미래를 가지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Ⅰ. 죽음에 이르는 경제 재앙

열왕기상 17장 12절에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어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막다른 생존 골목에 가버린 한 여인의 하소연입니다. 인간 생존의 마지막을 알리는 고별의 소리 같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살던 그 시대가 만난 경제적 위기의 위험수위가 어느 정도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는 저 구약의 이스라엘 왕 아합과 이세벨의 통치 어간입니다. 그가 통치하던 전 이스라엘은 무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큰 한재의 재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약 5:17). 그 결과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왕상 18:2).

 그래서 온 지면은 갈라지고 수원(水原)은 말라 버렸습니다. 사람과 짐승들은 식물을 얻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경제공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선지자 디셉 사람 엘리야의 예언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 예언은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한 사실입니다(왕상 17:1).

요한계시록 11장 6절에는 이 사실을 더 설명하기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이 엘리야와 아합 시대에 만난 경제적 재앙을 언급하기를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눅 4:25).

 그러한 경제 재앙의 원인은 아합과 이세벨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8장 18절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바알들을 좇았음이라」고, 엘리야는 아합 앞에서 그와 그 백성이 만난 온 땅의 큰 흉년, 사마리아에 임한 큰 기근의 원인을 규명하여 주었습니다. 통치자의 불신앙과 우상숭배와 선지자 박해의 죗값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만난 경제적 재앙의 위기는 아합이 하나님의 명령을 버려 우상숭배한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엘리야는 다시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라고 하였습니다(왕상 19:10).

 하나님은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내가 너희의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로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으로 놋과 같게 하리니 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레 26:19, 20)고 하신 하나님의 진노에 해당된 것입니다.

 신명기 11장 13-17절 중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주시는 땅에 들어가 살면서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에 청종할 때는 그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 내려 줄 것이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넉넉히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축을 위하여 들판에는 푸른 풀이 자랄 것이고, 사람들은 배부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마음에 미혹을 받아 다른 신들을 섬기며 거기에 절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며 온 땅으로 소산을 잃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서 멸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아합과 이세벨과 그 백성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는 경우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명기 28장 23절에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서 필경 너를 멸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라고 규정함으로, 그 시대가 만난 총체적 경제난국의 원인을 규명했습니다. 여기에 백성들의 불신앙이 합세하기도 하였습니다(왕상 18:21). 그 결과 하늘이 놋이 되고, 땅이 철이 되고, 티끌과 모래들로 온 백성이 죽음에 이르는 경제적 위기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사르밧의 한 과부도 죽음에 이르는 막다른 골목까지 오고 말았다고 하였습니다(왕상 17:12). 그는 엘리야 앞에서 조금 후에는 자신과 그 아들이 죽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Ⅱ. 살 수 있는 축복의 법칙은 먼저와 그 후에입니다.

 열왕기상 17장 13, 14절에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에 이른 경제적 위기 중에 당신의 종 엘리야와 진리의 선지자들의 생존을 주장했습니다. 7,000명의 선지자들을 분산시켜 은밀한 섭리 중에 살게 하였습니다. 예컨대 100명의 선지자를 50명씩 둘로 나누어 굴속에서 궁내대신 오바댜의 도움을 받게 하는 방법과 같은 것이었습니다(왕상 18:1-4). 또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 중에 또 다른 방법으로 저들의 생명을 보호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특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명하여 그릿시냇가로 보내고, 또 까마귀를 명하여 엘리야에게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공급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가늘게 흐르고 있는 그 시내의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왕상 17:3-6).

그러나 얼마 후에 다시 시내는 말랐고, 까마귀의 공급도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고, 그곳에 사는 한 과부에게 명하여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였습니다(왕상 17:9). 하나님께서 전권(全權)으로 사용하시는 비상 수단의 역사(役事)입니다.

 얼마 후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엘리야는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엘리야가 성문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지시하신 그녀가 떡을 굽기 위하여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녀에게 접근하면서 그릇의 물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왕상 17:10). 그녀가 물을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는 다시 그녀를 불러 네 손으로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청에 청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왕상 17:11).

 그때 그녀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어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왕상 17:12).

