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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3)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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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설교의 서론에 소개하였던, 저 덴마크의 고독한 실존주의 철학의 창설자라 불리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그가 스물 세살 되던 해 그 스스로가 말하는 ‘무서운 대지진’이란 경악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부친이 범한 두 가지 죄를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그 하나는 그 부친이 소년 시절에 너무나도 가난하여 유틀란트의 황량한 벌판에서 양을 치면서 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못 견디어, 언덕에 올라가 그토록 가혹한 생을 주신 하나님을 저주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 부친의 전처가 병으로 죽자 그의 하녀를 강간하여 임신하게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키에르케고르는 그 하녀가 낳은 8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1813년 5월 15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그렇게 출생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그의 형제 다섯 명이 요절했던 것은 신의 벌이었고, 자신도 34세 이전에 죽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빗나가자 그해의 자기 생일을 기록한 호적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조회하러 가 보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스물 세살 때 자기 아버지의 두 사건으로 인하여 받은 충격을 스스로 ‘대지진의 체험’이라고 말하였는데, 그때부터 그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원망하고 탕아생활을 계속하던 중 죄책감에 못 견디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25세 때 ‘레기네 올센’이라는 16세의 미녀와 사랑에 빠지면서 오랜 세월의 방탕은 끝나게 되고 마침내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연인은 한없는 행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에겐 순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극단적인 종교적 사랑과(아가페) 여성에 대한 사랑(에로스)에 대한 갈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두 사랑의 갈등에서 무서운 고민과 우울증에 빠지다가, 무서운 고독과 고뇌 속에서 마침내 사랑했던 그녀를 저버리고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를 선택하는 자기 결단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도 레기네를 너무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그에게 있는 척추병()이라고 추측되는 질병의 공포와 함께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집이라고 생각했던 심리적 불안으로 말미암아, 고독한 단독자로서 42세를 일기로 그의 삶을 끝마치게 된 것입니다.
그의 비문에는 그가 이미 생전에 남겨 놓은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제 잠깐이면 나는 싸움에서 이기리라. 그러면 모든 투쟁은 깨끗이 사라지리니, 그때 나는 생명샘 가에서 예수와 영원히 속삭이리라.’

제가 오늘 설교의 서론 부분에 다시 키에르케고르를 소개하는 것은 그가 스물 세살 때 그 아버지 때문에 받았다고 하는 이른바 ‘대지진’의 충격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삭개오의 충격은 자기 아버지의 범죄나, 자신의 범죄나, 아니면 여리고의 어떤 사건 때문에 받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예수로 말미암은 대지진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전 존재적 인격을 마구 흔들어 놓고만, 실로 대지진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Ⅰ. 예수께서 부르시는 객관적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Ⅱ. 세리 삭개오(죄인)를 부르시는 인격적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Ⅲ. 삭개오를 지목하여 부르시는 선택적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Ⅳ. 삭개오를 재촉하는 화급한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Ⅴ. 삭개오를 겸손케 하는 소명이었습니다.

본문 19장 5절이 다시 말하기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뽕나무에 올라가, 그 가지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상황은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눅 19:3-4).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의 신분에(눅 19:2) 걸맞지 않은 행동이요, 또 뽕나무 위의 모습입니다.

예수를 향한 그의 열정적인 구도심(求道心)이 보입니다.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되」 「보기 위하여」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가니」라는 모든 표현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삭개오의 모습은 예수를 향한 단순한 호기심 정도가 아닙니다. 그 무엇인가 갈구하는 목마른 사슴의 모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혼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그러한 삭개오가 앉아 있는 뽕나무 아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뽕나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의 여자적(如字的) 의미는 물리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이 말은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될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는 자는 모름지기 내려 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해야 됩니다.

