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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 천국 잔치 (마 1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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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18세기는 남자를 발견했고, 19세기는 여자를 발견했고,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 이해에 대한 변화를 나타내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역사의 신기원이시던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저 위대한 자신의 천국 복음을 입증하였습니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어린아이들의 중요성을 발견한 사람들에 비한다면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도 확실히 세기적(世紀的) 선구자였습니다.

Ⅰ. 예수님과 어린아이와 천국에 대한 교훈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천국에서는 누가 제일 큰 자입니까” 하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기 앞에 모인 여러 어린이들 가운데 한 아이를 불러 저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른들의 교만(방자함)을 염두에 두시고, 어린아이들의 겸손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다시 4절에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심으로 어린이를 겸손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5절에 「누구든지 내(예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예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심으로 어린이가 크게 환영을 받아야 될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6절에 「누구든지 나(예수)를 믿는 이 소자(μικρν) 중 하나」를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실족케 하지 말라는 말은 거침돌이 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10절에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시고,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저들을 위하여 항상 수호 천사를 파송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14절에서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디베랴 언덕에서 한 어린아이가 갖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 가지고 저 놀라운 이적의 재료로 삼았습니다(요 6:9-13). 그 어린이가 가진 보잘것없는 소유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세상에 오신 그 선지자’(요 6:14)의 표적을 보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어른들을 먹여 주는 간접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최후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거기에서 자신을 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유대교권주의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을 내며, 예수님께 저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느냐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16)라고 하시며, 구약 시편 8편의 예언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젖먹이들의 감사 찬송을 하나님이 기쁘게 열납하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외치던 어린아이들의 소리는 결코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온전한 찬미의 제사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천국 시민의 자질을 말씀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디베랴 언덕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이적도 사실상 그 한 어린아이가 저들 가운데 중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호산나 찬송하며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하는 어린아이들이 저들 가운데 중심인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던 사람들 중에는 어린아이를 예수께로 데리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그 일을 꾸짖었습니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분을 내시고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3-1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13-14, 눅 18:16-17)고 하시며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고 축복해 주셨습니다(막 10:16).
예수님은 교만한 무리(어른들) 가운데 한 어린아이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들의 심성의 특징인 겸손과 신뢰성과 순진성과 단순성과 봉사와 희생성과 이타적 애정성을 들어 천국 시민의 영적 자질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한가운데 자기를 세우고 자기를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역사의 한가운데 자기의 업적과 공로와 명예를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아니면 역사의 한가운데 영웅이나 호걸이나 가인들을 세우고 교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천국을 교훈하셨습니다.

Ⅱ. 천국은 어린이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연령적으로, 체력적으로, 지적으로 미숙한 한 어린아이를 한가운데 세우고 천국을 교훈하신 것은, 결국 그가 이룩하실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사실상 어린아이들이 중심된 세계임을 웅변적으로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내다 본 메시야 왕국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 왕국의 시민들이 모두 어린아이로 묘사된 평화의 나라였습니다.
예수 자신이 「한 아기」, 「한 아들」로 예언되었습니다(사 9:6).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양과 표범과 어린 염소와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들이 끌려 다닌다고 하였습니다(사 11:6).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 해됨이나 상함이 없는 평화 충만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천국의 시민을 「어린아이」, 「젖먹는 아이」, 「젖뗀 아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갓난아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2). ‘방금 태어난 아이’를 뜻합니다. 그 아이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빨면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요 3:3, 5, 고후 5:17). 새 사람, 곧 아이들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 버리고, 옛 것은 벗어 버린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감사 기도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비밀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져 버리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나게 됨이 감사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1:25).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1:26). 이른바 유대교권주의자들이 아닌 예수님의 갈릴리 제자들, 죄인들,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 곧 구원받기로 작정된 모든 자들을 어린아이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가 이를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아이들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에는 이른바 어른들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오른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저들이 받은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는 모든 무리는 예외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어린아이들입니다(계 7:9-10). 영적으로 천국은 거듭난 새 사람의 세계, 곧 어린아이들의 세계입니다. 어린아이들이 판을 치는 세계입니다.

Ⅲ. 경향 어린이 천국 잔치

지금 우리는 새 예배당 입당과 함께 주일마다 어린이 천국 잔치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주일 오전 예배와는 별도로 주일 오후에 특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어린이를 위한 특별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곳에 새 성전을 시작하고 금요 밤마다 모이는 기도회에서 이미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3년이 가깝도록 새 성전 신축 완공과 입당 그리고 어린이 천국 잔치를 위하여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은 우리 교회 교육국으로 하여금 어린이 천국 잔치에 관한 여러 프로그램들을 연구하고, 계획하고,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성전이 완공되고 역사적인 새 성전 입당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지난 5월 24일 주일 오후부터 마침내 경향 어린이 천국 잔치를 열었습니다. 첫날부터 잔치는 대성황입니다.

