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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하스의 불신앙 (왕하 16: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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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역대 왕들 중에 가장 어리석었던 왕이 있었다.

무었이 그를 어리석게 만들었는가 하면 신앙으로 무장되지 못한 그의 인격이 결국 그를 가장 어리석은 왕이 되게 했다.

 그가 바로 나이 20세에 왕위에 올랐던 아하스라는 인물이다.

 아하스 왕은 세상 사람들이 볼때는 참으로 영특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사리에 밝고, 상황 판단에 예민했고, 행동에 민첩했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평할 때 유대 왕들 중에 가장 어리석은 왕이라고 평한다.

 그럼 왜 그런가를 살펴보자.

 이스라엘 나라는 원래부터 그 영토가 자그만했다.

더우기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어서 항상 외부로부터의 침약을 많이 받아 왔던 나라이다.

 그러나 때때로 열강들이 이스라엘을 무서워했던 시대도 있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때에는 천하가 다 이스라엘을 두려워 했었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소명의 소유자인 이사야와 같은 선지들이 있을 때에는 나라가 든든했었다.

 왕들이 언제나 선지자들의 말을 순응하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아하스 왕은 예외였다.

아하스 왕은 선지자의 명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혀 선지자를 명령하는 위치에 있었다.

 아하스가 나라를 다스릴 때 주변국은 아람과 앗수르라는 강대국들이 크게 이스라엘의 위협하는 존재들이었다.

 아하스는 이 두 강대국을 대처해 가기 위하여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 같이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하스는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보기 전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래서 두 강대국중 강하다고 생각되는 앗수르 나라와 동맹을 맺고자 했다.

 그래서 동원할 수 있는 금과 은을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았다.

심지어 여호와의 전에 있는 금,은으로 된 기구들을 뜯어 내고 벽에 붙인 금도 뜯어내고 자기 궁에 있던 귀한 재물들을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예물로 보내었다.

 아하스는 이 금은을 가지고 앗수르왕께 나아가 이렇게 아첨했다.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하소서라고 했다.

 그 결과 앗수르 왕은 아하스의 청을 받아 들렸다.

앗수르 왕은 유다를 괴롭히던 아람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에게 다메섹을 내어 주어 다스리게 해 주었다.

 얼마나 현명한가 얼마나 상황의 판단이 날카로운가 얼마나 행동이 민첩한가

이를 성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실패자라고 말한다.

 아하스가 그때 즉 앗수르를 방문했을 때 그는 그곳에 정교하게 다음어 만든 이교도의 신상을 발견했다.

 그때 아 저런 것이 예루살렘에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가하는 간절한 욕구가 치솟았다.

 10절이다 아하스왕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라고 했다.

 그때 제사장은 우리야였다.

불행하게도 이 우리야는 이사야와 같은 제사장이 아니었다.

우리야는 나뿐 의미에서 어용 제사장이었다.

 이사야 선지같았으면 이 일은 목숨을 걸고 말렸을 것이다.

 그런데 아하스 왕이 앗수르를 방문하고 유대로 돌아오기도 전에 우리야는 새로운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때 돌아 온 아하스 왕은 제사장 우리야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15절에 아하스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아침 번재와 저녁 소제와 왕의 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를 다 이 큰 단에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고 오직 놋단은 나의 물을 일에 쓰게하라 하매 16절엔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의 모든 명대로 행하였더라

아하스는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그 일이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비웃고 조롱하고 있는 것인지를 미쳐 깨닫지 못하였다.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인 것이다.

 1,아하스 왕 같은 사람들

여러분들은 여러분 주위에 아하스왕 같은 사람들을 본적이 없는가

오늘날 교인이라는 이름하에 아하스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예수 믿는다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그 마음으로는 예수와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오늘 아하스 왕도 옛 제단을 성문 밖으로 내 버리지는 않았다.

아하스는 옛 제단의 자리를 성전의 구석진 곳으로 밀쳐 놓았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앗수르에서 본을 떠온 아름다운 우상을 옛 제단의 자리에 놓고 옛 제단은 좀 구석진 곳으로 옮겨 놓고 함께 섬겼던 것이다.

 물론 새로 만든 제단에 정성을 더 기우렸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앗수르의 제단에 정이 들기 시작해다.

정이 들기 시작하니 옛 제단이 가치가 없어 보였다.

아니 생각에서 멀어져 갔다.

 이제 아하스 왕을 꽉 사로 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의 우상 사람들이 다듬어 만든 우상이었다.

