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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깊은 신앙으로 가는 길 (고전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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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란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자체가 메시지다. 고린도전서 1장은 ‘십자가란 무엇인가’, ‘십자가의 방법과 내용들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왜 꼭 십자가라는 방법을 사용하셔야 했을까 신자들이 왜 꼭 그 방법이어야 했느냐 묻는 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신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들이 볼 때는 미련한 것이다. 그러나 구원 얻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된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구원이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서는 이 사실을 말하면서 분쟁에 관한 경고로 가득차 있다. 고린도 교회는 구원문제가 자신들에게 근거가 있다고 생각해서 일어난 싸움들이다. ‘나는 너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 점을 사도 바울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너희의 무엇이 남보다 낫다는 말인가 너희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 너희가 만든 것이 무엇인가 너희가 만들고 너희가 생각하는 그래서 네가 얻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 아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요즘은 전도가 기술화 되어가고 있다. 전도인들이 여러 가지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방법들을 고안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방법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열심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전도를 잘하는 것, 테크닉화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정성’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에 대한 우리의 열심이고 정성이지 ‘그래서 전도가 잘된다’는 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도란 ‘미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는 ‘방법’을 우리에게 요구하여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방법으로 해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 사건을 살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사사기 6장에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다. 그에게 전하는 어떤 명령을 듣고 기드온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명령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제사를 드릴테니 받아 달라고 제안한다.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
가 드리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삿 6:19-21)”
무교전병을 반석 위에 두고 국을 쏟았다. 그 후에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이 대매 불이 나왔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기드온으로부터 불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반석에서 나왔다. 기드온은 단순히 지팡이가 되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일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기드온은 지팡이로 쓰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기드온을 용사로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기드온을 들어 쓰셨으며, 그 지팡이를 움직이므로 시선을 끌었다. 시선을 반석 앞으로 잡아 끌었고 불이 실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전도’는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전도함으로 모든 사람의 시선을 우리가 믿는 것과 전하는 것으로 이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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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온다. 그것이 방법이 되어서 한 영혼이 중생하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한 생명을 구원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일에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지팡이로 써서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시선을 끌어 모은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겠다고 복음을 전하도록 전하도록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를 해야만 구원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 일이 이루어지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 우리들을 들어 쓰시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우리를 동참케 해 주시는 것이다. 그 자체가 은혜이다. 그래서 전도는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는 내 능력 내 수준에 의한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값없이 부르셨고, 다만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사 구원하신 것처럼 오늘도 한 영혼을 구원하시며 그런 일에 나를 쓰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전도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이 가장 잘 나타내는 방법 또한 전도이다. 우리는 그렇게 쓰임 받고 그것의 방법 자체가 전도라는 것으로 그렇게 그 일에 일조를 해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오늘도 역사 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사람들을 사망의 자리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사역을 하는 줄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그런데 전도를 자기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전도를 해서 열매 없는 사람을 깔보거나 자기만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착각은 전도를 하고도 감사가 없다. 지팡이 같은 차원에서 전도자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전도에 있어서 미련한 방법을 동원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안다면 자랑대신 늘 감사가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전도란 한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제일 나쁜 방법인 셈이다.
전도란 논쟁이나 기적적 증명이나 또는 권세 같은 것이 전혀 배제된 평범한 신자의 가장 평범한 권면이기에 사실 죄의 사슬과 그 권세를 깨뜨려 죽은 생명을 소생시키는 방법으로는 가장 무력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 무력한 즉, 미련한 방법을 쓰셔서 하나님께서 지금 구원을 베푸시며 역사하심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
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
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
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6-31)”
하나님께서 그의 일군을 부르실 때 지혜자나 능한 자를 뽑지 않으신다. 세상의 지혜 있는 자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와 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깨우쳐 주시고 값없이 주셔야 얻는 것이다.’ 이런 을 모두 구원을 얻은 자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자신이 얻은 구원과 자신이 깨달은 복음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전도에 기도가 없어진다. 방법을 기교화 하고 정교화 해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게 되어 서로 다투고 경쟁만 한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은 은혜를 구하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시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요 구원의 문을 지금도 열고 계신 것이기에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 되는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누가 마음이 변하여 감동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오늘도 죄의 사슬을 깨뜨리시며 어두움에 있는 영혼들을 불러내신다는데 가만 있을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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