경향 어린이 천국 잔치 중에 진행되는 주요 프로그램의 내용들은 어린이 찬양과 율동, 동화, 성경 이야기, 미니 올림픽, 성화(영화) 상영, 기독교 명사들을 초대하여 각종 묘기(진기 명기) 등을 시범적으로 보여 주는 일(축구, 태권도, 연극… 등) 등 다채로운 순서들이 주일마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어린이 천국 잔치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우리는 새 성전 한가운데 어린이들을 세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이 천국 어린이 잔치를 통하여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를 원합니다.
적어도 어린이 전도는,
① 어른 전도보다 효과적입니다.
그 이유는 저들에게 있는 겸손과 순진과 신뢰심과 순종심이 어른들보다 더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예수 복음의 진리를 흡수하는데 훨씬 빠르기 때문입니다.
② 가정 전도의 첩경입니다.
닫혀 버린 가정의 문을 두드리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지름길이 바로 그 가정의 어린이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어린이 새소식반과 어린이 선교원이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③ 교회의 미래 성장을 보장하는 결정적인 비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받은 축복의 묵시(vision)가 있다면 그것은 어린이 전도입니다. 어린이가 없는 교회는 그 앞이 캄캄합니다.
④ 어린이 전도는 미래지향적입니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입니다.
21세기를 대비하는 복음 운동의 모든 자원들이 바로 어린아이들에게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받은 복음의 진리가 저들에게 바른 신관, 바른 인생관, 바른 구원관, 바른 존재적 가치관을 정립시켜 줍니다.
그래서 저들 속에 내일의 위대한 구령 운동의 목회자, 선교사, 신학 교수, 사회 봉사자, 정치가, 경제가, 교육가, 예술가, 과학자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 세계는 무한한 미래의 잠재력이요 폭발력입니다. 아니 위대한 축복의 미래적 물결입니다. 아니 그 어린이 자체가 천국 운동이요 천국의 전령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위대한 사건들은 전쟁이나, 지진이나, 기타 여러 종류의 폭풍이 아닙니다. 바로 이 세계의 위대한 사건들은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 그 자체입니다. 바로 이 아이들은 역사 가운데 지진이요 폭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성전 입당과 함께 경향 어린이 천국 잔치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 스마일즈(Samuel Smiles)는 ‘유년기는 거기에 비친 영상(image)을 내세에 반사해 주는 거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셀렉트(Selecte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이의 마음 속에 당신이 무엇을 쓰든지 물로 지울 수 없다. 모래는 파도가 사나울 때 옮겨질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의 노력은 썩어 버릴 수도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없어지고 어떤 노래들은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의 마음 속에 새겨 놓은 이 기록들…, 세월도 그것은 변경하지 못하리라. 어린이의 가슴 속에 무엇을 써넣든지 기쁨의 이야기든 근심의 이야기든, 하늘이 축복했든지 땅이 모독했든지, 변함없이 거기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 경향 4반세기 25년은 이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고 말았습니다. 을지로에서, 동자동에서, 여의도에서의 교회 운동이 그러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새 성전 한가운데에 어린이들을 세웁시다. 교회의 한가운데에 어린이들을 세웁시다. 그리고 저들의 입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부르짖게 합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새 성전 한가운데에 어린이들을 세웁시다. 그리고 저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앙의 고백과 감사의 서원이 경향의 자원과 미래가 되게 합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새 성전 한가운데에 어린이들을 세웁시다. 그리고 저들이야말로 경향이 받은 천국 운동의 기수들이 되게 합시다.
이 위대한 어린이 천국 잔치에 수종드는 모든 경향인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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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6. 1

4.
소원대로 되는 믿음
마태복음 15장 21-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가나안 여자에게 축복하신 그녀의 소원 성취의 선언입니다.
‘수로보니게’란 수리아에 속한 베니게란 뜻입니다. 이 민족은 일찍이 유대인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북쪽으로 쫓겨났던 가나안 민족의 자손입니다. 이들은 갈릴리 북편 두로와 시돈 지방에 살았습니다. 이 지역은 이방인들이 거주한 곳으로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곳입니다. 예수께서 이 먼 곳까지 가셔서 어느 사람의 집에 은거하신 경우입니다(막 7:24).
바로 그때 한 이방 여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소원 성취의 축복을 받은 은총의 장면을 보게 됩니다.