 2,오늘의 앗수르의 우상은

그럼 현대판 앗수르의 우상은 어떤 것일까

먼저 아하스가 왜 예루살렘 성전에 본래의 제단을 구석진 곳으로 밀쳐 버리고 앗수르의 우상을 만들어 세웠을까

첫째:앗수르의 제단이 진실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하스는 하나님에 대하여 젼혀 이해를 못하고 살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마치 종교를 시중에 있는 장동 판매기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이 뭔가를 했더니 그 안에서 뭔가가 나왔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아하스왕은 더 멋져 보이는 앗수르의 신상을 크게 만들어 하나 님의 제단이 있던 곳에 두고 하나님의 제단은 구석에 밀쳐 놓았던 것이다.

 옛 제단을 뒤로 밀쳐둔 것은 아므래도 엣것 보다는 새것이 더 새로운 것을 주겠거니 생각되었던 것이다.

 둘째:앗수르의 우상이 더 능력있다고 믿었다.

아하스가 안 사실 중에 하나는 앗수르의 그 아름다운 신상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현재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앗수르의 막강한 힘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성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성고은 나름대로 좋은 것이다.

사람들은 다 성공하기를 위해서 뛰는 것이라해도 틀리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공이라는 것을 위하여 방법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을 보게된다.

 그러나 성공의 목적이 어디에 있으며 또 그 성공의 목적이 무었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우리 성도들이 어떤 목표의 성공을 왜 해야 하는가를 뭔져 따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가 있는 성공을 위해서는 작은 성공 따위는 휘생을 해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닐까

내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되는 것 보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일을 성취하기 보다 성도가 먼저 해야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인가이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자기 양심에도 거리끼는 것이라면 그 일이 론리적으로 생각할 때 성공을 위하여 좋을 것 같다해도 성도라면 그 일에서 손을 떼어야한다.

 아하스는 성공을 왜 해야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능력있다고 생각되는 앗수르의 신상을 성전에 함께 세웠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무었인가 여러분은 무었이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냥 교회에 빠짐 없이 출석만 하는 것인가 설교를 듣고 사회자를 따라 찬송을 부르는 행위들인가 또 나의 어떤 욕구를 만족하기 위한 것이가

아니면 인격적인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의 전 생을 하나님께 내 들이고 또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와 뜻 앞에 성공과 실패의 모든 가능성을 마끼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인가

인간의 마음 속에는 누구에게나 예루살렘 성전처럼 하나님을 위해 신성하게 보존 되어야할 하나님만을 위한 영역, 즉 성전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을 위한여 쌓은 제단이 있듯이 역시 마음의 성전에도 하나님 즉 에수님께만 드려야하는 제단이 잇다.

 그게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게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 신앙은 이런 것이다.

세상에서 실패를 햇어도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감사하는 것이다.

또 성공의 목표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삼는 일이다.

 3,실패한 신앙의 사람 아하스 왕

오늘 본문에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실패한 사람 아하스를 다시 보자.

 아하스는 참된 신앙과의 관계를 완전히 절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져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조금 비껴 놓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하스는 여전히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즉 현대 사람들이 읽지도 않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책을 책꽂이에 꽂아 만 두듯이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옛 제단을 성전 안에 두려고 했었다.

 17-18절 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어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두며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인하여 여호와의 전에 옮겨 세웠더라

그리고 만약에 곤난한 일이 생기면 해결책을 물으려고도 했다.

 오늘 날 우리들은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가

신앙에서 완전히 떠나지는 않지만 그 신앙이라는 것을 한 편 구석으로 밀쳐 놓지는 않았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것을 주일날 교회에서만 필요한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 같으다.

 그래서 교회 왔다가 집으로 갈때는 신앙의 주머니는 교회에 잘 매어 두고 그냥 갔다가 다음 주일에 와서 다시 신앙의 주머니를 끌러서 신앙을 확인해보려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같으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신앙이 아니다.

 내 마음의 첫자리를 주님을 위하여 들이지 못했다면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그것은 신앙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주님은 우리들의 마음 중심에 자리를 두시기를 원하신다.

주님을 위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드림이 신앙이다.

 주님은 우리들의 마음이 둘로 나누는 것을 좋와하시지 않는다.

 사업, 명성, 쾨락,성공,...

이런 것들을 마음에 두지말라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어느것을 사람들의 마음의 첫자리에 두어야하는냐의 결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최고의 자리를 드리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지배하시게 하자.

 나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 라고 고백을 하자.

 아하스 왕은 젊은 나이 36 세에 그의 삶을 끝내고 말았다.

하나님은 아하스를 일직 데려갈 수 밖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히스기야라는 아들이 있었기 대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지 않으면 어리석은 아하스왕은 그의 아들 히스기야를 앗수르의 신상 인 몰록에게 받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빼앗긴 자가 무었인들 우상에게 바치지 않겠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마음의 첫자리를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자.

하나님께서 나를 지배하는 한해가 되게 하자.

 하나님께서 완전히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열매맺는 1991년이 되게하자.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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