갈 데까지 가버린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 모자에게 확실한 미래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배가 고파서 죽을 것이라는 절망뿐이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캄캄한 미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로 불안과 절망과 공포의 미래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암담한 미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① 두려워 말라고 하였습니다. ② 당신의 말대로 나무를 주워 떡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③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로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④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하였습니다(왕상 17:13). ⑤ 그리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하는 생존의 미래를 약속하였습니다. 가루도, 기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왕상 17:14).

 우리는 지금 영감의 사람 엘리야의 입에서 나온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의 말에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대한 비결이 무엇인가 바로 「먼저」와 「그 후에」라는 생존의 법칙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존의 우선순위를 알려준 것입니다. 먼저는 엘리야를 위하고, 그 후에는 너와 네 아들이라고 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생존의 법칙이요, 축복의 법칙이요, 순리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그 모자에게 들려 온 생존의 소식, 아니 구원의 소식, 다시 말하면 복음이었습니다.

먼저 할 것과, 다음에 할 것을 바르게 추구함이 사는 법칙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위기에 놓여 있는 사르밧의 딸에게 주신 생존의 법칙입니다.

「먼저」와 「그 후에」라는 영감의 표현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싣고 오는가

1.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그 확실한 이유는 사람보다 하나님이 먼저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있기 전에 영존하신 분입니다(출 3:12-14). 아니 하나님은 사람을 있게 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이 사람의 생사화복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분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통치의 주이십니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강(江)도, 동물도, 식물도, 온갖 생명의 자원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하나님)께로서 내려온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사람된 생명이 빵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2. 먼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지금 그녀에게 주신 엘리야의 명령은 결코 엘리야 자신의 말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사람이었습니다(왕상 17:2).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을 받고 그릿 시냇가로 갔습니다(왕상 17:5).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하여 까마귀를 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입니다. 그는 다시 사르밧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을 받고(왕상 17:8), 그녀에게 온 것입니다. 이미 그녀도 하나님의 섭리적 명령을 받고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왕상 17:9).

열왕기상 17장 14절에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녀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다는 것은, 바로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떡(물질)도 있고, 생명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 세계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인 가라사대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창 1:). 먼저 가라사대(말씀)가 있었고, 그 후에 모든 만물(물질)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3. 먼저 믿음과 순종을 행동화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구체적인 방법은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곧 그 말씀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 15, 16절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4. 목적과 수단의 법칙을 알려주는 뜻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존재하는 수단적 피조물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지음 받은 존재적 피조물임을 알려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최우선 추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목적 성취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먼저는 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이요, 후에는 수단으로서의 인생에게 더함들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시대를 맞아, 정말 야단들입니다. 12,000$의 소득 시대가 그 반인 6,000$ 시대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고이자(高利子), 저소득 시대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 정말 고통의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나 버린 가정 파탄과 사회질서들의 혼란은 걷잡을 수가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6,000$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지구에는 우리 경제와 비교가 안되는 우리 경제보다 더한 고통 속에 있는 나라들이 수없이 있습니다.

성경은 「두려워 말라」(왕상 17:13)고 하십니다. 먼저 할 것과 그 후에 할 것(나중)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라, 생존의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법칙이요, 생존의 법칙이요, 축복의 법칙입니다. 바로, 사는 길입니다.

사르밧의 여자는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b)고 하였습니다. 그의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는 것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먼저 사는 것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그 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뒤죽박죽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포자기하거나 낙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입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인간이 만난 최악의 지대는 하나님의 최선의 지대입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고,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며,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어지는 새 축복 경험의 시기입니다. 인간이 인간 되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순간입니다.