Ⅰ. 그녀의 소원은 귀신에게 빼앗겨 버린 딸을 찾아오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그녀는 예수에게 잃어버린 딸을 찾아 달라고 온 것입니다. 그녀는 귀신에게 딸을 빼앗긴 어머니였습니다. 그녀의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흉악히(κακ)’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그 딸의 병세가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 버린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딸이 사탄의 침노를 받아 정신적 상태가 혼란에 빠진 것 뿐아니라, 그로 인한 육체적 기능의 활동까지 손상되어 버린 불구자의 상태에 이른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 생전에 그에게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이 나아왔습니다(마 4:24).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상황은, 그녀는 그녀의 딸이 만난 질병에 대하여 인간적인 한계상황을 직감했다는 사실입니다. 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라고 하는 모성의 한계를 직감했다는 사실입니다. 딸이 만난 불행스러운 질병에 대하여 인간적인 치료의 불가능을 직감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와 딸 사이에 자리잡은 귀신(사탄)을 제어할 아무런 힘이나 대책이 없었습니다. 귀신은 딸과 어머니 사이에 모든 만남, 의사 소통, 사랑, 축복, 기쁨을 송두리째 단절시켜 놓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다고 하면 절망, 불안, 공포, 낙심, 허무, 슬픔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귀신에게 빼앗겨 버린 딸을 도로 찾아오는 일이었습니다.

Ⅱ. 그녀의 큰 믿음은 소원 성취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본문 15장 28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녀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큰 소원은 결국 그녀가 받은 큰 믿음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 큰 믿음이었습니까

1. 예수께 나아오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이는 예수를 향한 그녀의 신앙이 행동화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요구하시는 일입니다. 그는 목마른 자들을 물이신 자신에게로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나아오라고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빛이신 자신에게로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나아와 듣고, 배우고,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2. 메시야적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 중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녀가 고백한 「주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에 대한 칭호입니다(마 1:1, 9:27). 그녀가 어떻게 예수께서 메시야가 된 것을 알게 되었을까 그때는 이미 예수의 초자연적 사역이 온 천하에 두루 퍼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마 그녀는 예수의 초자연적 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분이 바로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메시야임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다윗’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① 사랑의 주를 의미합니다. ② 승리의 주를 의미합니다. 예수는 유다지파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예수에 대한 바른 메시야관 이른바 바른 기독관적인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3. 절망할 줄 모르는 기도의 신앙입니다.
부르짖는 기도의 신앙, 곧 애원하는 신앙입니다.
본문 15장 22절에 다시 말하기를 「소리질러 가로되…」라고 하였습니다. 23절 중에도 「…소리를 지르오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소리의 내용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λσν με)」라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녀는 흉악히 귀신들린 딸과 자기를 동일하게 보았습니다. 이 말은 ① 방장 죽어가는 자식의 죽음 앞에 서 있는 부모가 의사에게 애걸하는 마지막 하소연을 뜻합니다. ② 포로의 적지에서 아군을 향한 구조의 마지막 부르짖음을 뜻합니다. ③ 사형언도 직전에 사형수가 재판장에게 마지막 올리는 소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후적 몸부림입니다. 지금은 그녀가 인류의 구세주 메시야이신 예수께 결사적인 소원을 토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23절에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침묵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그 뒤를 따르며 같은 소리를 반복했습니다. 그때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께 청하기를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마 15:23).
예수님의 제자들도 냉담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입을 여시고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간접적으로 그녀의 부르짖음에 거절을 표했습니다(마 15:24). 메시야를 향한 그녀의 결사적인 부르짖음에 대한 예수 그리고 그 제자들의 반응은 냉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절망할 줄 몰랐습니다.

4. 절하는 믿음, 곧 예배하는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본문 15장 25절에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물러갈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여자가 예수께 와서’라고 하였습니다. ‘절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절했다’(προσεκνει)는 말은 사실상 엎드려 절하는 경배, 예배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르기를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도우소서’(βοθει)는 ‘화급한 구조를 나타내는 외침’을 뜻합니다. 이 이상 더 지체하거나 외면하면 자기 딸은 영원히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의 길목을 가로막고 엎드려 절하면서 강청하고 말았습니다.

