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고전 15:7-10)

첨부 1


신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뜨겁게 감사하는 사 람이 있었다고 하면 아마 사도바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이 바울의 신앙고백을 상고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람임에도 그러한 자신을 우 리 주님이 선택하셔서 성도가 되게 하시고 사도가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삭되지 못하여'라고 하는 말은 신약성경 원어인 헬라어로 '엑스트로마티' 인데 이 말의 의미는 '유산하다, 조산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유산(유 산)된 자, 조산(조산)자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임신된지 9개월 10일만에 분 만을 해야 정상적인 것인데, 만일 잉태된지 7개월 혹은 8개월에 해산해서 인큐베 이터에서 자라난 사람이라고 하면 그를 가리켜서 '팔삭(팔삭)동이'라고 말하는 것 이죠. 바울은 자신을 팔삭동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외모로 보아도 결점투 성이였습니다. 그는 미스터 히브리거나 미남자가 아니었습니다. 몸은 외소한데다 가 안질까지 앓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멸시천대를 받으며 조롱을 당 하고 또 미움을 샀던 그런 팔삭동이의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 에 있어서도 신앙의 깊은 연조도 없었고, 다른 사도들처럼 사도로 인정받을 만한 증거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경험이 있 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현장에서 그 고난을 목도했습니 다. 그리고 부활승천하신 모습도 목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체 험이 없는 영적으로 팔삭동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두번째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하는 고백 을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란 헬라어로 '호 에락키스토스( )'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은 '작은'이라고 하는 뜻을 지닌 미크로스( )의 최상급이 되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최상급의 작은 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비교적 작은 자 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최하의, 가장 작은 자라고 믿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 보면 '모든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셨 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보십 시다.

대한민국에는 1,200만이라고 하는 많은 크리스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소천한 분 가운데는 어 쩌면 주기철목사님이나, 손양원목사님같은 분을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분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분이 누구일까요 어쩌면 한경직 목사님이 나 김창인목사님같은 분일런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여 예를 들면 사도바울 은 '내가 대한민국 1,200만 크리스챤중에서 최고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내 가 제일 밑바닥에 있는 사람이다'그렇게 믿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계 17억 5천 9 백만 크리스챤가운데 사도 바울은 '나는 제1인자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제 일 밑바닥( )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믿고 생각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1,200만 크리스챤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고 당신의 위치가 어디입니까라고 묻 는다고 하면 '내가 제일 밑바닥에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내가 제1인자입니다, 제2인자입니다'라고 생각하고 그렇 게 고백할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제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면류관은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에게 주실 것이고 두번째 면류관이나 세번째 면류관은 아마 내게 주 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 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오히려 `나는 천국에서 꼴찌의 사람이다. 제일 밑바닥 에 있는 사람이다'이렇게 생각하고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신들 메를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는 고백을 했던 세례요한처럼 '나는 가장 미천한 사 람'이라고 고백을 한 것이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그렇게 미천 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로서는 사도 베드로 보다도 더 훌륭한 믿음을 가진 분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사역을 위해서 !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언제나 자기를 낮춘 겸손한 사람이었 습니다. 모든 성도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한분 한분이 우리 순복음교회에서 제일 꼴 찌의 인물이요, 제일 밑바닥에 있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습니 까 아마 그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을 수 있는 것,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뭐냐하면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믿어진다하는 겁니다. 할렐루야! '사람은 누구나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누구나 자존심 을 갖고 산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존심이 때로는 이 세상을 굳세게, 담대하게 살 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그 자존심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심으로 바꾸어지고, 고집과 완고함으로 변화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꼴불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 존심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될줄로 믿습니다.

어떤 부흥사의 수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어느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데, 점심시간이 되었더랍니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더니 아주 몸집이 크고 눈 이 소처럼 크게 번쩍이는 분이 달려오더니 인사를 하면서 가방을 받아듭니다. 그 리고서 또 빨리 달려 나가더니 승용차 문을 열어 드리면서 어서 타십시요하기에 그 부흥사가 속으로 '아마 이 양반이 교회의 사찰이겠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려서 식당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좇아 나오더니 그 가방을 들고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에서는 부흥사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사회에 나가 보니까 별거 아니었거든요 그 래서 도대체 이렇게 가방을 들고 따라나온 이사람이 누군가 궁금해서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조용히 물어봤습니다. 이 분이 누굽니까그랬더니 대답하기를 아니, 이 분을 모르십니까 이 분은 대법관이신 아무개 장로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 늘 우리는 항상 나를 낮추면서 겸손함을 지니고 살아가야 될줄로 믿습니다.