여기에서 한국과 한국 교회가 만난 I.M.F. 시대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먼저 하나님의 말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과 순종입니다. 그 다음에(그 후에) 나를 배치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 그것을 위하여 그 후에 내가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놀라운 축복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1950년에 만난 6. 25 동란의 비극은 전 국토를 초토화 해 버렸습니다. 유물론적 공산주의 침략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이 나라 전국민이 경험했던 아픔들이었습니다. 비극을 맞지 않은 가정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전쟁에 남편을 잃고, 자녀를 잃고, 가정을 잃고, 재산을 잃는 비극을 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새로운 축복의 역사를 나타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회개와 전도와 함께 일어난 교회 개척 운동이었습니다. 6. 25 사변과 함께 이 나라 전지역에 순교자가 생기고, 교회 운동이 불같이 일어났던 축복의 경험입니다. 피난의 여로마다 교인들의 모임과 기도와 찬송과 예배와 감사의 연보가 넘쳤습니다. 저들은 죽음의 고난 속에서 먼저 할 것과 그 다음에(그 후에) 할 것을 체험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고, 먼저 예배드리고, 먼저 기도하고, 먼저 회개하고, 먼저 전도하고, 먼저 교회일 하고, 먼저 그 일을 위하여 연보하고, 그 후에 인간의 일들이 수단으로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대구나 부산의 모든 시장경제는 피난 왔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주장()될 만큼 되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 그것은 먼저 하나님, 그 후에 사람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I.M.F 시대를 축복의 계기로 승화시키는 결정적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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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미로(未路) 아가서 7장 10-13절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은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행복의 노다지입니다. 그 어떤 글이나, 그림으로나, 소리나, 말이나, 행동으로 그 사랑의 내용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중에 하나가 사랑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말이 더 매력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갖 좋은 꿈들을 심어 줍니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갖 축복과 용서와 약속들을 심어 줍니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갖 시와, 산문들과, 노래들을 심어 줍니다. 우리에게 들려 오는 세계적인 명곡과 명작들 그리고 명시들과 예술들은 예외없이 위대한 사랑의 영감의 산물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신령한 시와 노래들로 서로 화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노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노래의 보고(寶庫)가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자기 사랑의 최대 표현이요, 하나님 자기 사랑의 극치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가리켜 구약에는 아하바()라 일컬었는데, 이 말이 신약에는 아가페(γπη)로 불려졌습니다. 신약성경 중에 위대한 사랑의 장(章)이 고린도전서 13장이라면, 구약에는 바로 솔로몬의 아가(아 1:1) 곧, 노래 중의 노래입니다.

 이 위대한 사랑찬가인 아가서는 꽃이 피는 봄날에 엮어졌습니다. 이 노래 속에 숨어 있는 풍부한 비유들은 동양적인 색채가 짙은 것들입니다. 그 속에 나타나고 있는 자연, 공원, 목장, 포도원, 양의 무리들 그리고 기화요초(琪花瑤草)들은 이 사랑노래의 정서를 멋있게 북돋아주고 있습니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솔로몬과, 그의 짝인 술람미 여인 그리고 예루살렘 여자들과, 술람미 여인의 고향 어미의 아들들이 나옵니다.

 이 책의 영감의 목적은 틀림없이 장차 나타나실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와 관계를 맺은 신부인 그리스도인과의 사랑 관계를 나타내는 예표론적 노래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짝인 술람미 여인은 신약의 성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신랑 솔로몬이 신부가 된 술람미 여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다음에, 나타난 술람미 여인의 사랑 화답입니다. 그 화답 내용의 중심은 ‘함께하는 사랑의 미로’입니다.

당신의 것이 된 나와 함께 들로 나가가면 거기에 있는 포도동산에서 내가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주겠다고 하는(아 7:10-13), 사랑의 미래를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말하자면 ‘함께하는 사랑의 미로(未路)’입니다.

 Ⅰ. 주(主) 안에 함께 된 나는,

아가서 7장 10절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술람미 여인이 자신의 현재 상태를 표현하며 자기 신분의 소속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술람미 여인 자신은 혼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미 솔로몬에게 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고백을 이미 오래 전부터 해왔습니다(아 2:16, 6:3). 그는 이미 솔로몬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행복의 고백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교회)은 예수의 사람이요, 예수에게 소속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버린 자들입니다(롬 14:8).

그녀는 솔로몬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라고 함으로 위대한 사랑의 입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술람미 여인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여기에서 자기 존재의 보람을 느낀 것입니다.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된 우리 모두가 함께 감지하는 예수 사랑 체험의 행복입니다.

 Ⅱ. 함께 주의 포도동산으로 가서

이제 술람미의 여인은 솔로몬에게 사랑의 야유(野遊;들놀이)를 청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아 7:11-12a)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전에는 신랑에게 끌려 다녔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찾아오고, 부르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술람미 여인편에서 신랑에게 동행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고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함께)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자고 제의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아마 궁실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동네는 옛날 그녀가 살고 있던 수넴의 농촌 마을을 두고 한 말인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그녀가 돌보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아 1:6).