5. 지극한 겸손으로 나타난 믿음입니다.
굽히거나 물러설 줄 모르는 그녀에게 예수의 대답은 너무 혹독하였습니다.
본문 15장 26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개들’이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물론 쿠나리아(κυναρα)라고 하는 관상용 개를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아닌 ‘개’라고 말함은 천대와 멸시의 극에 달한 표현입니다. ‘개들에게 던진다’고 하는 표현은 쓰레기로 버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대답을 보십시오.
① 「주여 옳소이다」(마 15:27)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보심과 판단과 말씀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개와 같은 존재라고 시인한 것입니다. 아니 개보다 더 못한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이는 극에 달한 그녀의 겸손입니다.
②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라고 하였습니다.
주인과 주인의 자녀들이 먹다 버린 부스러기라도 나와 나의 딸의 것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아가려고 해야 나아갈 수 없는 그녀의 극에 달한 절대 기도, 절대 예배, 절대 겸손이 예수의 길을 막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예수의 본심이 나타나고 맙니다. 예수의 메시야적 본성이 드러나고 맙니다. 이에 예수께서 “여자야!”라고 그녀를 부르셨습니다.
“여자야!” 하는 말 앞에 “오()” 하는 예수의 감탄사가 있어서 예수의 놀라심과 감탄의 기쁨이 숨어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녀를 향한 예수의 칭찬입니다. 그녀의 믿음에 대한 예수의 만족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사실상 예수는 그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녀의 소원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녀를 더 큰 믿음으로 성화시키기 위하여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녀의 큰 소원에 큰 믿음을 더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침내 그녀를 향한 예수의 만족, 예수의 기쁨이 폭발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큰 믿음은 예수에게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께 자주자주 나오는 믿음이 큰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께 부르짖은 기도입니다. 절망할 줄 모르고 부르짖은 기도입니다. 낙심을 모르고 예수에게 부르짖는 믿음입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이런 자극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셨던 예수의 본심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방인에게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의 본심입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절하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예배하는 믿음으로 그녀를 성화시켰습니다. 예배의 소중함을 아는 자는 큰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피조물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개에게 던져지는 부스러기라도 사모하게 하는 지극한 겸손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큰 믿음’으로 성화시키셨습니다.

Ⅲ. 소원대로 되어 버린 축복입니다.

본문 15장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네 소원대로’( θλει) 하는 말은 ‘네가 원하는 것만큼’이란 뜻입니다. 주님의 축복은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만큼 주어집니다. 그 수용의 그릇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시로 그녀의 딸은 깨끗하여지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아직 집에 돌아가기 전에 그녀의 딸에게 있던 흉악한 귀신은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미 예수께서 그 딸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명하여 나가도록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녀는 딸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 딸을 찾았습니다. 귀신에게 빼앗겨 버린 딸을 도로 찾았습니다. ① 예수에게 나아와 ② 부르짖고(기도) ③ 절하고(예배) ④ 겸손한 애걸로 말미암아 주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녀의 소원이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돈이 아니고, 명예가 아니고, 오직 자식, 자기 딸이었습니다. 소중한 인간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잃어버린 이산가족을 찾아 주는 장면이 항상 인상적이었습니다. 서로 만난 가족들의 평생 소원이 자기 혈육을 찾아 만나는 것이었다고 하는 눈물겨운 사연을 볼 때마다 제 마음도 함께 뜨거워졌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원 가운데 하나가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이 사실을 설명하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9:10).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불신앙의 골육 형제나 이웃은 우리가 도로 찾아내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소원의 대상들입니다.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도 우리가 강권하여 찾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이런 소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진실한 소원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 나아졌다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살고 싶은 것이다.”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 엄청난 이유 때문에, 아무쪼록 나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내어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전도의 소원입니다. 바로 그 소원을 가진 자에게는 그 소원의 성취를 위하여 큰 믿음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을 찾기 원하는 자에게, 그 소원 성취에 따르는 큰 믿음과 큰 축복들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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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6. 2

1.
가능의 삶
-빌립보서 4장 10-15절-

세기적인 전도자 바울은 투옥(감옥) 생활 중에도 기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 준 향기로운 사랑의 제물(빌 4:18)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주의 사자 바울이 복음 때문에 옥에 갇혔을 때, 교회적으로 사랑의 연보를 해서 교회를 대표하는 에바브로디도로 하여금 로마까지 가서 바울을 수종들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과 감사의 낭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바울은 결코 그가 만난 투옥 생활의 궁핍 중에 위로를 받아서가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에게 있는 사랑의 싹(빌 4:10)을 보고, 또한 저들이 십자가의 고난(괴로움)에 동참한 일이라고 하는(빌 4:14) 차원적인 감사의 낭만을 피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 자신은 어떠한 형편에서라도 자족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풍부와 비천, 배부름과 배고픔, 궁핍과 부요에 대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빌 4:12).

그 가능한 삶의 비결이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고백입니다. 이는 바울의 인생고백입니다. 그것은 ‘가능의 삶’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본문에는 ‘능력’과 ‘모든 가능(할 수 있음)’이 서로 관계를 맺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능력(δναμι)과 가능(할 수 있음;σχ)을 말하고 있습니다.