 세번째로 사도바울은 자신이 핍박자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를 박해했던 사울을 거꾸러 뜨려서 주님의 사도 가 되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죄인의 괴수였던 사 울을 변화시켜 성도가 되게 하셨고, 주의 종이 되게 하신 것은 지극히 크신 하나 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라고 하는 찬송가 405장을 작사한 존 뉴톤( )은 본래 노예상이었습니다. 아 프리카 땅으로 건너가서 흑인들을 붙잡아 배에 싣고가서 팔아먹던 악덕 인신 매매 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은혜를 받아 어느날 거꾸러져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게 되었고, 마침내 주의 종이 되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국 버킹검교회에서 16년 동안 목회를 했고, 이어서 올리교회에서 27년 동안 목회를 한 참으로 아름다운 생애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날마다 날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될줄 로 믿습니다. 전하지 아니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영혼을 구원해 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성경을 들고만 다니 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 말씀을 열심히 남에게 전해야 만이 비로소 그 들이 구원을 받고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녹슨 그물은 그물이 아닙니다. 창고에 쌓아둔 그물은 그물의 사명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그 물은 강으로, 바다로 가지고 가서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을 때에 비로소 그물의 가치를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알고만 있다고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복음을 실제로 가족들에게, 이웃에게, 친척들에게 전해야만 이 참다운 복음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전도를 하고 계십니까 '나만 구원받아 천당가자'하고 안일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그것은 녹슨 그물이요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대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담대하게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될줄로 믿습 니다.

지난 주일에 박도라( )권사님이 소천하셨습니다.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셨는데, 자녀들을 보니까 얼마나 효성스러운 분들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특 히 감사한 것은 박도라 권사님이 그 가문의 믿음의 선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들에게 전도해서 다 신앙생활 잘하게 만들어 놓으시고 또 사촌까지, 모든 친 척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친척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도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가정을 복음화시키고 이웃을 복음화하며 친척들을 주앞으로 인도하여 그들이 구원 받도록 하는 그런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를 했는데,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찌하면 좀 더 평안할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예수를 믿을까 어떻게 하면 평안하게 살아갈까 그런 차원을 넘어선 사람입니다. '예수믿고 평 안하고 복받고 성공하고 쉽게 안일하게 살겠다' 그런 생각을 뛰어넘은 사람입니 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하고 봉사하 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수고한다'고 하는 말은 '에코피아사( )' 라고 하는 헬라어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지치다, 열심히 일한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육체적인 수고뿐만 아니라 정신적.영적인 수고까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지칠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하면 다른 사람은 수고하게 하고 나는 평안하게 교회에 다닐까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아닙 니다. '누구보다도 더 많은 수고를 하겠다. 지칠 정도로 수고를 해야 되겠다' 그 런 생각을 갖고 열심히 수고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고한 것이 자기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믿은 것입 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보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렇게 고 백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고난을 달게 받 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모든 고난을 감수하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아갔습니다. 1,2,3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또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받들어 섬기 면서 수고를 넘치도록 한 것입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 없이 맞았습니 다. 여러번 죽을뻔 했습니다. 유대인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이나 맞았습 니다.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았습니다. 세번 파선하는 그런 고통도 경 험했습니다. 여러번 선교여행을 했는데,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산과 광야와 바다의 위험, 거짓형제들을 통한 위험 등을 경험했습 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며 춥고 헐벗는 그런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고사하고 날마다 그 속에 눌리는 고통이 있 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는 염려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 회를 부흥 성장시킬 수 있을까 하면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울부짖고 부르짖는 일 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성도가 약하면 자신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약함을 느꼈습니 다. 누가 실족하면 자신이 실족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실족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러한 수고로 많은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했고, 많은 교회들을 세워서 키워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빌립보, 데살로니가,에베소,골로새,고린도 등지에 수 많은 교회들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 아프리카 말라위와 모잠비크, 스와질랜드를 다녀왔는데, 선교사들 이 무척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다음에 설교도 했습니 다만 그 보고서를 생명의 양식에 연재를 했습니다. 그 글을 통해서 우리 사돈되시 는 김용성( )장로님이 은혜를 받고 '나도 말라위에 교회를 하나 세워야 되 겠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송금을 해 오셔서 아프리카에 교회를 하나 세우도록 보 내 드린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은 그런 넘치는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나름대로 많은 수고를 했고, 또 주님을 위해서 오늘날도 수고를 해 나가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렇게 주님을 위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수고를 많이 했고, 또 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로 수고를 했다고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연약하 고 욕심이 많아서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기기 쉽습니다. 많은 은혜 를 받았음에도 감사하기는 커녕, 조그마한 욕구불만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기 쉬 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여러분과 저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내가 성도가 되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내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뿐이 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팔삭동이와 같은 내가 성도가 되고 일꾼이 된 것 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모든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믿고 고백할 수 있고 그런 겸손한 믿음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과거에는 주님을 핍박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박해했던 내가 이제 성 도가 되고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해 가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영광받고 존귀받고 대접받고, 수고와 어려움은 남에게 맡기고, 나만 평안한 자리에서 영광을 받고 있겠다' 그런 생각을 결코 가져서는 아니될줄 압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더 많은 수고를 해 야 되겠다' 그런 결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 나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 지기 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