 그녀는 들녘에 있는 포도원의 봄소식을 알고 싶었습니다. 포도원에 움이 솟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꽃술이 퍼진 웃음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석류꽃이 피어 있는 웃음을 보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이 풍성한 들녘의 포도원으로 사랑의 야유(野遊)를 떠나자고 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산, 움직이는 동산, 성장의 동산, 생명의 동산, 혼이 넘치는 동산으로 함께 나가보자는 사랑의 미로(未路)를 제의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들녘 동네 가운데 자리잡은 포도동산은 이 세상에 자리잡은 주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에 예외없이 포도동산은 이스라엘을 상징했고, 주님의 교회를 상징했습니다.

중대한 내용은 그 포도동산이 살아 있는 동산인가, 죽은 동산인가에 있습니다. 포도원에 포도움이 돋았는가 꽃술이 퍼졌는가 석류꽃이 피어 있는가 함입니다. 말하자면 부활 생명의 동산인가 봄동산인가 향기가 있는 동산인가 벌과 나비과 모여드는 동산인가

말하자면 생혼(生魂)이 넘치는 동산인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가 이루어지는 교회인가 깨어 기도하고 있는 교회인가 선한 일에 열심하는 교회인가 전도와 구제와 선교로 구원받을 무리들이 날마다 움처럼, 꽃술처럼 피어나고 모여들고 있는가

술람미 여인이 제의한 사랑의 미로(未路)는 결코 불확실하거나, 불분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제의한 사랑 여로의 목적지가 확실합니다. 들녘의 동리 그리고 그 곳에 있는 포도동산이었습니다. 그곳은 죽은 동산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동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이 넘치는 동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장을 볼 수 있는 동산이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잠잠히 말이 없는 싸늘한 시체들의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움직임과 창조와 생산이 넘치는 동산이 저들이 떠나야 할 사랑의 미로(未路)라고 하였습니다.

 Ⅲ. 함께 사랑을 나누자

아가서 7장 12절 하반절에서 13절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사랑 성장은 이제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 있음을 봅니다. 그녀는 들녘 동네 가운데 있는 포도원에서 ‘자기 사랑’을 솔로몬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서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거기 포도동산, 곧 생명의 봄이 완연해져버린 곳에서 자기 사랑을 솔로몬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거기는 사랑의 심볼(symbol)인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있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티 루터는 이것은 ‘사랑의 사과’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화란어도 이 번역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들이 유숙하는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의 묵은 것과 새것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위하여 쌓아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사랑에는 모든 것이 함께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움돋은 포도나무, 퍼진 꽃술, 피어버린 석류꽃들, 향기를 토하는 합환채, 풍족하게 예비된 여러 맛난 과실들…. 거기서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랑의 성장입니다. 이제는 신부를 취한 신랑이 아니라 신랑을 취한 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부에게 드리는 신랑이 아니라, 신랑에게 드리는 신부로 성장하였습니다. 전에는 받으려는 처녀, 받으려고 애쓰는 처녀였으나, 이제는 신랑에게 드리는 신부, 바치는 신부로 변한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과 함께 사랑을 나눌 들녘 가운데 동네 그리고 포도원! 그것은 그녀가 어미의 아들들의 포도원을 연상하고 한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들녘 가운데 있는 동네의 어느 집 그리고 포도원은 사실상 솔로몬의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은 그 어느 하나라도 솔로몬에게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솔로몬에게 받은 그것으로 솔로몬을 섬기고 사랑한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주께 드릴 수 있는 온갖 사랑의 고백은, 본래 내 것이 아니고 모두가 주께 받은 것으로 드리는 것을 알려 줍니다. 주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온갖 생명의 은총들을 가지고,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몰랐습니다. 미움밖에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를 통하여 사랑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요일 4:8-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들녘, 동리 가운데 있는 포도동산! 그곳은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이 사랑을 함께 누릴 미로(未路)였습니다. 그곳은 쓸쓸한 사막이 아니라 화창한 봄날의 동산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죽어 버리고 덮여 버린 사막이 아니라, 모든 것이 움돋고 꽃피는 부활의 동산이었습니다. 사랑의 심볼인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각종 묵은 과실, 새 과실이 준비되어 사랑의 흥을 북돋아주는 동산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을 받은 그녀는 이곳으로 사랑의 여행을 떠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미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의 미로(未路)를 내다 본 것이 아닌가

