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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체포 (행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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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에서 사두개인과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을 붙잡아갔다.
사도행전은 분명히 시작부터 예수님이 약속과 명령을 따라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권능으로 입힘을 받고 모든 권세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과 보호하심으로 땅끝까지 이르는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일들로만 신앙과 신자의 인생이 연속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도행전을 전혀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마치고 나자 모든 세상 사람들이 무릎을 끓고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라고 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즉 주를 믿기로 작정된 자들,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자들은 물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한탄과 부르짖음과 회개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초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사도행전의 모든 기록들은 그런 일들이 결과적으로 환란을 부르고 핍박을 부르고 죽음을 불러 들였다는 얘기도 같이 하고 있다.
그들을 찾아온 것은 감옥에 갇히는 비극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 앞에 놓이고 공갈과 협박 앞에 놓이게 된다. 사도행전은 분명히 권능과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 출발하고 있지만 그 능력과 모든 일어난 일들이 조직화되고 세력화 되고 폭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하나 둘씩 잡혀 죽고 예루살렘 교회는 오해되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뽑혔던 일곱 집사들도 몇 가지 일을 한 이외에는 죽어가고 없어지고 주님 앞에 친히 부름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이 몇 가지 일을 한 후에 그 일들로 말미암아 역사의 현장과 무대의 전면에서 퇴장한다. 결국은 그 일이 사도 바울로 연결되어야 한다.
열두 사도,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이런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바울이라는 한 사람으로 사도행전의 기록이 축소되고 소멸해 가는 것을 만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의 업적을 알고 나니까 대단한 사람이지 사도행전 기록 당시의 역사적인 현실에서 보면 그는 서자이다. 주님께서 친히 부른 열두 사도 중의 하나도 아니고 일곱 집사 중에 낀 자도 아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같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그대로 그는 사실 예수님께서 시키신 일, 맡기신 복음의 사역에서는 이방인이었고 반대자였고 그 일의 뒤를 이를 만한 아무런 조건이 없는 자였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절반 이상의 기록을 떠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다니면서 한 일도 잡혀가서 매맞으며 돌에 맞으며 쫓겨다니면서 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도 끝은 그렇게 해서 잘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그가 감옥에서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라고 기록되는 것으로 사도행전은 끝이 난다.
성경이 하고 싶은 말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 그가 가진 신앙과 그가 가진 결심들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이냐에 대해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신앙생활을 하면 형통해진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막연하게 그런 기대를 갖고 있다. 사실은 여기 본문은 놀라운 사실을 행하고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해놓고 사두개인들에게 잡혀서 감옥으로 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가 그러면 신앙은 무엇인가 세상을 어떻게 걸어야 하고 성경이 어떻게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고 약속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눈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두개인 같은 자들을 용납하시는가 말하자면 역사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나님이다.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시려고 하느냐 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무지하다.
이 세상은 곧 없어질 것이다. 이제 영원한 나라에로 불림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가지고 진행하고 계시다. 그러나 어쨌든 공중 권세 잡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다스리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여튼 그러한 방법으로 신자들을 불러내시고 완성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은 누구인가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요 11:47-
48)
이 말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됐던 나사로를 살리신 다음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주님께서는 지금 보이는 물질계가 전부가 아니고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가르치신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너희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성전을 맡은 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워 이 민족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가 쳐들어와 저들의 진압을 반란을 진압할 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회체제를 다 무너뜨리고 빼앗아 가서 자기네들 땅과 백성을 빼앗겨, 즉 자기네 부와 지금의 현실적인 삶을 깰까봐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사두개인들이다.
사두개인들은 물질주의자들이기 때문에 그렇고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가진 종교적 열심으로 그들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자들이고 대제사장들은 그때의 종교적인 체제로써 이 세상에서의 삶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싫어한다. 마태복음 16장으로 가면 이들과의 충돌이 나타나고 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마 16:1-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정면충돌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침이 틀린 것으로 공개석상에서 확인시켜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기도 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 22:23-33)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 영계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영계가 분명히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그 모순, 부당함을 이 질문으로 꼬집는 것이다. 여러 형제를 거친 여자가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그러니 부활이나 내세는 없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신앙이 논리성으로 너무 흐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너무 흘러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우리 신앙의 근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5장에 가면 신자된 가중 중요한 표를 형통과 승리로 약속하지 않고 이런 것으로 약속하고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신자된 가장 중요한 표는 세상이 우리를 싫어하고 핍박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과 신앙은 공통되는 부분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으로 살아가면 무엇이 증명되는가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은 자다. 우리는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있는 자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이 우리 앞에서 흔들리는 것이다. 세상을 부여잡고 예수를 못 보게 하며 진리를 못 보게 하여 그들을 지옥에 보내려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빛으로 살며 의로 살며 진리로 사는 자들로 인하여 저들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 예수를 믿는다며 하나님이 천하만물의 주인이시라며 복을 주신다며 그런데 왜 그렇게 사냐 자존심을 흔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려와서 구해주나 안 구해주나 보자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꺼내 주셨는가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방법으로 우리를 꺼내셨다. 우리에게 당연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
우리가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우리를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신앙인으로 서야 한다.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분명히 이 세상을 사는 방법으로만 살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귀한 느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것 이외에 것, 세상에서의 평가로 우리가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 잠자던 자리에서 깨어나야 한다. 주께서 오늘 우리를 통해서 하시려는 이들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인하여 세상과 대적관계에 서야 한다.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싸우기 위하여 마주 서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신자로서 사는 것이다. 소돔 고모라 성의 멸망이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민족 이 나라에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이 그것이다. 의인 열 명이 필요하다. 그 열 명을 채우는 숫자에 자기 자신이 꼭 끼기 위하여 중요하고도 놓칠 수 없는 우리의 삶, 우리의 신앙, 우리의 운명을 주님 앞에 호소하시고 매어 달리고 바른 괘도로 돌아와야 한다. 맹렬하게 주께 구하고 간절함으로 그 답을 얻어내고 열심으로 남은 생애를 그 일을 위하여 전력투구하여야 한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같이 첫째된 계명을 지키라.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 앞에 순종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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