지금 삭개오가 앉아 있는 뽕나무라고 하는 자리는 삭개오 스스로가 올라가서 만든 자리입니다. 그의 열심과 행동으로 만들어 놓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삭개오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으로 만들어 놓은 그 자리에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내려와야 합니다. 왜 주님이 지금 나무 아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높고 높은 영광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의 걸음을 걸어 지금 여리고까지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든,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이른바 높은 자리, 성공의 자리, 명예와 권력의 자리, 부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문이라고 하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은 문벌(학문)이라고 하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른바 경제라고 하는 큰 부의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업적이라고 하는 자만의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헛된 종교의 나무 위에나, 어떤 무서운 이데올로기의 나무 위에나, 아니면 정치라고 하는 나무 위에나, 교육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나, 문화와 예술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다 그 나무를 과시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먼저 그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역사와 전통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 있는 자가 있습니다. 결코 그 자리에서는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서 내려 와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교만과 인본주의적인 사람의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 인간의 공로, 인간의 업적, 인간의 열심, 인간의 명예에 걸터앉아서는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내려 와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인간의 선행의 나무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속히 내려 와야 합니다. 지체 말고 내려와야 합니다. 이럴까 저럴까 머뭇거림이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빨리 내려 와야 합니다. ‘내려 오라!’, ‘더 내려 오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9장 6절에 삭개오는 ① 급히 내려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의 말씀과 동시성을 띠고 있는 삭개오의 행동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체 없는 행동을 말합니다. ② 즐거워하면서 내려 왔다고 했습니다. 감심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③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 집으로 예수를 영접할 때에도 사용했던 단어입니다(눅 10:38).

말하자면 겸손입니다. 지체를 모르는 겸손입니다. 감격적인 겸손입니다. 행동하는 겸손입니다. 누군가 어거스틴(Augustine)에게 기독교의 덕을 물었습니다. 그때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을 물어 왔을 때 역시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그 세 번째를 물어 왔을 때에도 겸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르심은 인생을 겸손케 하는 부름입니다. 마음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말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행동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바로 내려와야 합니다. 성공하고 축복을 받았을 때에도 내려 와서 엎드려야 합니다. 실패하고 괴로울 때에도 내려 와서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대적하여 싸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축복하시고, 높이시고, 사랑하십니다.

Ⅵ. 삭개오에게 베푼 은혜와 사랑의 소명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9장 5절이 또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집이 누구의 집입니까 삭개오라 이름하는 세리장의 집입니다. 백성의 피를 빨아 부자가 되어 있던 집입니다(눅 19:2). 당시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서는 틀림없는 변절자의 집이요, 매국노의 집이었습니다. 창녀와 같이 취급되는 저질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9장 7절에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 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유하시고자 하신 집은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의인의 집, 유덕 군자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삭개오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눅 19:8). 확실히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야께서 죄인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① 내가 네 집에 나의 제자를 보낼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직접 그 집에 가시겠다는 말입니다. ② 내가 네 집을 구경한다거나, 창을 엿본다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 집안에 직접 들어가시겠다고 하였습니다. ③ 내가 네 집에 들어가 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삭개오에게 베푸신 주님 자신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주님 편에서 삭개오에게 거저 베푼 은혜입니다.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선수적인 사랑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임마누엘의 사랑입니다.
내가 너의 집을 내가 거할 안식처로 만들겠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아무도 나밖에 주인이 없으리라. 다시는 너의 집에 낮선 사람도 손님도 없으며, 오직 나만이 네 집에 주인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서론 부분에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를 말했습니다. 그는 스물 세살 때, 자신이 ‘대지진’이라 일컬을 만큼 충격적인 경험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충격적 경험이란 바로 그의 아버지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기 하녀를 부덕한 방법으로 취한 죄 때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정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집이 되어 버렸다는 이른바 ‘대지진’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폐인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고독자로 다시 일어나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계기로 성화 시킨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철학자가 말한 ‘대지진’이란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는 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병’을 만나고, 나중에 다시 그 병 때문에 ‘영광에 이르는 생명’을 찾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인생 전부를 흔들어 놓고 마는 대지진의 경험들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그것은 옛사람의 파괴와 새사람의 출생이라고 하는 엄청난 인생의 변화입니다. 인생의 요동입니다. 아니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부활입니다.

바로 그것이 저 갈릴리 어부 베드로를 위시한 부름 받은 모든 자들의 경험이었습니다. 세리 마태의 경험이었습니다. 저 다메섹 도상의 박해자 사울의 경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고 있는 저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의 경험입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경험이요, 저 중세기의 개혁자 마틴 루터의 경험입니다.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의 경험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결과는 우리 생의 대지진, 대폭풍, 대변혁을 나타내고 말았습니다.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는 예수의 부름이 싣고 온 생명의 폭풍이요, 지진입니다.

예수께서 삭개오를 흔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죄인 삭개오의 전인격을 마구 흔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삭개오에게 은혜의 폭풍이요 사랑의 폭풍이었습니다. 축복의 폭풍이었습니다. 아니 삭개오에게 임한 대 복음의 지진이었습니다.

