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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빛을 비추어라 (사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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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한해는 가고 또 한해가 썩 다가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달력이 바뀌었다고 해서 뭐 특별히 달라질 것이 있겠느냐”고 말할찌라도, 우리 가슴 한켠에 또 소망의 언어 한자락을 심어봅니다. 쉽게 포기하거나 절망하기에는 아직 우리의 가슴은 뜨겁고, 우리가 함께 잡은 손은 이렇게 용기로운 까닭입니다. 우리의 용기는 어떠한 자리에나 붙어다니는 어설픈 장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단련 되어있고 쉬 무너지는 법이 없기 때문에, 함께 일구어낸 우리의 용기는 “결정적인 움직임”을 가져옵니다.

이스라엘은 참혹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돌아가야 할 땅은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지 오래였습니다. 그 굴욕스러운 시간들은 차라리 서러움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아무것도 남아있지 아니한 이스라엘에게는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비웃움이거나 비아냥거리는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송두리째 빼앗겨 아무것도 갖지 못한 참담함은 골깊은 아픔이되어, 더이상 통증을 호소하는 신음소리조차 사치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폐허의 땅에 내던져진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사야는 역설적으로 “일어나 빛을 비추어라”(60:1)고 선포합니다. 폐허의 아픔, 박해의 고난, 실패의 부끄러움, 온갖 비겁과 좌절의 경험을 감싸돌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온갖 서러움과 굴욕적인 좌절의 경험속에서 단련된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 한다는 것입니다. 야훼의 생각을 부조리한 세상이 알아차리도록 빛처럼 비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우기 그들이 고통당하고 아픔에 흐느낄 때 약한자와 함께하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함께 고통당하고 아파하시었고, 지금 이 폐허의 땅에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용기를 내어 일어설 수 있는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동일한 경험도 어떠한 사람에게는 좌절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단련된 용기”를 내어 일어선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좌절하기 쉽고 포기하기 쉬운 때 일수록 우리는 “시작”에 대하여,“시작하는 용기”에 대하여 관심할 일입니다. 그것도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시작이 아니라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주실 해, 우리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61:1-2)라고 외치면서 단련된 용기의 끈으로 우리를 동이어,우리의 이름을 푸르디 푸른 “정의의 느티나무 숲”(61:3)이라고 부르시는 야훼 하나님과 함께 책임있는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폐허더미 속에서 이러한 가슴벅찬 시작을 생각하면서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나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10절)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해방)의 옷” 달리말하여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10절)을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새싹이 돋아 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주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 흐르게 하신다”(11절)는 확신은 이러한 단련된 용기 속에서 피어나는 것입니다.

91년 새해는 시작되었습니다. 어떠한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인지 아무도 짐작하여 낼수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우리에게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주신” 야훼 하나님과 함께 책임있는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단련된 용기로 우리를 동여야 한다는 것만이 분명합니다. 야훼께서 우리를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란 이름으로 부르시는 까닭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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