Ⅰ.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능력이…

본문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능력(δναμι)’은 역학(dynamics), 발전기(dynamo), 폭탄 곧 화약(dynamite)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화약은 문명 개발 작업을 위하여 발명된 것입니다. 현대 문명의 개발 중에 철교 개설은 실로 지대한 공헌을 남겼습니다. 이런 철로 개설 작업 과정에서 수많은 암석을 분쇄하는 경우에 다이너마이트의 위력은 가히 측량 불가해의 위력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 속에는 이렇게 폭발하는 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적인 힘, 영적인 힘, 터지고 마는 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힘이 자기의 모든 삶을 가능으로 성화시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누구인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받은 율법주의의 힘인가 아닙니다. 그러면 날 때부터 받은 로마 시민권 곧 권력의 힘인가 아닙니다. 아니면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식(철학)의 힘인가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을 믿는 자들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박해 도상에 바로 그 분 예수가 그를 찾아 왔습니다. 예수는 정오의 햇빛보다 더 밝은 영광의 빛으로 그를 길바닥에 엎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음성으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시며 그의 죄를 찔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변화시켜 예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세계의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부여했습니다(행 9장). 이 위대한 다메섹 사건은 바울의 전생애를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바울에게 능력(δναμι)이었습니다. ① 살아계신 인격적 능력이었습니다. 역사적 사건의 사실로 나타난 힘이었습니다(부활의 힘). ② 사죄와 구원의 능력이었습니다. ③ 또한 영생의 능력이었습니다. ④ 그리고 사명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6절에 복음은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믿는 자,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사도된 직분이 능력이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에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능력)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전도하는 메시지가 능력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사건은 바울 삶의 능력의 원천이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예수는 바울의 삶에 모든 용기와 힘을 제공하는 원천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삶의 원천입니다.

Ⅱ.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합니다.

본문 4장 13절은 다시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능력(δναμι) 안에서 …할 수 있다(σχ)」고 하였습니다.
앞에 나오는 「능력」은 내적인 힘, 영으로 폭발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요 그리스도 자신의 복음이 바울을 움직이는 내재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구원 은총의 힘, 사명 은총의 힘입니다.
그 다음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한 후자의 가능은 나타나는 힘, 방어하고 공격하는 발휘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삶에서 나타나는 행동하는 힘, 역사(役事)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자신을 재현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소원을, 목적을 재현하는 가능을 말합니다.
발전기의 힘은 에너지를 보급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영적인 작은 발전기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능력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단히 공급받을 때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의 힘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익나티우스(Ignatius)는 말하기를 “완전한 인간이신 그 분 자신이 나를 힘있게 하시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배부름과 배고픔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마초(馬草)나 목초(牧草)가 많은 말들이 배부르게 먹는 장면과 목초가 전혀 없어 굶주리는 장면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또 풍부와 궁핍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강물처럼 넘쳐흐르거나 사막처럼 건조한 경우에 사용한 말입니다. 그런 극단의 경우들에도 자족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원천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가능의 삶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통 생각하기를 사람들은 동물보다 우수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태고의 원시인들은 사람이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동물들도 정글 속에서 언어를 갖고 자신들의 거처(도시)를 건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상 새들도 두 발을 가지고 걷고, 원숭이도 손이 있고, 벌도 언어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벌은 춤을 춤으로 먹이가 있는 곳의 방향과 거리를 서로 알리고 있습니다. 개미들도 자기들 고유의 질서와 국가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의 원시인들은 사람보다 동물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인 히론(chiron)은 아킬레스와 그밖에 다른 영웅들에게 목초 재배법과 거문고 연주법을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호머(Homer)의 시에도 ‘히론은 영웅들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고귀한 스승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대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로부터 문화생활을 배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새들의 지저귐에서 인간은 노래를 배우고, 거미가 거미줄을 쳐서 먹이를 잡는 것을 보고 인간은 그물을 쳐서 동물 잡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새들이 하늘을 나는 것을 보고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물속으로 잠기는 것을 보고 잠수함을 만드는 힌트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퀴니코스(Kynikos) 학파에서는 동물들이 인간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낭만주의자들도 지성화된 반신적(反神的) 존재인 인간들보다 오히려 동물들이 자연의 신비를 한층 더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지상에서 인간 중심 사상의 등장은 문서상으로 볼 때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말한 프로타고라스에게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인간이 동물보다 월등하고 우월하다고 여겨 왔습니다.
반 기독자 니체는 인간만이 과거를 보존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프레스너는 인간만이 웃을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쿤스는 인간만이 부정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부버는 인간만이 미래를 지향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블로흐는 인간만이 희망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로젠쯔바이하는 인간만이 자살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자 데이빗 흄은 동물에게도 인간과 같이 이성, 감정, 도덕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런데도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회의 덕택’이라고 하는 반기독교적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내용들이 사람이 동물보다 우월한 이유가 되기에는 약합니다. 사람은 결코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피조세계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창 1:26). 그때의 사람은 모든 가능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9).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그 마음에 다른 신이나 명예나 물질들이 하나님을 대신해 버렸을 때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동물이나 식물보다 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생존의 가능이 절단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만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삯인 사망이었습니다(롬 6:23). 그 사망의 힘이 저들을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인생에게 언제 가능이 주어졌는가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신 그때부터였습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습니다(고전 1:30). 그리스도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골 1:15). 그리스도만이 개인과 인류 역사의 가능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우월적 존재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가능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부터였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모든 삶의 가능입니다. 아니 그가 가능의 원천이었습니다.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따르는 헬라주의자들은 인간 자신이 모든 가능의 원천이라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헬라의 스토익학파는 인간 자신의 수양을 믿었습니다. 저들은 인간이 만족을 얻기 위하여는 모든 욕구와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글로버(T. R. Glover)는 ‘헬라의 스토아인들은 마음을 사막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라고 비꼬았습니다.
스토아인들은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의식적으로 행동화함으로 만족한 가능에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가능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스토아인들의 만족은 인간의 소원 성취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인간의 만족은 하나님 자신의 선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스토아인들은 자급자족(自給自足)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급자족(神給自足)을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능력(δναμι)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는 가능이 있습니다. 과거의 가능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사죄의 은총입니다. 현재의 가능은 풍부와 비천,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의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을 대처할 수 있는 가능의 은총입니다. 미래의 가능은 바로 죽음 건너편에 있는 영원한 소망의 가능 곧 천국과 영생의 확신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로 말미암는 불사조와 같은 가능한 삶의 힘입니다.