저의 인생에도, 여러분의 인생여로에도 이 같은 예수의 부르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경향인들은 경향 4반세기의 여정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 중에 오셔서 우리를 소명하신 축복의 경험을 갖지 않은 자들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축복의 대지진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름의 복음만이 우리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아 멘.-다음 주 계속-

199

8.

8. 2

3.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4)
-부름(召命)의 복음-
누가복음 19:1-10

예수께서 오신 여리고성은 정말 영적 대지진()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① 예수께서 ② 세리장 삭개오(죄인)를 부르신 일 때문이었습니다. ③ 그 여리고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삭개오만을 지목하여 부르신 선택적 소명 때문이었습니다. ④ 그것은 삭개오를 재촉하는 화급한 소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속히 내려오라는 부름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⑤ 그것은 또한 삭개오가 모든 사람이 보는데서 급히 내려와야 하는 겸손의 부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⑥ 더욱이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유하셔야 되겠다고 하는 폭탄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여리고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뭇 사람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눅 19:7)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여리고 선언입니다. 죄인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하신 복음의 선언, 생명의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부름의 복음은 계속 됩니다.

Ⅶ. 삭개오를 향한 필연적 소명입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삭개오를 향한 주님의 계획된 의지(뜻)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 자신께서 유하실 수도 있고, 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4)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경 표현은 변동할 수 없는 주님의 확고한 자기 의지를 나타낸 말이 됩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통행의 필연성을 절감하신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도 예수의 예루살렘 상경의 필연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몰랐던 베드로는 그 길과 그 뜻을 막으려고 했습니다(마 16:22).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예루살렘 고난의 필연성을 가로막는 베드로의 생각이 사탄의 생각이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6:23).
누가복음 13장 33절에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그의 필연적인 예루살렘의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1절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요 11:7)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그의 필연성이 들어 있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말속에는 삭개오의 집에 유하실 주님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 집을 목표하였고, 지금 그 목표대로 말씀하고, 행동하시겠다는 자신의 주장이십니다.
나는 너의 집을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다. 나는 너의 집에 들어가고 싶다. 나는 너의 집에 유하여야만 하겠다는 강한 필연성의 표현입니다.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너의 집에 유하러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그 자리에서 속히 내려와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삭개오를 향한 소명의 필연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 큰 이유는 ① 이것이 삭개오를 향한 창세 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② 그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지금 여리고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③ 그러므로 삭개오는 필연적 소명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름의 복음은 우연의 산물이거나, 갑작스럽게 발동된 즉흥적 소행이거나, 더욱이 우발적인 사건일 수는 없습니다.

Ⅷ. 삭개오의 구원을 위한 목적적 소명입니다.

누가복음 19장 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 여리고 방문의 절정이 나타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삭개오가 누구인가 예수께서 유하러 들어가신 삭개오는 어떠한 존재였던가

1.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9:9).
예수께서 선언하신 말씀 곧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혈통적인 의미일 뿐만 아니고, 더 나아가 영적인 차원의 말입니다. 그가 하늘나라에서 주인공처럼 나타나 있는(눅 16:22)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재발견되었습니다. 재평가되었습니다.
이 말은 ① 그가 구원의 언약 안에 예정되었던 사람이란 뜻입니다. ② 또한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기업의 후손이란 뜻입니다. ③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를 믿어야 될 사람이란 뜻입니다. ④ 그 일 때문에 예수께서 세상 중 여리고에까지 오셨고 ⑤ 삭개오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2. 그는 잃어버린 자였다고 하였습니다(눅 19:10).
‘잃어버린 자’란 ① 위치가 바뀐 자 ② 가치(진가)가 파괴된 자라는 뜻입니다. 본래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신분이었는데, 지금은 세리와 죄인의 신분과 자리와 위치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잃어버려진 양이었고, 잃어버려진 드라크마였고, 잃어버려진 둘째 아들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르심은 신분의 회복이요, 가치의 복구였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3.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눅 19:9). 구원이 삭개오를 찾아왔다는 뜻입니다. 삭개오가 구원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야말로 삭개오에게 구원이 성취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그 효력을 발생하였다는 말입니다. ‘오늘’ 성취된 구원입니다. 물론 그 구원은 삭개오 개인의 구원이요, 그로 말미암은 가족의 구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소명의 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목적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잃어버려진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것을 목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구원을 발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Ⅸ. 불가항력적 소명, 곧 효과적 소명이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삭개오의 반응을 보십시오.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니 움직이는 생명의 몸부림이었습니다.

