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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두 손을 들어 올릴 때 (시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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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멀리 있는 사람을 향해서 손을 들어 표시하기도 하고, 기쁘게 환영할 경우에도 손을 들어 표시합니다. 약속이나 서약을 할 때에도 손을 들어 표시하고, 전쟁에서 항복할 때나, 혹은 승리할 때에도 사람들은 두 손을 들어 표시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손을 들어 성소에서 기도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두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건져 주시고, 응답하시고 도와 주셨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복종을 나타낼 때에도 두 손을 들고 기도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할 때에도 두 손을 들어 영광을 돌리고, 축복을 할 때에도 두 손을 들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할 때에도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 손을 드는 것은 성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부흥회에서 강사 목사님이 자꾸 손을 들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모두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평소에 조용하게 하던 사람들은 좀 부산하게 생각하고 이상히 여기는 경우도 있겠지만,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복음주의 노선에 굳게 선 교회입니다. 지나치게 경건주의도 아니고, 지나치게 신비주의도 아닙니다.
한국의 루터 교회라고 하면 천주교회와 매우 가까운 교파인데, 그 교단장이 초청해서 부흥회를 해 달라고 할 정도이고, 또 아주 경건을 강조하는 고신 계통에서도 집회를 많이 인도했기 때문에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다 수용을 하고 용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경건주의를 강조하는 곳에서는 박수치는 것은 엄두도 못 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르쳐 주고 박수를 치게 했더니 나중에서야 박수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시47:1).
저는 어디를 가나 여기도 이해가 되고 저기도 이해가 됩니다만, 그러나 우리 교회는 복음주의 노선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자세로 손을 들고 기도 할 수도 있고, 손을 들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손을 들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지금도 손을 들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은혜의 체험을 하고 난 이후부터 손을 들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서 수십년을 두고 이불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두 손을 들고 “여호와 닛시!”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르비딤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군사들과 싸울 때 승리한 비결은 바로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영적인 전쟁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싸움은 이 싸움에 언제나 승리 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두 손을 높이 들 때 어떤 은혜가 임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이 도와 주십니다.
본문 7절에 보니까,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했습니다. 두 손을 높이 들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역사가 일어 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의심이 많은 사회입니다.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또 부부간에 서로가.... 대립을 하고, 의심을 합니다.
마지막 때에 “너희 집안에 원수가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이것은 악의 영이 여러 사람의 심성을 포악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의 향기와 맛을 들어 내지 못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 악의 영, 귀신이 순간순간 넘어 뜨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잠3:26절에 보니까,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일어나면, 이런 못된 영이 우리를 넘어 뜨리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충만해 지면, 인간관계 속에서도 부정적인 생각에서 긍정적인 사고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만 있으면, 분별력이 있고 남모르는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제게 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덩치는 이렇게 크지만 마음이 약합니다. 어젯밤에는 무서운 꿈을 꾸어서 무서워 이불을 확 뒤집어 썼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불을 썼다고 악한 영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도 천사와 같이 영적인 존재라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어디든지 나타납니다. 하늘 높이 가서 거한다고 할지라도, 바닷속 깊은 곳에 가서 거할지라도... 어디든지 찾아 오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마귀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범위 내에서 못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대적을 물리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라”고 했습니다(시18:2). 하나님이 다 막아 주십니다. 시56:4절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병아리들이 모이를 먹고 있다가 어미가 “꼬꼬꼬꼬...” 하면 재빨리 어미 품에 쏙 들어 갑니다. 강아지 새끼들도 무서운 일이 있으면 제 애미한테 바싹 달라 붙습니다. 애미가 다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연약하기 한량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기자는 기도하고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또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는 아무런 힘이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원문에서는 마치 강도가 뒤에서 쫓아오는데 마지막 막다른 골목에 가서 자기를 살려 달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바로 이 자세가 ‘부르짖는 것’ 입니다.