세기적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은 ‘나에게는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다.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낱말이 없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배지인 저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나는 실패자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승리자이다.’라는 독백을 남겼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무단정치가(武斷政治家) 크롬웰 장군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는 이 본문을 외우고 또 외우면서 임종하였다고 합니다.

가능의 삶!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줍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줍니다. 어둠을 빛으로, 불순종을 순종으로, 원망을 감사로, 약함을 강함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좌절을 용기로, 궁핍을 풍부로, 무질서를 질서로, 불안을 평안으로 바꾸어 줍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온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 “당신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청하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2-23)고 하셨습니다.
모든 가능의 원천은 그리스도 자신의 능력입니다. 그 가능의 능력을 할 수 있는 가능의 능력으로 바꾸는 비결은 믿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만난 I.M.F.를 대처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족의 비결이 아니겠는가!-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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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6. 2

8.
인생과 보물(1)
-보물과 세상-
마태복음 6장 13-21절

저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천국의 대헌장’이라고 한 말은 참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로빈슨(Robinson)은 예수의 산상수훈을 가리켜 ‘인간 윤리의 최고봉’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마태복음 5장에서 천국 시민의 자격을 설파하였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 천국 시민의 실제 생활 문제를 설파하였습니다. 그 중에 ① 구제 생활(마 6:1-4)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성을 나타낸 교훈입니다. ② 기도 생활을 말씀하셨습니다(마 6:5-15).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씀하신 교훈입니다. ③ 또한 금식에 관한 교훈을 하셨습니다(마 6:16-18). 이는 자신과의 관계를 교훈하신 것입니다. ④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물질 생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6:19-34).
주님은 이 부분에서 보물을 땅에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4)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식주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멋진 교훈 가운데 ‘인생과 보물’이란 메시지를 나누며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오늘은 ‘보물과 땅’ 곧 ‘보물과 세상’의 부분을 만나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 6:19)고 한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보통 보물은 ① 금, 은, 주옥같이 썩 드물고 희귀한 물건이나 ② 예로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보배로운 물건이나 재산 등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사용한 ‘보물’도 보통 일반적인 관념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본문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마 6:19)고 하였습니다.