1. 삭개오는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눅 19:6).
그래서 성경은 ‘급히’라는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과 함께 동시성을 띠고 나타나는 즉각적인 행동을 보여 줍니다.

2. 삭개오는 내려 오고 말았습니다(눅 19:6).
그는 뽕나무에서 내려오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내려오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내려오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님이 그 나무 아래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3. 삭개오는 즐거움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눅 19:6).
지금 삭개오의 마음과 얼굴에는 만공의 기쁨과 환영이 넘쳤습니다. 그에게 머뭇거림이나, 주저함이나, 망설임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주변에 둘러 서 있는 여리고성의 주민들이나, 저들의 수군거림 따위는 아랑곳없었습니다. 지금 삭개오에게는 주님만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4. 그는 주 앞에서 회개하였습니다.
그의 회개는 ① 엄숙한 공개적 회개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에 「삭개오가 서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엄숙한 서원과 맹세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② 자발적인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 오셔서 설교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저처럼 자원하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 집에 오신 주님 자체가 바로 생명이요 빛이었습니다. 아니 죄인의 친구요, 죄인의 구세주였습니다.
말하자면 세리장 삭개오의 인격의 중심부에서 대지진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아니 생명의 지진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복음의 지진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 소명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그 무슨 이유로든지 그 소명에 불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불렀던 삭개오는 불가불, 주님 앞에 서는 결과밖에 없었습니다. 불가불 회개하고, 주께서 허락하신 구원을 받을 수밖에 다른 일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독교가 인류에게 소망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과연 예수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될 수 있는가
과연 그리스도인이 받은 소망이 확실한가
이런 질문에 대한 그 여러 대답 가운데 확실한 것 하나가 예수께서 죄인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한 소망의 약속입니다(마 11:28).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고 초청하신다는 사실입니다(사 55:1). 그에게 나아오는 자는 생수의 강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요 7:38). 예수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하였습니다(요 4:14).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죄인(삭개오)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선택자만(삭개오) 지목하고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삭개오)을 속히(화급히)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죽고 사는 생사의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삭개오)을 내려 오라(겸손케 함)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유하시려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삭개오)들을 부르심은 필연적이요, 목적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삭개오)을 부르심은 그 결과를 보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부름 받은 사람들은 감히 그 부름에 거절하거나 반항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불가항력적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노아는 그 부르심에 순종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히 11:7).
하나님께 부름 받은 아브라함은 고향과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는 엄청난 결단을 경험했고, 마침내 그 자신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히 11:8).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세는 마침내 선민 구원 역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세우고 말았습니다(히 11:23-29).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무엘은 사사 전국시대를 정돈하고, 이스라엘 신정국을 탄생시키는 새 역사의 총아가 된 것입니다(히 11:32).
하나님께 부름 받은 다윗과 역대의 모든 선지자들은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는 축복의 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저 갈릴리 어부들이 그리고 바울이 세계를 복음으로 진동시켜 버리지 않았던가!
그 부름의 힘! 그 부름의 능력! 그 부름의 복음! 그 부름의 약속! 그 부름의 결과! 그 개인과 역사를 구원의 불길로 태우고 말았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의 힘입니다. 예수 자신의 힘입니다. 반항할 수 없는 힘, 순종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이 그 부름 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은혜의 힘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용서와 사죄의 힘이었습니다. 바로 구원의 힘, 영생의 힘이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바로 이것이 복음 종교인 예수교(기독교)인 것입니다. 부름의 복음인 것입니다.-아 멘-
199

8.

8. 30.

 시대의 징조들
-인자의 징조-
 마태복음 24: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2-3)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천기는 분별할 줄 아는데 ‘시대의 징조(표적)’는 분별할 줄 모른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 그의 제자들로부터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에 있을 ‘징조(표적, σημεον)’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마24:3).

예수께서 사용하신 ‘시대의 징조(표적)’란 말은 그의 재림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그 재림에 선행하는 사건들이나, 상황들을 묘사함에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사용하신 ‘시대의 징조들’이란 말은 미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특별한 징조를 가리키는 일종의 역사의 벽보와 같은 내용입니다. 그것은 예수 재림과 관계되는 종말론적인 역사의 벽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세상 끝 날에 나타날 큰 징조들을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징조들입니다. 바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마24;14),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징조입니다(롬11:25-27).
또 하나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징조들’입니다. 말하자면 ① 환난과 ② 배도 행위와 ③ 적 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마24:5, 9-13, 21-28).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징조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징조들’입니다. 그것은 하늘에 나타나는 징조, 곧 일월성신의 징조(마24;30, 눅21:25)들이고, 또한 땅의 징조들(마24:6-8, 눅21:25)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 세 번째 징조인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징조들’에 국한하고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Ⅰ. 땅의 징조들입니다.

