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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푸는 은혜 (고후 0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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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의 주요 사역 가운데 하나는 유대 지방의 가난한 성 도들을 위한 특별 '구제 헌금'을 모금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전에도 한 번 이같은 일을 한 적이 있는데(행11:27-30), 이러한 일을 다시 하게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이 있다(행20:35) 하는 주님의 교훈을 기 억하여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가난한 자를 물질적으로 돕는 것 외에도 마음 속에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 교회가 가진 물질을 바다 건너 유대인 교 회 성도들과 함께 나뭄으로써 교회 연합이 견고하게 될 것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유대인들에게 복음에 빚진 자로 보았으며( 롬15:25-28) 이 특별 헌금이 그 빚을 갚는 한 가지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고린도 교회는 그들도 유대 교회를 위하여 구제 연보를 할것 을 약속 하였었지만 그 약속을 마게도냐 교회처럼 잘 지키지를 못했던 것 입니다. 사실, 일년이라는 세월을 그냥 흘러 보내어 버렸습니다(8:10). 그 러면 무슨 이유로 그 일을 그렇게 오래 지연 시켰을까요 그것은 교회의 영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가 신령하지 못하면, 이웃에 대한 관심이나 관대함도 없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이 베푸는 구제 헌금에 동참시키는 것이 어 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베푸는 것이 높은 영적 수준의 원리임을 제 시함으로 자원하여 참여 하도록 유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13-15절).

 1.은혜를 받으면 줄수 없는 형편에서도 주고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 다(1-2).

 바울이 본문 1절에서 예를들고 있는 마게도냐 교인들은 극심한 고난을 겪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후하게 구제 헌금에 참여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환난을 겪은 것이 아니라, 본문 2절 말씀처럼 많은 환난 을 겪었는데 극한 가난도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절대적인 빈곤 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해 이 말씀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앞으로도 가질 희망조차 없는 형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어려운 형편은 부 분적으로는 그들의 신앙 때문에 생긴 일들이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우상 을 섬기기를 거절하므로 직업을 잃고, 상인 조합에서 쫓겨났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극한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관대히 다른 사람들의 어려 움을 도와 주는 헌금에 적극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혹독한 시련과 극한 가난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있었지만 그들이 은혜를 받으니 놀라운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도리어 구제 헌금을 받아야 할 그들 이 은혜를 받으니 넘치는 기쁨과 넘치는 관용으로 구제 헌금에 적극 참여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은혜로운 기적인 것입니다. 고후 6:10절에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고 베풀지 않는 핑계로 이용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헌금을 드리고 남을 구제하는 일은 부요나 환경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격리되어 있다는 진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새로운 교회 건물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몇몇 유 력한 성도들은 '경제적 상황'을 이유로 들면서 건축 계획을 반대하였습니 다. 사실 공장들이 파업 직전에 있었고, 경제 상황도 가이 좋지 않을 때였 습니다. 그때에 교회를 짖는다는 것은 모험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충분히 있었기에 파업과 도산과 휴업과 다른 경제적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교회당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란 환경을 초월하여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 어야 합니다.

 2.은혜를 받으면 전심으로 줄 수 있게 됩니다(3-4절).

 관대히 주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전심으로 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인색한 교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내가 어려움을 감 수하고서라도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내게 있어서는 오히려 그 말 씀이 주고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더욱 약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권면은 독촉이 아니며 설득이 아 니리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요, 은혜를 심는 행위이므로 억 지로나 인색함으로 해서는 아무런 이득이나 축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즐겨 내는 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를 돕기 위하여 헌금을 하겠다고 간청하는 자를 과연 몇명이나 볼 수 있습니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본문 4절에서 이러한 자 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드리고 싶기에 드리며, 자발적이고,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외부의 어 떤 압력이나 눈치 때문에 마지 못하여 하는 헌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드림은 이제 냉철한 계산에서가 아니라,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이요, 따뜻한 마음으로 말미암은 연보가 될 때에 우리에게 기쁨으로 돌아오는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은혜를 받으면 주께서 주셨듯이 줄 수 있습니다(5-8절).

 예수 그리스도는 섬기는 일에서나, 고난에서나, 희생에서나 어느 면으로 나 늘 신자들이 따라야 할 귀한 본이 되십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바로 그 본을 본 받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첫째로, 마게도냐 교인들은 그리스도처럼 자신들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을 위하여 드렸던 것입니다(5절).

만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우리의 물질을 드리는 데에는 아무 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다른 사람 들을 위해서 우리의 소유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 면서 이웃의 필요를 무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 그 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 분 자신을 주셨습니다(갈1:4,2:20). 우리 도 당연히 주님처럼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기를 원 하시는 것입니다(5:15).

둘째로, 마게도냐 교인들은 그리스도처럼 사랑으로 드렸습니다(7-8절) 이 말씀은 각양 은사를 다양하게 받은 고린도 교인들(고전1:4-5)에겐 큰 책망 의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극한 가난이 넘치고 있었으나(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 인들은 영적 은사에 풍족 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약속을 지키고 구제 헌금에 동참하는 일에 나태하였던 것입니다.

영적 은사로 남을 섬기는 헌금 드리는 일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나 는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기에 구제 헌금에 참여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 연보에 대한 권면이 명령으로 생각되는 일이 없도록 하 기 위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그렇다 고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명령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헌금을 해야 한다고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구제하고 있 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알리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헌금을 해서 남을 도울 수 있다면 여러분의 사랑이 단순히 말에 그치지 않는 참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마게도냐 교인들은 희생적으로 드렸습니다(9절).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부요하신 분이 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고 하셨습 니다. 왜냐면 우리로 하여금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롬8:17)된 우리들은 마게도냐 교인들처럼 주님의 본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4.은혜를 받으면 기꺼이(자원함) 줄 수 있습니다(10-12절).

 약속과 실행 사이에는 참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년 전에 고린도 교 인들은 이 특별 구제 헌금에 동참 하리라고 디도에게 약속하며 자랑했습니 다(6절). 그러나 이들은 이 약속을 이행치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원하는 마음이 결여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제는 자원함으로 해야지 누구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자원함'과 '행함'을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이둘 은 늘 병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원함이 진실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행함'도 따라야 합니다(빌2:12-1 3,본문11절). 바울은 자원함이 행함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 다. 하나님께서는 '손의 선물'이 아닌 '마음의 선물'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비율을 보십니다. 더 드릴 수도 있었는데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주목해 보십니다. 만일 더 드리기를 원했는데 더 드릴 수 없었다면 그것도 하나님께서는 주목하십 니다. 얼마를 소유하고 있든지 우리가 기꺼이 자원해서 드리는 신자가 되 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헌금의 용도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중요한 헌금의 명목 중 하나가 구제였습니다. 오늘날 헌금의 대부분이 교회 자체의 재산 증식 에 지출된다면 바람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은 체면치레나 제 몫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순전히 은혜로 인한 자발적인 행위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헌 금은 모두가 불순한 동기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없 는 무의미한 헌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올바른 헌금 생활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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