우리는 두려울 때, 걱정스러울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부르짖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많은 수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시27:10절에서는 부모도 자기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극한 외로움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부르짖었습니다. 마치 무서운 들소 떼들이 뿔로 치려고 하는 무서운 상황속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간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방패가 되시고 건져 주셨다. 기가 막힐 웅덩이 에서도 주님이 건져 주셨습니다(시40:2). 죽을 질병에서도 건져주셔서 치료해 주셨습니다. 온갖 역경속에서도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풍요롭게 해 주시고, 안전하게 해 주시고 이스라엘 민족사에 가장 영화로운 면류관을 쓴 사람입니다. 다윗과 같이 큰 영화를 누리며 복을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욥8:14절에 보면, 여호와를 떠난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의지한다고 할지라도 거미줄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거미줄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할 때, 어려운 환란이 우리 앞에 부딪쳤어도 하나님께서는 삶을 복되게 하고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풍성한 축복의 수확을 거둔다고 렘17:7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신자가 집이 몇채씩 되고,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사전에 없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몸이 좀 약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는 자기 생애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만 해도 실컷 쓰고 늙고 죽을 때 까지도 다 못 쓸것으로 생각했는데, 무슨 사업을 하다가 그만 왕창 잃어 버렸습니다.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시내에서 친구들이 차 한잔이나 하자고 해도 버스를 타고 나갈 차비가 없어서 못나갈 정도의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쌀이 떨어져서 사야하는데 돈이 없어서 누구좀 사 줄려고 한다면서 봉투에 조금씩 사다가 겨우 먹고 사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계심을 믿고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남보다 먼저 나와서 기도하고, 새벽마다 주님께 부탁하고 맡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밥맛이 좋아지고, 나빳던 건강이 아주 좋아 졌습니다. 그러더니 점점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셔서 남편은 주식회사의 대표 이사가 되고, 자식들은 외국에 유학까지 보내고 잃었던 집들을 다시 사게 되고, 옛말 하면서 사는 복된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되겠다고 하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붙드시고 좋은 길을 열어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로, 산업에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어 올릴 때 주시는 복은 바로 산업에 복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9절 말씀에 보면, “주의 산업에 복을 주소서” 라고 했는데, 이 ‘산업’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땅을 분배 했을 때 그것을 ‘산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이것을 가져라, 너는 저것을 가져라” 하시면서 나누어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전도서에서는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너는 물질을 많이 가져라” 해서 물질을 많이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당장은 없어도 영계에서 이 분복을 많이 내려 주신 사람은 반드시 기한이 돼면 채워 주십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으로 부터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거부가 될찌라”고 하는 축복의 안수만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간 야곱은 그곳에서 양을 치고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외삼촌이 그냥 부릴 수 만은 없어서 “내가 너에게 품삯을 주겠는데, 양이 새끼를 낳을 때 흰양은 내것이고 검은 새끼는 다 네 품삯으로 갖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해는 새끼만 낳았다 하면 검은 새끼만 나오는 것입니다. 검은 새끼에 쌍둥이가 나오고, 자꾸 자꾸 야곱의 재산이 늘어난 것입니다. 라반이 가만히 보니까 검정 새끼만 많이 낳았습니다. 그래서 흰 것은 네가 갖고, 검은 것은 내가 갖겠다고 하니까 그 때부터 또 양들이 새끼만 낳으면 흰 것만 낳았습니다.
“다시 검은색은 네가 갖고 흰색을 갖으라” “흰색은 네가 갖고 검은 색은 내가 갖겠다...” 자그마치 이것을 열번이나 번복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을 복되게 하시니, 이래도 저래도 야곱의 양만 늘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거부가 되어서 고국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산업에 복을 주시기만 하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역사가 일어 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공부만 많이 하면 산업에 복을 받을 줄 알지만, 공부하는 분복도 따로 받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책을 들면 날을 지새우기를 밥먹듯 하고, 그만 자라고 말려야 겨우 잠을 자는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공부에 분복이 있어서 꾸준히 노력하면 과학자도 되고, 학자도 되고... 훌륭한 길이 열려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책만 붙들었다 하면 잠만 잡니다. 또 잠을 잔다고 야단을 치면, 겨우 책을 붙들고 공부 하는 척은 하지만 생각은 다른데 가 있습니다. 설문 조사에서 보니까 공부하라는 부모님이 죽이고 싶도록 밉다는 겁니다. 이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공부의 분복이 없습니다.
의정부에 민홍식 장로님의 아들이 그 교회에서 자라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훌륭하게 합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목사가 되었는데 작은 아들은 공부하라고만 하면 잡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아들이 하는 말이 대학 4년동안 들어갈 등록금을 달라는 것입니다. 대학은 못가지만 자기는 소를 키우는 목장을 경영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목장을 하는데 관심이 많고 그런데만 쫓아 다니고, 아주 흥미를 느끼고 재미 있어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소 떼, 돼지 떼가 많아지고 큰 목장을 경영하는 사장이 되어서 이제는 신부감을 골라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자기에게 분복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잘 버는 분복이 있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좋아 보여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2년쯤 목회를 하다가 자기의 분복이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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