1. 그것은 전쟁입니다.

마태복음 24장 7절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1장 9절에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10절에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1장 25절 중에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예수 재림을 알리는 징조의 선구자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세계는 데땅트 시대를 맞아 조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두 번이나 경험한 세계대전 후의 고요함일 뿐입니다. 성경은 아직까지 세계적인 대전이 남아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규모는 가히 전무후무한 세계적 규모가 될 것이고, 그 기간은 짧지마는 세계를 파국으로 이끌어 버릴 만큼 큰 전쟁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사상적, 경제적, 정치적, 역사적, 종교적인 모든 것이 뒤얽혀버린, 이른바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 중에 곤고해져버릴 것입니다.

2. 그것은 큰 지진입니다.

마태복음 24장 7절에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1장 11절에도 「처처에 큰 지진」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지진이 일어나는가 하는 원인은 규명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전 지구가 지진대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언제, 어디서, 어느 정도의 지진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미지의 불안이요, 공포입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지진이 일어났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이 지진의 규모와 그 발생 회수가 더 많고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4세기는 137건, 15세기는 174건, 16세기는 253건이 발생하였는데, 17세기에는 378건, 18세기는 640건, 19세기는 2119건이 발생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무려 2250건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20세기는 아직 마지막 통계가 완료되지 않은 기록입니다.
하나님이 지진을 가지고 땅을 흔들어 땅이 입을 벌릴 때, 붉은 용암이 치솟게 하고, 그 불이 인류문화를 태우고, 땅이 벌린 그 큰 입이 인류와 인류의 문화를 삼켜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지진의 무서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진의 강도가 점점 더하고 있음 또한 알고 있습니다.

3. 그것은 기근입니다.

마태복음 24장 7절이 다시 말하기를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1장 11절에는 「…큰 지진과 기근」이라고 하였습니다.
‘기근’은 흉년으로 인한 식량난의 재앙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 기근이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므로 세계적인 기근 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근은 대기의 변화로 인하여 때를 따라 오는 비가 조정이 되지 못하는 경우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 전 지역이 이상 기온 권내에 들고 있습니다. 엄청난 대기 중의 기온 변화는 첨단 과학 기술로 장비된 기상 관측소를 당황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이른바 ‘엘리뇨와 라니냐’ 현상입니다. 갑작스러운 더위, 또 추위 그리고 기온 변화, 홍수사태, 해일사태가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여러 생태계의 변화는 물론이고, 여러 자연 변화에 대한 부적응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또 시달리고 있습니다.
또 이 기근은 인구 폭발과도 직결하고 있습니다. 생산량의 감소에 비해 인구 증가의 역비례 현상은 자연히 식량난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공업시대의 여파로 인하여 공기 오염과 수많은 폐수가 물과 토양에 악영향을 미쳐서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물의 양과 질을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폴 에들리히’ 박사와 ‘윌리암 패덕’ 박사는 1970년대부터 세계는 기근의 시대를 맞았다고 하였습니다. 세계식량회의는 약 6천 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매년 기근으로 허덕이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리 그릭스’는 ‘굶주림으로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본다는 것은 전쟁으로 갑자기 죽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다. 제일 가슴아픈 일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 그리고 말라버린 젓가슴을 아이에게 빨리려고 애쓰다가 함께 죽어 가는 어머니의 모습이다.’고 하였습니다.
‘필리핀 타임지’ 기사에 의하면 ‘의학자들이 연구한 보고에 의하면 제3세계의 8억의 어린이들이 영양 부족으로 질병에 대항할 힘을 잃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요한계시록 6장에 셋째 인을 떼실 때 나오는 ‘검은 말’의 재앙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만약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문명을 유지할 만큼 필요한 인간이 살아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만약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면 인간은 너무 불어서 지구상의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850년대 세계 인구가 10억이었고, 1930년대는 20억이었고, 1960년대는 30억이었고, 1975년대는 40억이었고, 1980년대는 45억이었고, 2000년대는 75억이 될 것이고, 21세기에는 그 배인 153억이 될 것이라고 인류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구에 일어나는 기근 현상과 인구 폭발의 역비례는 가히 죽음을 예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그것은 온역(전염병)입니다.

