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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라의 고통과 엘림의 축복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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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넌 지 사흘만에 일어난 것입니다.홍해가 갈라지고 그 길을 육지처럼 건넜던 사건은 참으로 놀랍고 벅찬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간 직후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던 것입니가.그리고 사흘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이 “수르”라는 곳이었습니다.그곳엔 물이 없었습니다.그들은 다시 물을 찾아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다행히 그곳에 물이 있었습니다.그러나 문제는 그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모처럼 찾아낸 물이 써서 먹을 수 없었다는 것은 건건찝찔해서 먹을 수도 없었고 먹는 날엔 설사나 구토를 일으키기에 알맞을 뿐 음료수로서는 가치가 없는 물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이스라엘의 원망이 시작되었습니다.원망의 내용은 “무엇을 마실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의 원망이 너누나 빠르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이유는 그들이 홍해를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으로 건너게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고,감사하며 춤추고 노래한 것이 바로 사흘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경가는 이스라엘이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한 것인데 그들이 원망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건망증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흘 전에 있었던 엄청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능역과 기적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건망증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지난날 받은바 사랑과 은혜를 모조리 잃어 버린 채 살아갑니다.어제받은 그 사랑도 잃어 버린 채 살아갑니다.모두가 다 건망증 환자들입니다.
둘째는 조급증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조급증이란 인내하지 못하고 서둘고 덤비는 방정스러움을 말합니다.그 순간만 참고 기다리면 되는 일도 서둘고 덤비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것이 조급증입니다.
이사야 29:16에서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고 잠언 14:29에서는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고 했습니다.그들이 조급하게 굴지 않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믿으면서 계속 행군했더라면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놀라운 사랑을 곧 체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연세대 박흥수 교수는 모 주간지 칼럼에서 “6백여회의 크고 작은 난(亂)을 겪은 민족이고 보면 한 번도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에 어서 당대에 한번쯤 무엇을 떡 벌여 놓고 살고 싶은 조급한 심정이 일 법도 하다.흔히 말하는 찰라주의니,한탕주의니,하는 것도 이러한 상황적 요인과 물질에 대한 기대 상승이 어우려져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38년 동안 헌법을 8번이나 고쳤고 제헌 이후 2만 8천 98건의 각종 법령이 제정 공포되었으며 그것은 매년 739건이,매일 2건의 법령이 공포된 셈이지만 그중 시행되었거나 시행되고 있는 법령은 10퍼센트를 조금 웃도는 형편이라는 것입니다.이것도 결국 우리네 조급증이 낳은 졸작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조급증은 피해야 합니다.되지 못하고 된 척하는 것,크지 못하면서 큰 척하는 것,믿음이 없으면서 믿음이 있는 척하는 것,하루 아침에 신앙의 거인이 되려고 하는 것,엊그제 교회 출석하기 시작하고 한두 가지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온통 세상을 다 알고 예수를 다 안것처럼 서두르는 것 등은 모두가 신앙의 조급증 증상인 것입니다.
이른 비에 씨 뿌리고 늦은 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농부처럼 참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라에는 물이 있습니다.그러나 그 물은 써서 먹을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물이 있긴 한데 먹지 못한다는 이유가 그들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들이 조급증 환자가 되어가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옆에 사람은 잘사고 있는데 나는 못산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옆집은 행복하게 보이는데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옆 사람은 예수 믿고 능력받고 일꾼이 되었는데 나는 뒤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만사에는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는 법입니다.일단 아이를 낳아야 키우고 가르치고 시집 장가 보내는 것처럼 신앙도 내가 먼저 거듭나고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야 크기도 하고 일꾼도 되고 영적으로 자녀를 낳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라의 써서 먹을 수 없었던 물은 마치 풍요 속에서 빈곤으로 고민하는 현대인의 삶과 흡사합니다.현대인들은 20년 전이나 50년 전에 비하면 엄청난 것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그러나 부족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가난해서 헐벗고 못먹고 병이 나도 치료하지 못했던 50년 전이나 30년 전보다 풍요를 구가하는 20세기말 현재 자살자 수가 더 많고 병사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다는 사실로 미루어 증명이 됩니다.
