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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탕자를 영접해 주시는 하나님 (눅 1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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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하고자 하는 말씀은 우리가 익히 듣던 말씀으로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문 말씀 가운데는 잃어버린 3가지가 나옵니다.
① 잃은 양(3-7) ② 잃은 드라크마(8-10) ③ 잃은 자식(11-31)의 비유가 나옵니다만, 이 잃은 것으로부터 찾는 목자의 심정과 가정주부의 마음과 한 가정의 아버지의 마음이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짐승에서 돈으로, 돈에서 아들로 그 사랑의 강도가 높아 갑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Evangelium in Evangelio)이라 부릅니다.
이 비유는 결코 잃어버린 것이나 탕자의 비유라기보다 잃어버린 것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목자나 주인이나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서 이처럼 잃어버린 것에서 아끼고 찾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영접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나아 왔습니다.(1)
당시 세리들은 동족으로부터 무거운 세금을 착취하여 로마에 받히는 매국노와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또, 여기 죄인들은 창녀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난 탕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을 영접하고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동족을 배반하고 착취해서 부자가 되고 또 창녀들과 놀아난 타락한 이들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영접해서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까지 비난을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잃어버린 3가지 비유를 하시므로 이 비유를 통해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가르쳐 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Ⅰ.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3-7)

성경에는 양에 대한 기록이 500회 가량이나 나옵니다. 또, 양을 일찍이 구약에는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켰고,(삼하24:17, 렘31:10) 신약에는 성도를 상징해서 말했습니다.(요10:2, 21:16)
소는 받을 수 있는 뿔을 가지고 있고, 사자는 무서운 이빨이나 발톱을 가지고 있고 개나 고양이는 냄새를 맡고 자기 집을 찾아오지만 양은 다른 짐승들처럼 빠른 발도, 보호 색깔도, 뿔도 없는 비공격적이고(사53:7, 렘11:19, 마10:3,4) 무방비적(미5:8, 마10:16) 이라서 목자의 보호와 관리가 없으면 안되는(민27:17, 겔34:5, 마9:36) 유약한 짐승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않겠느냐”(3,4)
이 비유의 말씀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축업을 주로 해 온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서 ... 찾도록 찾아다니지 않겠느냐”고 하신 말씀을 볼 때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양을 치는 생화로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요는 아흔 아홉 마리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잃은 양 한 마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남은 아흔 아홉 마리 역시 그런 한 마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모두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개나 고양이는 영리해서 한 번 왔던 길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은 똑같은 길을 수 없이 데리고 다녀도 길을 익히지 못하고 방향감각이 발달되지 않아서 스스로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또, 양은 몸에 비해 다리가 약해 구덩이에 빠지면 나오지 못합니다. 또, 노루와 같이 빨리 달아나지도 못하고 염소와 같이 뿔이 달린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나운 짐승을 만나면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다가 쿡 처박혀 맹수의 밥이 됩니다. 또, 양은 벌렁 넘어지면 혼자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고 다리를 버둥거리다가 죽습니다. 또, 양은 앞서서 못 갑니다. 양을 앞에 두고 목자가 뒤에서 “가” 하고 명령을 하면 다 꾸물꾸물 뒤로 물러서고 앞으로 갈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양에게는 목자가 필요하고 목자를 잃은 양은 유리 방황하다가 꼴을 얻지 못하고 굶어 죽게 됩니다.

사랑하는 양이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양이 추위에 떨며, 굶고, 혹은 맹수에게 쫓기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밥이 목에 넘어가겠습니까 또, 사랑하는 양이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길을 잃고 “음매” 거리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든지 잃은 양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앉으나 서나 잃은 양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찾을 때까지 찾아다닙니다.

사실 양 한 마리 값을 따져 보면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찾아야 합니다. 사랑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잃었을 때에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찾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찾도록 찾는다는 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사이도 간혹 “개구리 소년”이라는 노래가 나옵니다만, 잃은 자식을 잊지 못해서 노래로 혹은 우유 통이며 담배 갑에 소년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내어 찾고자 합니다. 잃은 자식을 찾는 광고를 보고 들으면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 봅니다. 아마도 찾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가슴에 그대로 묻어 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찾았을 때 기뻐서 “어깨에 메고” 했습니다. 이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과 양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겠습니다. 양이 지쳐 있거나 다리가 상해 걷지 못할 때 무리하게 양을 몰지 않고 어깨에 메고 오는 것은 당시 목축업을 했던 유대 풍속이었습니다.

이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잃어버린 성도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이처럼 기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잃은 양 한 마리 값보다 훨씬 더 많이 드려 온 동네 잔치를 했습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모세가 그 장인의 양을 치다가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그의 애정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의 양인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에게 맡기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여, 이미 믿음이 성숙한 성도는 믿음이 약한 성도, 어린 양을 아끼고 돌보는 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 후서 3:8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천년 같이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Ⅱ.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8-10)