사랑하는 경향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들녘 동리 가운데 포도동산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지금 그 동산의 아름다움의 마무리 작업으로 한창 분주합니다.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학교법인 경향학원의 동산입니다. 주님은 거기에서 신령한 포도동산을 우리에게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거기에는 우리가 주께 드린 사랑 고백의 결과로, 아름다운 새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만천여 평에 가까운 큰 공간입니다. 넓고 넓은 주차공간이 지하 2층으로 완비되어 성전으로 직결되고 있습니다. 400여 평에 이르는 최신 체육 공간이 완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제1, 2, 3성전의 공간이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500여 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식탁 공간과 아래층까지 햇빛이 들어가는 100여 평의 선컨(sunken) 공간과 또다른 작은 선컨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교육기관들과 집무실(사역실)들이 완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학원내 경복여자고등학교와 경복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와 새 예배당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학교의 큰운동장을 중심으로 새롭게 설계되어 꾸며진 새공간의 정원들에는 벌써 우리 앞에 봄을 싣고 왔습니다. 새성전의 도로편에는 50미터가 넘는 십자가의 높은 탑이 경향의 깃발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새 포도동산은 최고도의 설계와 건축공학의 산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교회사적인 건물은 확실히 주께 받은 것으로 드린 여러분의 사랑고백의 결과입니다. 바로 이곳이 오늘 서울이라고 하는 들녘 가운데, 강서라고 하는 동리에 세운 경향의 포도원, 아니 주님의 포도원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그 길, 그곳으로 떠나려고 합니다. 정말 멋진 사랑의 미로(未路)가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거기 경향의 새동산에서 “주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사랑의 고백을 하려 합니다. 우리 경향인 모두는 거기서, 우리에게 있는 사랑을 주께 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이 포도나무의 움이 되고, 꽃술이 되며, 피어난 석류꽃이 되고, 합환채가 되고, 과일들이 되어서 우리가 받은 삶의 전부를 주 사랑의 이름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거기서 주를 향한 새 사랑의 출발, 새 사랑의 약속, 새 사랑의 고백을 하려 합니다. 정말 복스러운 사랑의 미로(未路)가 아닙니까

나 혼자 따로 가면 안됩니다. 둘만이 가서도 안됩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이 없는 사랑의 미로란 아무런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과 함께 사랑의 미로(未路)를 떠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 널리 펴져 내려왔던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밤늦게 연인의 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방안에 있는 처녀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 “나입니다(It's me.).”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방안에서 처녀가 대답하는 말은 “이 방은 너무 좁아요. 한 사람밖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돌아 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실망한 그 청년은 슬픔을 잊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사랑에 대한 큰 이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다시 그 연인의 집에 찾아가 전처럼 문을 두드렸습니다.

방안에서 처녀는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옛날에 했던 그 질문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청년은 “당신입니다(It's you.).”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문은 곧 열렸고, 그 청년은 그 사랑하는 자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아니고, 당신 자신이었을 때 문이 열렸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이에는 나와 당신이 아니고, 오직 당신일 뿐이란 말입니다. ‘그와 나도 아니고 오직 당신뿐’이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의 미로(未路)는 내가 아니고 오직 당신(主=κυριο)일 뿐입니다. 들녘에 있는 동네의 포도동산은 내 동산이 아니고, 당신(主)의 동산입니다. “당신의 동산에서 내가 당신께 받은 사랑을 바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복된 사랑의 미로(未路)입니다.

그렇다면 경향인이 받은 사랑의 미로(未路)에는 불안이라든가, 공포라든가, 불만이라든가, 의심이라든가, 절망, 무상, 허무 따위는 자리잡을 시간도 장소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4반세기만의 사랑의 미로(未路)는 확실하고, 빛나고, 영광스럽습니다. 우리 모두 주와 함께 서울 들녘 가운데, 강서 동네에 주님의 세워주신 포도동산에서 움과 꽃과 향기와 열매의 사랑을 주께 바쳐봅시다. 거기서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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