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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사함의 기쁨 (시 3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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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다루는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죄사함을 받는 문제입니다. 이 것은 한번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마지막 순간, 즉 죄와 상관이 없게 되는 순간까지 우리는 이 죄사함의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시편 32편은 죄의 문제를 다루는 가장 위대한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여 기서는 매우 긍정적인 면에서 이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죄사함 받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기쁨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1절에 그 주제가 나 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즉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는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32편 전체의 주제가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진술을 함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마지막에 는 하나의 명령체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즉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1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우리의 죄가 사해질 때

이렇게 소리치며 기뻐해야 될 이유들을 이 시편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 다.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을 여기서 말해주고 있습니 다.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할 때 우리는 큰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죄와 회개, 이런 것은 별로 좋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참 기쁨은 우리의 죄가 사해질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이 세상의 태도는 죄에 대하여 눈감아버리는 태도입니다. 죄가 없는 것처럼 가장을 하 는 것이 세상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태도는 죄에 대해서 눈감아버 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태도도 아닙니다. 엄숙한 이 죄의 실 재를 그대로 직면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대한 해 답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시편을 분석하면서 이것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1절과 2절에서 죄 사함 받음에 대한 교리가 진술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부분 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중요한 모든 것은 이 교리에 근거해야 하기 때 문입니다. 3절로 7절까지는 죄를 짓고 죄사함 받은 그 체험을 진술하고 있 습니다.

 여기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8절과 9절에서 는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것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절에서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사함을 받은 죄인은 참으로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합니다.

 이제 다시 돌아가서 1절과 2절에 있는 죄사함 받음의 교리에 대해서 생각 해보겠습니다. 이 두절을 잘 살펴보면 죄에 대한 세가지 단어가 나타납니 다. 이 세단어는 5절에 다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세단어는 죄를 설명할 대 구약에서 즐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다윗은 회개의 시인 51편에서도 이 세단 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세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죄

먼저 '허물'이라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말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고의적으로 법을 범하다'는 그런 말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두번째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죄'라는 말인데, '잘 못을 범하다''실수를 범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기준이나 수준에 도달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해야될 것을 아직 못한 상태를 의미 합니다. 여기 헬라어에 해당하는 말은 매우 흥미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 다.

 이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했을때, '표적을 맡추지 못했다''표적에 밧나가 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 25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 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어떤 영국의 설교자가 이 말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영국에는 호위병이 있는데, 이 호위병을 선발하는 기준에는 키가 2m가 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습니다.

 사실 1cm라도 작으면 거부를 당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기를 이 하 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표준에 크게 미달됩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이 표준에 근접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사람은 다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죄 라는 말을 생각할때 이런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우 리가 최선을 다해도 무익한 종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 는 동안 최선을 다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늘 미달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번째 단어는 '죄악'이라 단어인데, 이것은 우리 태도와 관련된 말입니 다. 즉 우리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속이 뒤틀리고 비뚤어 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의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활을 못 쓰게 만드는 여러가지 요소를 주님이 나열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아주 심각한 것은 우리를 놀라게 만들지요. 그런데 그중 어떤것 은 조금 괜찮은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시기하는 것, 교만 한 것 등 이 발로 그러한 종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악하고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것을 늘 대면하며,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속 이 부패한 죄성을 늘 가지고 살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우리 생각 속에 들어오게 될 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 시편 기자가 고백할 때 이 세가지 종류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아주 자의적이고 적극적으로 범하는 죄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에 늘 미달하는 죄, 그리고 우리 속으로부터 솟아나는 부패한 성향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가리우시는 하나님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이 세가지 문제를 해결하시는 세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첫째 '사함을 얻고'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 는 뜻인데, 기독교의 모습과도 비교할 수 있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처음 모습은 죄짐이 너무 무거워서 등이 굽어진 모습이지만, 그 러나 십자가 앞에 섰을 때 그 죄짐이 다 굴러 떨어져 없어집니다. 구약에도 완전히 죄를 없애버린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즉 자기 등뒤로 버린다는 설명 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가리움을 받은'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눈에 보잊 않도록 가리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보이지 않도록 가리운 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잊어버린 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직시할 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는 한편자 로는 우리으 부족한 것, 즉 우리의 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방법으로 세번째 단어 '정죄를 당치 않은'이라는 말 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큰 빚을 청산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며칠전 제가 TV를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영국은 지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빚 을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TV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인터뷰를 보았 는데, 어떤 사람의 빚이 누군가에 의해서 다 가아진 사실을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이제는 그 붑 에게 더이상 빚을 독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놀라운 진리가 아닐수 없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여기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 다. 여러분들 개개인은 죄사함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이것은 죄사함 받음의 교리에 내포된 진리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죄사함을 받는가

그 다음 3절부터는 죄사함 받은 사람의 체험담이 그려지고 있는데, 죄사 함 받게 되는 이유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3절과 4절은 다윗이 어떻게 해 서 잘못되었는지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에 간사함과 거짓이 없는 사람 의 죄가 사함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즉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 속직해지는 것, 그것이 죄사함 받는 한 비결입 니다. 사도요한이 말하기를 "우리가 죄없다 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다윗의 간증 가운데 첫째는 자기가 죄지은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죄지음으로 자기에게 비참한 일들이 생긴 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적인 병의 증세가 나타나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증거들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잃어버리는 그 이유는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수년 전에 지은 죄가 그런 부정적 인 영향을 미칠수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다윗이 어떤 사건을 지목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과 12장에 기 록된 사건은 바로 지금 이렇게 고백하기 약 1년전 즈음에 범했던 사건일 것 입니다.