두 번째 비유는 그 무대가 들에서 집안으로 들어오고, 주체는 남자에서 여자로, 그리고 100에서 10으로 줄어들어 더욱 귀중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는 여자의 찾는 정성을 중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드라크마는 헬라의 코인으로서 로마의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가난한 품꾼의 아내로서 남편이 온종일 땀 흘려 벌어 온 돈이기 때문에 한 드라크마도 귀합니다.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남편의 하루 종일 흘린 땀과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유대 여자들은 드라크마 열 개를 실로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든지 아니면 머리에 얹는 장식물로 사용했습니다. 유대에서는 남편들이 아내를 맞아 드릴 때, 그 여자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의 증표로 가이사의 화상이 새겨진 드라크마 열 개를 주는 관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열 개를 꿰어서 목걸이를 하고 다녔는데 그 하나를 잃어버렸다 하십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결혼 지참금으로 평생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옛날 일본에서 약혼을 할 때 “할부”란 것을 주었다고 합니다. 약혼 서약을 하고서 나무 토막을 칼로 쪼개어 반은 남편이 될 사람이 가지고, 반쪽은 아내 될 사람이 자기고 있다가 결혼 때까지 소중하게 간직을 하다가 그것을 결혼 때 맞추어 보고 맞으면 결혼을 했습니다. 만약 어느 한 쪽이 잃어버리거나, 예쁘게 한다고 다듬거나 페인트 칠을 하여 맞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본문에 어느 여인이 그만 이런 소중한 드라크마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남편이 땀흘려 번 동전이라 그에게 더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혼 지참금입니다. 우리 나라 같으면 결혼 반지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을 잃어 버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열어 보았던 서랍도 수십 번 더 열어 보고 큰 농도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하며 찾지 않겠습니까 혹시나 하수구에 빠지지 아니했나 해서 그것까지도 뜯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는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을 가리킵니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했습니다. 인간은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의 품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품을 떠난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로서의 하나님,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양을 잃은 목자처럼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처럼 우리 성도를 찾으십니다.
우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 편에서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택한 백성을 잃은 데서 목자처럼,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종교입니다. 이렇게 해서 찾으시므로 기뻐하는 것이 5,6,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ㅇ양을 잃었다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했습니다.(5,6)
ㅇ또, 드라크마를 찾은 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잔치를 베풀며 즐거워했습니다.(10)
찾은 양 한 마리나 잃은 동전 한 잎이나 그 한 잎의 몇 갑절을 더 쓰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너무 기뻐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조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
성도 여러분! 기뻐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죄악 된 곳에서 찾으시는 그 사랑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갑시다.

Ⅲ.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비유(11-32)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주소서” 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신명기 21:17절에 나오는 재산상속의 규정에 따라 한 것입니다. 그 규정에 맏아들은 다른 아들들이 받는 분깃의 두 배를 받도록 율법에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가진 전 재산의 ⅓을 요구했습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례하기 짝이 없고 아버지의 마음을 심히 슬프게 한 것입니다. 아마 한국 같으면 아버지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상속을 나누어 달라고 하면 따귀라도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나누어 준 분깃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멀리 떠나야만이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멀리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인생을 즐기며 살려고 했습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지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세상의 온갖 유혹을 받아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관계로 ① 가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②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기근까지 겹치는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 백성에게 ③“붙어사는” 귀찮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④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돼지는 유대인에게 불결한 짐승으로(레11:7) 여겼기 때문에 돼지를 치는 일은 모든 직업 가운데 가장 비천한 직업이었습니다. ⑤ 그는 또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져 하였으나 그것까지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것이 자유스러울 것이라 생각하는 또 하나님을 떠나면 행복하리라고 하는 또 하나님을 떠나면 내 마음껏 인생을 즐기며 살겠다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 자유는, 참 행복은 주 안에서 살 때입니다. 주 안에 살 때 인간의 참 행복이 있고 참 자유가 있고 참 인생을 즐길 수 있습니다. 낙원의 행복은 진리 안에 살아갈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진리 안에 살았더라면 지금도 그 낙원, 패러다이스의 행복과 그곳의 풍요로움과 자유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참 행복은 하나님의 안에, 진리 안에 살 때입니다. 그 안에 있을 때, 자유와 행복과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비유(11-32) 가운데서 두 탕자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집을 나간 탕자로 11-24절에 말하고 있고, 둘째는 집에 있는 탕자로 25-3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유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을 보내 무슨 일인가 물으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드리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하자
① 맏아들은 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했습니다.
② 그러므로 아버지가 나와서 권했습니다. 그 때 불평하기를 29절을 보십시오.
③ “내가 아버지를 섬겼고”
④ 내가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없거늘
⑤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을 즐겁게 한 일이 없거늘
⑥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먹어 버린 “이 아들”.... 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 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하는 자기의 의로운 마음 때문에, 자기는 집안에서 아버지의 일도 도왔고 일을 했다는 의로운 마음 때문에 아버지의 속을 태우는 집안의 탕자입니다. 어쩌면 집을 나간 탕자보다 더 악한 탕자인지도 모릅니다.
① 아버지의 앞에서 노(怒)하고
② 아버지의 말은 듣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합니다.
③ 또, 동생을 미워하여 동생이라 부르지도 않고 “이 아들”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32절에 “네 동생”이라 바로 잡아 주기까지 합니다만, 탕자입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깊은 속을 더 태우는 탕자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들으라고 한 비유의 말씀입니다만 우리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맏아들은 바리새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온 탕자처럼 세리와 죄인을 영접해 주시고 기뻐하시며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의로운 심정에서 세리와 죄인을 판단하고 도리어 세리와 창기와 음식을 먹는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우리는 행여나 교회 안에서 일하고 충성을 했다고 맏아들 같은 탕자는 아닌 가요 아니면 둘째 아들 같은 고의적으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으로 허랑 방탕하게 지낸 탕자가 아닌 가요

에스겔 33:11-12절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 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주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려 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 살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는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합니다.(20)
그리고 종들을 시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하였습니다.(22)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십니다.
어디다가 돈을 썼느냐 왜 그렇게 했느냐 과거를 전혀 묻지 않고 그저 용서해 주시고 맞아 주시며 기뻐하였습니다.
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하나를 찾도록 찾으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꿈을 떠난 인생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찾고 기다리십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롬10:21)
이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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