Ⅰ. 인생을 위한 보물이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마 6:19)이라고 한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보물을 위한 인생이 아니고 인생을 위한 보물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인생이 주체이고, 보물은 그것을 따라오는 수단이란 말입니다. 보물을 위하여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생을 위하여 보물이 있어야 된다는 전제입니다.
그렇다면 보물이 인생을 따라다녀야 된다는 말입니다. 보물의 보물된 가치척도와 효용성은 인생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보물 그 자체만 있을 때는 사실상 보물이 보물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저 미개의 땅이었던 아프리카의 바닷가에 널려 있던 진주들도 사람들이 가기 전에는 아무런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개화된 사람들이 그 땅에서 그것을 발견한 이후 보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신 인생은 이 유한의 세상에 영존할 존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영생할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주려고 오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인생의 영주지가 아닙니다.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히 13:14). 본질적으로 이 세상은 인류의 범죄로 자연까지도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죄의 삯인 사망으로 끝날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유한의 과정을 밟게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언젠가 생명의 부활로 영생 세계에 이를 자들이 있고, 사망의 부활로 영벌의 세계에 이를 자들이 있습니다(요 5:24-29).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인생이 한시적(限時的)일 동안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보물이라고 하는 것들도 한시적입니다. 그러므로 보물은 근본적으로 땅에 쌓아 둘 성질의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8장에는 세상 보화(보물)의 센터였던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꽃 속에 타 버리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을 위한 보물은 인생을 따라 다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이 세상을 떠나고 마는 마지막 한날을 보신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생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고, 인생이 가는 곳에 보물이 함께 따라가야 합니다. 인생 없는 그 어떤 것도 보물이 될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너희를 위한 보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23절 가운데 보면 「…만물이 다 너희(인생) 것임이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Ⅱ.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보물을 간수할 수 있는 영구한 곳이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1. 그 첫째 이유는 좀(σ)이 해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거기’는 앞에 나오는 땅, 곧 이 세상을 말합니다. 여기 나오는 ‘좀’은 ‘옷을 갉아먹는 벌레’를 뜻합니다. 이 경우 ‘보물’은 옷을 두고 하는 말이 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재산 중에 하나는 값지고 정교하고 진귀한 옷입니다. 우리 성경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눅 16:19)고 하였습니다. 이 옷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3,400배에 해당되는 고가(高價)의 것이라고 합니다.
저 구약에 나타난 나아만 사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와서 완전 하나님의 은혜로 문둥병을 고침 받은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자기 수레에 싣고 온 금과 은과 옷으로 사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이것을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주인 몰래 나아만에게 나아가 은 한 달란트와 두 벌 옷을 그 주인 엘리사의 이름을 빌려 거짓말로 요구한 일이 있습니다(왕하 5:22).
그리고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아간을 유혹한 물건 중에 하나가 당시 바벨론의 값진 옷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라고 하였습니다(수 7:21).
이렇게 값진 의복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보물’입니다. 이 세상을 지나갔던 지난날의 수다한 인생들이 썩을 육체에 화려한 옷을 걸치고 인생을 낭비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시장에는 역대 역사상의 이른바 귀공자들과 귀공녀들이 입었다고 하는 옷이 기하학적 액수로 거래되고 있는 사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진귀하고 비싼 옷이라도 장롱에 있을 때 작은 ‘좀’에 의해서 그것이 씹히고 구멍 뚫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혹 좀에 씹혀 해어지지 아니할 지라도 결국 시간 속에서 그 옷은 낡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말씀은 바로 인생 육체 향락의 한계성, 유한성, 종말성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값비싼 보물 같은 옷은 인간의 육체적 향락을 위한 도구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육체적 향락은 결국 자기 인생을 좀먹는 자신에 의해서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을 좀먹는 ‘좀’은 어떤 벌레가 아니라 바로 육체주의적이요 금세주의적인 인간 자신의 인본주의 그 자체라는 사실입니다. 무신론적이요 반신론적이요 유물론적이요 우상 숭배적인 인간 그 자체가 자신을 해치는 ‘좀’이 됩니다. 아무튼 그 어떤 경우든 이 세상은 ‘좀’ 때문에 보물을 영구히 간수할 장소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 둘째 이유는 동록(βρσι)이 해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마 6:19).

여기 ‘동록’은 금속의 부식을 말합니다. 곧 ‘녹슬게 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이 동록은 다른 말씀에는 ‘식물’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썩는 양식(요 6:27), 식물(요 4:32, 롬 14:17, 골 2:16)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동록’은 화학적인 작용에 의해 쇠붙이가 녹스는 현상을 말합니다. 원래는 ‘먹어 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이 말씀을 사용한 것은 창고에 가득 채워 둔 곡식을 쥐나 다른 벌레들이 먹어 버리는 경우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 많은 곡식은 쥐들이나 아니면 다른 벌레들의 희생 제물이 될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소유물은 영구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할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의 배후에는 사람들의 소유의 상징인 물질(재물)을 두고 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소유물(재물)에는 영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신이 유한하고 재물 자체가 가변적이고 가동적입니다. 누가 취할는지 알 수가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침식될 수 있는 곳에 보관된 보물은 보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밭에 소출이 풍성했던 한 부자는 그날 밤에 그 소유를 모두 남겨 놓고 죽고 말았습니다(눅 12:20).