 사무엘 기자가 전해주지 않은 그 내면적인 일을 다윗이 지금 우리에게 말 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숨기려고 했을대 그속에는 평안이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자기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는 기쁨을 고수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 양심이 고통가운데 있었고 육체가 질고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이라는 선지자를 보내어 비유의 거울을 통해 다윗은 자기를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내 죄를 인정했다"고 말했습니 다. 바로 그것이 전환점입니다.

 사실 이 전환점에 도달한다는 것이 다윗에게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 일이 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이 전환점에 오기까지 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을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이 사용한 이 단어는 매우 흥미있는 말입니다. 1절에서 사용했던 단 어와 매우 흥미있는 말입니다. 1절에서 사용했던 단어와 같습니다. 즉 하나 님께서 죄를 가리우신다는 그런 뜻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덮으실 수 있지만 우리는 덮으면 안되고 드러내야 한다는 그런 뜻을 여기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달리 생각할 수도 있습니 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우리 죄를 다 드러낼때에, 그때에 하나님은 그 죄를 덮어주시고 용서해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께만 범죄하여 주께 내 죄를 아뢰고

이제 다윗은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 또하나의 중요한 진술을 5절에서 말하 고 있습니다. '주께 내 죄를 아뢰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다른 사 람에 대해서 잘뭇을 범했을때 그 당사자와 그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그 러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경우 이것을 주님과 해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 리가 범한 죄의 당사자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운전을 잘못해서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합시다. 그 러면 당신은 상처입은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주 너그러운 마음으로 당신을 용서해준다고 해도 당신은 법정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법은 그 사람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법정에 서야만 됩니다. 바로 이것을 지금 다윗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 실 그는 밧세바에게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아에게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다스림 나라에 대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하나 님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시편 51편 4절에서도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 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항상 이런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영국에 그래미엄 그린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그가 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무신론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이 고백하기를 "이 세상에 내가 글 에게 나의 모든 죄책을 고백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미안하다고 마라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런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모든 죄를 사함받을 수 있는 길이 지 금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관심을 가지게 됨을 고백합니다.

 6절에서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하라는 논조의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와 같이 이렇게 하시오"라고 말입니다. 사실 다 웃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생 활속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및지 못하는 그럼 부분이 있습니까이런 사람 이 있다면 저처럼 기도드리십시오.

 즉 여기에 있는 기도는 죄사함을 위한 참회의 기도를 의마하는데, 모든 사람들은 저처럼 기도를 하십시오"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 하나님을 찾을마난 때에 그때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리 시오"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 가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홍수의 범람함을 말하고 있는데, 즉 죄사함을 받 을 때에 그 사람은 어떤 여러가지 역경에서 보호함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복 을 누리게 됩니다.

 그 모든 고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7절에서 다윗은 사람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앞으로의 생애에 있어서 이런 확신은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제 나단 선지자 앞에서 다윗이 자기 죄를 고백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죄사함을 약속했습니다. 다윗에게 "왕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습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다윗의 생애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말이라고 도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죄사함을 받았고 그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의 생애는 이전과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하 후반부를 보십시오. 다우시이 생애가 어떻게 됐습니까 다윗의 생애는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했습니다. 그의 아들 중의 하나가 이종 누이를 범했습니다. 여러분 가족 가운데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일 까요 반란도 일어났는데, 그 반란의 주모자는 바로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디오피아에서 친구 몇사람이 있습니다. 헬라시 국왕이 마지막 통 치를 할 때에 그 자신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그 왕의 친척을 잘 아는데, 이 일로 인해 그 왕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는가에 대해 들었습 니다.

 이제 다윗은 그의 범죄로 그의 생애에 나타나게 될 것에 대해 준비하는데 필요한 확신으 7절에서 가지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나 의 은신처시요 피난처'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제 앞으로 나타 날 많은 고난에서 나를 보호하실 분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시편 34편 19절에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의 노래 로 나를 에우시리이다"라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라는 확신을 갖게 됩 니다. 물론 이와같은 고난은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나타난 일시적인 고난 인 것을 다윗은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속에는 죄사함 받은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어두 운 고난의 여정을 걸어가는 그 순간 순간에도 죄사함의 기쁨을 맛보았습니 다.