굶어 죽는 사람보다 위장이 탈나서 죽는 사람 수가 더 많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서 파멸하는 사람보다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돈 때문에 방종하고 타락하다가 자신을 망치는 사람들이 더 많고 내일 아침 끼니 걱정 때문에 잠못 이루는 사람보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쓸까 어떻게 더 벌 것인가 어떻게 보관하고 지킬 것인가 때문에 잠못 이루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은 현대인의 삶이 “마라”의 삶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꾼 모세의 행적을 주목해야 합니다.백성의 원망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기도했습니다.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한 나무”를 지시하셨고 모세는 그 나무를 쓴 물에 던졌습니다.그랬더니 쓴 물이 단물로 고쳐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첫째는 쓴 물 때문에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백성은 원망했지만 모세는 기도했습니다.원망은 문제를 더 얽히게 하는 요소지만 기도는 문제를 푸는 열쇠인 것입니다.원망은 저주와 징계의 조건이 되지만 기도는 용서와 축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 기독교 원로 지도자 가운데 모리야마 사도시목사가 있습니다.그는 금년 83세의 고령이지만 일본의 복음주의 기독교계의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는 분입니다.그는 기도의 사람이고 수를 셀 수 없는 응답과 체험을 가진 사람입니다.지난 3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일본에서 그분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해 겨울 일본 전역에 폭설이 쏟아져 전 교통망이 마비된 때가 있었습니다.그는 급히 동경을 떠나 “오미아”라는 시골을 가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일반 자동차는 물론 전철도 불통이었습니다.그는 “하나님 길을 내셔서 오늘 꼭 갈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그런데 그날 오후 동경에서 떠나는 전철이 있는데 급행이기 때문에 오미아 역에는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그는 그 전철에 탑승했습니다.그리고 계속 오미아 역에서 전철이 꼭 정차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드디어 오미아 역이 가까와지자 그 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코트를 입고 모자를 썼습니다.그리고 가방을 들고 내릴 준비를 했습니다.하나님께 전차가 서게 해달라고 믿고 기도했기 때문에 내릴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전차가 오미아 역에서 선 것입니다.그는 유유히 내렸습니다.왜 거기서 급행으로 통과하던 전차가 정지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며칠뒤 오미아 역에서 전차가 섰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물어 당시 오사끼 교통 장관이 해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그때 “하나님이 전차를 세우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를 던졌다는 사실입니다.아무 나무를 아무렇게나 던진다고 해서 쓴물이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이 지시하신 나무를 던졌기 때문에 물이 고쳐진 것입니다.대부분의 주경가들은 그나무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박달나무,향나무,오동나무,백향목을 던져 본댔자 쓴 물이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감미로은 세상의 향락과 안일을 설탕치듯 친다고 해서 괴롭고 슬프고 한심스런 삶이 차료되는 것은 아닙니다.내가 고침받고 단물처럼 맛있고 가치있는 삶을 소유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던져야 합니다.십자가 말고 다른 길은 없으며,십자가 외에는 다른 묘약이 없습니다.
쓴물은 쓴 인생과 쓴 가정과 쓴 세상과 삶을 말합니다.하나님이 지시하신 십자가는 모든 것을 고치고 치료하는 위대한 능력입니다.본문 6절 끝에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고침받고 치료받기를 원한다면 고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야 합니다.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내 영혼도 고치시고,환경도 고쳐 주실 것입니다.
쓴물을 단물로 고치신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한 그들이 계속 행군하여 “엘림”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엔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그곳에는 시원하게 솟아나는 물 샘 열 둘과 종려나무 70주가 우거져 있는 오아시스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준비해 둔 축복의 오아시스였던 것입니다.그들이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서 행군했더라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치 않았을 것이며 축복의 오아시스에서 실컷 물을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에도 마라같은 고통이 있습니다.쓴 인생이 있고 쓴 사건이 있고 결핍과 빈곤이 있습니다.고통도 있고 근심도 있고 절망도 있습니다.마라의 쓴물처럼 있긴 있는데 먹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쓰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겪는 고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처럼 불신하고 원망하면 안됩니다.모세처럼 기도하고 기다리고 나무를 던져야 합니다.그리고 엘림을 향하여 행군해야 합니다.엘림까지만 가면 그곳엔 시원한 생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고 나무 숲이 있습니다.
마라의 고통을 겪은 사람들일수록 엘림의 축복이 더 크고 값지고 감사할 것입니다.마라는 이 세상의 그림자이며 엘림은 가나안의 그림자입니다.그리고 나아가 영원한 가나안인 천당의 그림자인 것입니다.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하나님이 준비하신 나라,하나님이 영원히 계시는 나라가 천국입니다.그곳은 영원한 엘림입니다.마라 후에 엘림이 있었던 것처럼 고통과 좌절 후에 평안과 희망이 있습니다.문제는 마라의 고통과 아픔을 누구에게 하소연 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마라보다 더 쓰고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소리높여 하소연 할 하나님이 계십니다.그리고 그 하나님께 기도할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마라에서 엘림으로 행진합시다.마라에서 기도하고 단물을 마십시다.그리고 믿음으로 행진하여 엘림의 오아시스에서 찬송하며 안식합시다.마라의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은 엘림의 축복도 주십니다.그래서 고통도 사랑의 증표인 것입니다.
오 주여! 마라에서 넘어지지 않고 엘림으로 가게 하옵소서.마라처럼 쓴 삶속에 십자가를 던지고 치료받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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