누가복음 21장 11절에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예수께서 예언해 주신 끝 날 징조의 목록 중에 하나입니다.
‘온역’은 무서운 전염병을 말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온역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천연병으로 보는가하면, 또 어떤 학자들은 흑사병으로 보기도 합니다.
1347년에는 세계 인구 1/3이 흑사병으로 죽은 기록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1918년에는 원인 모를 유행성 독감이 2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런 공포의 결과 미국 의회는 1976년에 2억의 미국인들에게 스와인 독감 예방 접종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정도였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8절에 단 한번의 재난으로 지구 인구의 1/4이 전쟁, 기근, 질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기 나오는 ‘사망’은 온역을 가리킵니다. 지금 전세계가 만난 온역 재앙중에도 제일 무서운 것은 성병입니다. 지금 아프리카에는 임신부 40%가 성병에 걸려있다고 합니다. 스웨덴 같은 나라는 성병이 지난 10년 동안 750%나 증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976년 오타와에서는 약30%의 성병 전염자가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1977년 미국의 임질병은 21%로 증가해서 그 해만 250만 명이 앓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 80만 명은 이미 죽음에 이를 지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카나다에서는 근년에 성병이 2배로 늘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15세 이상, 24세 이하의 젊은 층이라는 사실에서 충격을 더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 성병은 21세기가 무너지는 무서운 인류의 재앙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대 재난의 목록 중 이 ‘성병’이라고 하는 온역은 인류가 자멸에 이르는 무서운 천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즐거움 가운데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성생활은 없다고 하였습니다(마22:23-33).

Ⅱ. 하늘의 징조

누가복음 21장 11절은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1장 25절에도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하는 ‘하늘’은 지구를 싸고 있는 대기권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하늘의 징조는 대기권의 이상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끝 날의 징조들 가운데 땅의 징조들 뿐 아니라, 하늘 대기권에서도 사람의 힘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징조(재앙)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대기권 내에 일어나는 이상한 징조들은 불규칙스러운 기온 변화들로 말미암아 사람이 살고 있는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실제는 예수 재림과 함께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 버리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져 버리는 마지막 현상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정돈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출현을 말하는 것입니다(벧후3:10, 계21:1, 마24:29).
지금 다수의 천문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태양 뿐 아니라 태양을 중심하고 돌고 있는 수많은 태양계에 이상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변화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들이 우리 생존과 직결하고 있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지구촌의 사람들은 가히 불가해한 것이요, 또 불가항력적인 대 자연의 이변에 시달리며, 불안과 공포를 직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세기의 과학 문명이 대 자연의 이변 앞에 속수무책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인류와 인류 역사의 미래를 바르게 예언하여 주는 자가 있었던가 그들이 고대 애굽 궁중의 점성술 학자들이었던가 그것이 고대 바벨론의 궁중 철학자들이었던가 그것이 저 헬라의 이른바 지자(知者)들이었던가 그것이 저 대 로마의 예언자들이었던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권력의 시녀들로 기생하던 육(肉)들이었습니다. 육은 영의 일에 무익하였습니다.
개인의 미래와 민족과 인류와 인류 역사의 미래를 확실하게, 자신 있게 그리고 소망 중에 예언한 진리가 있다면, 바로 예수 자신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종말의 교훈뿐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필연적인 종말을 예고하였습니다. 그것은 우주적인 종말이 될 것이고, 벗고자 함이 아니고 덧입고자 하는 종말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잃고자 함이 아니오, 새 것을 얻고자 함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절망하고자 함이 아니오, 소망하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나타날 대 종말의 사건이지만, 그를 믿는 신자들에게는 ‘징조’의 사인(sign)을 통하여 그날, 그 때를 깨닫고 준비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주적인 복음 전파 운동! 세계 선교 운동!
우주적인 적 그리스도 운동! 거짓 선지자 운동!
우주적인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온역, 그리고 대기권의 이상 변화! 이른바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징조!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눅21:28)!
바로 영계와 자연계의 징조를 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일어나야 합니다.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깨어야 합니다(마24:13). 성경을 읽고 깨달아야 합니다(마24;15).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눅21:36).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마25:21).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마25:45). 그러므로 시대의 징조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의 등대 불입니다. 아니 예수 재림의 선구자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될 세계 선교의 촉진제가 될 것입니다(마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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