 8절과 9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행 하실 것이며, 인도함을 받는 사람의 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문맥을 잘 살펴 보십시 오. 즉 어떤 사람을 인도하신다고 그럽니까 과거의 생애가 아주 뒤죽박죽 된 그런 사람의 생애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때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며 죄를 많이 범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런 부끄러운 생애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 앞 에 솔직히 드러낸다면, 그래서 죄사함을 받고 죄사함의 기쁨을 누릴수 있다 면 그 다음에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다윗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약속이 얼마나 필요한 가를 깨닫게 됩니다.

과거에 실수를 범했다면 미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사함 받은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인도하리라"하십니다.

 이제 인도하신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8절에 인도의 원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는 인도함을 받는 자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와같은 약속이 성경에 거듭 강조되어 있습니다.

 "범사에 주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예수님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되리라."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인도하십니까 죄사함을 받은 사람의 생애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가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입니 다.

 감정이 아닌 마음을 사용하라

구체적이 방법이 8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가르치리라. 내가 훈계하 리라."즉 우리의 마음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마음을 사용해야 된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있는 "너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의 그 이유가 무 엇입니까 즉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7절에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됴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가 범하는 어리석음은 내 감정에 의지하는 그런 어리석 음 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느낀다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 닙니다.

 이제 어떤 상황에서 다윗이 이와같이 고백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 다. 사실 그는 지붕에 있을때 자기의 감정에 의해서 지배를 받았습니다. 우 리가 만약 우리의 생애를 감정에 의해서 인도를 받으며 산다면 우리는 계속 잘못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사용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의 말씀이 호소하는 곳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죄가 호소하는 곳은 육체의 느낌입니다.

 이것을 언제나 성경에서 발견하게 돕니다. 사도바울은 무슨 결정을 하든 지 간에 자기의 마음을 사용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에 보내려 할 때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사용했 습니다. 어떤 초월적인 감정에 으해서 결정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에 의해서 새로워진 마음에 의한 결정입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은 우리가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 습니다. 즉 말이나 노새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호소할 수 없습니 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도하실 때 마음에 호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도하실 때 마음에 호소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걸음은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걸음이 됩니다.

"내가 너를 마음대로 조정하리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강요하 리라"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볼 때 강제로 죄짓지 않도록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자발적으로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발적인 순종이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이 채찍질해서 단련하십니다.

 요나가 잘못 선택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징계했습니다. 어려운 경험을 통 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자기에게로 이끌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의 인간으로 대해주십니다. 그저 자갈을 멀여서 조정하는 동물처럼 취 급하시지 않고 우리를 인간으로 대우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지도하심은 실제적인 지도하심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조명시켜 주셔서 이제 하나님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게 합니다. 즉 '이길로 가 야 된다'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편 119편 10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 의 말씀은 내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그리고 다윗에게 특별히 의 미있는 것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지도할 때에 내 눈이 너 를 주목하면서 지도하리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눈으로 보신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눈으 로 다윗을 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실수를 범한 다음에 하나 님께서 "내가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너를 보리라"라는 말씀이 그에게 얼마 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필요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할 시험밖에는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늘 보시면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다 아십니 다. 여러분들의 한계도 다아십니다. 이와같은 인도하심을 죄사함 받은 자들 에게 주시마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다윗은 죄사함을 받아 기뻐하게 됩니다.

 죄사함을 받은 자의 모습

결론을로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두가지 상반된 것을 보여줍 니다. 10절에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반면에 죄사함을 받은 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으 묘사하는 세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즉 '주 님을 신뢰하는 자'라고 자기 자신을 묘사합니다.

 즉 악한 사람과 대조되는 말이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 신 뢰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는 방식 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믿는 마음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기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 에 평생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게 됩니다.

 두번째 단어는 '의롭다'라는 단어입니다. 의인이라는 단어를 대할 때 우 리들 대부분에게 있어 이 단어는 과분한 말처럼 생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말입니다.

 또한 우리의 본성의 견지에서 볼 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의인이라는 말을 썼을 때는 누구를 가리켜 썼습니까 의인이란 하나님의 법 에 따라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다 없애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처럼 다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있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사람을 가리켜서 구약은 의인이라고 합니다.

 세번째는 '마음이 정직한 자'라는 말입니다. 즉 속에 가리운 것과 거짓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우리의 실수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솔직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땅바닥에 떨 어졌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들림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제 끝으로 이런 사람이 누리는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끝 없는 인자하심을 받는 것이 그의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에 사람을 설명하는 두 단어 중에 하나가 인자하심입니다. 그가 죄를 인정하지 않는 그때도 계속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즉 나단을 보내시는 그런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가 범죄했지만 그래도 다 시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그런 사랑을 의미합니다. 결코 실패가 있을수 없는 끊임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이 사랑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를 둘러쌌습니다. 다윗은 참회사를 쓸 때에 이런 말로 시작을 했습니다."허 물의 사함을 덩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을 여러분 생활 속에서 경험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생애가 전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열려져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결코 해결하지 못할 그런 과거의 잘못, 그것을 아직도 그대로 가지고 계십 니까 지체하지 말고 과거의 죄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고 하나님께 해결 함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신다면 시편에 약속된 모든 복의 약속이 바로 여러분에게 적용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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