3. 셋째 이유는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19절 하반절에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뚫는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쉽게 이해되는 말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집들의 담은 대개가 진흙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적들이 그 흙벽에 구멍을 뚫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흙집 속에 간수해 놓은 보물은 언제든지 도적의 손에서 좌우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보물이나 보물을 간수한 장소는 안정성이나 영구성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도적의 손에 좌우되는 곳에 어찌 보물을 보관할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도적당할 수 있는 인간의 물질적이요 육체적인 향락은 진정한 향락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도적의 정체는 실로 천태만상입니다. 이 세상은 온갖 류의 도적들에 의해서 인간의 보물들이 도적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도적당할 곳에 자기의 보물을 간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기가 갖고 있는 보물을 도적당할 수 있는 자리에 간수한다면 그는 실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의 소유물인 재물이 보물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을 영구히 안전한 곳에 보관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유명한 번즈(Burn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쾌락이란 꽃을 피우는 양귀비 같다. 손이 닿으면 꽃잎이 떨어진다. 쾌락은 강물에 떨어지는 눈(雪)과 같다. 잠깐 희게 보이나 곧 녹아 버린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번즈의 인생무상을 나타낸 글입니다. 보물과 세상은 그런 성질의 것입니다.
12세에 기하학의 원리를 증명하고, 16세에 원추곡선론을 쓰고, 19세에 계산기를 발명하고, 23세에 고대 자연과학의 큰 오류의 하나를 타파하고, 그 이후에 과학 전체를 연구하여 그 허망함을 느끼고 기독교로 전향하여, 39세에 죽을 때까지 경쾌한 유모어와 강한 추리력으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상을 종이에 써 놓은 인물, 그는 바로 저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입니다.
이 천재 앞에 전 유럽은 경탄하였고, 당시의 공주와 왕자들마저도 파스칼과 악수하는 것이 가십(gossip)거리가 될 정도로 그 명성은 대단하였습니다. 그런 파스칼이 어느 날 사교 파티에 참석했다가 만취 상태에서 마차를 몰고 귀가하던 중 바퀴 하나가 세느강 다리에 부딪쳐 버렸습니다. 간신히 목숨만을 건진 파스칼은 그 순간에 큰 충격을 받고 유유히 흐르는 세느강물을 바라보며 ‘죽음과 영원’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 앞에서 너의 천재, 명성, 젊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는 마침내 인간의 실존과 영원에 대한 생각으로 신음하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진귀한 보물로 여겼던 자기 자신과 여자들과 술과 쾌락과 명성들이 도대체 무엇들인가 인간은 영원 속의 한 순간인 이 세상을 살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영원한 허무 속인가 아니면 신의 영원한 진노 속인가
킬케골이 자신은 7만km나 깊은 망망한 대해에 혼자 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당시 파스칼이 그런 불안의 늪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점점 신음하고 고통하며 수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정적인 회심 체험의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 새로운 대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없어서는 안된다고 귀중히 여기던 쾌락, 사치, 명예심을 버리고 가품(佳品)들과 말을 팔고 은장식과 장식품을 모두 처분해 버렸습니다. 식사 때에는 나무 젓가락과 질그릇을 사용하고 손수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새벽 일찍이 일어나 몇 시간씩 기도하고 때로는 단식과 금식과 철야 기도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그 짧은 나머지 인생을 철저하게 하나님께 봉사하고 그가 받은 재능을 학문의 허영을 위해 쓰지 않고 당시의 이단 사상과 투쟁하며 신앙을 변호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파스칼은 자신의 허약 체질에도 상관치 않고 과도한 연구, 금욕, 고행으로 인하여 항상 질병에 괴로워하였습니다. 두통, 복통, 두 다리의 마비 상태로 인생의 심연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을 하나님이 주신 은총으로, 세상을 떼어놓는 섭리의 은총으로 그리고 주님을 만난 준비케 하는 전령사로 감사하게 감수했습니다.
1662년 8월, 그의 나이 38세에 임종이 다가오자 “오, 주여! 저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하고 소천했습니다. 실존 철학의 선구자로 지목되기도 한 그는 그의 대표작인 ‘팡세’를 남겼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오직 세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찾지 못했지만 하나님 만나기를 소원하는 도리에 맞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보물들을 보관할 수 없는 불안의 장소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전 3:11). 그 영원을 향하여 애쓰는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미래를 추구하는 삶의 지혜 말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영구한 미래적 삶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좀먹어 버리는 성질의 보물은 영구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녹슬어 침식되고 마는 성질의 보물은 영구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도적당하고 말 성질의 보물은 영구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좀이나 동록이나 도적들이 좌우되는 그것이 무슨 보물이 될 수 있겠는가’ 하시는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그런 곳에서 자기 행복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없어질 것으로 기대되는 보배(보물)들은 결코 인생에게 행복을 약속할 수 없다,’(A. 세네카)고 하였습니다.
인생과 보물! 그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 보관될 수 없는 영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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