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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의 뜻과 안식일 (출 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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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킨다. 십계명에서 안식일은 네번째 계명에 해당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성일로 지키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밖에 없다. 모든 교회가 다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지키고 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문제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어떤 율법보다도 중요한 계명이었다. 광야생활 중에서도 안식일에는 만나마저 내리지 않았고 안식일 전날에 이틀분이 하늘에서 내렸다. 또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본인 뿐만이 아니라 집에 유하는 손님도 일을 못하게 했다. 물론 가축도 일을 시키지 못했다.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우리로 말하면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이다. 이때에는 돈도 최소 금액만 지니도록 했다. 무게를 달아 너무 무거운 옷은 입지 못했다. 필요 이상으로 옷을 많이 입는 것도 일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의 안식일 개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신자들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고 주일에 모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초대 교회에서는 안식일 대신에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을 모이는 날로 정하였으며 의미에 있어서도 안식일보다 주일이 더 중요한 날로 바뀌었다. 오늘날도 안식일에 모이지 않고 모두 주일에 모이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안식일을 지키는 동일한 개념으로 주일을 지켜야 되는가 아니면 어느 부분은 이제는 안 지켜도 좋은가 하는 문제이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이야기 하는 관점에서 안식일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천지창조를 메세지화 한 것이다. 하나님은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레 되는 날에는 쉬셨다. 이것을 ‘하나님이 이레 되는 날 쉬셨으니 너희도 쉬어라’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하나님이 여드레 되는 날 다시 일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레 날은 끝이 없다. 날자는 엿새까지 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되돌려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셨다. ‘이레 되는 날 쉬셨다’는 뜻은 ‘더 이상 만들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레 후에 모든 날들은 쉬는 날이다. 엿새동안 하신 일로써 천지창조는 완벽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준 요일의 개념 속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하나님이 일하신 날들의 대표라고 한다면 칠일은 하나님이 일을 다 하시고 완성한 표의 날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에는 더 손댈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이제는 할일이 없다. 안식을 명하여 쉬어라’ 하는 뜻이다. 이 말의 뜻이 왜 일을 안하는 것으로 요구되고 있는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은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것을 메세지 화하려는 의도가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
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
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출 31:12-17)”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적 차원에서의 명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메세지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그 ‘표(表)’를 어기는 것이다.
안식을 어긴다는 것, 말하자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메세지화 작업’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거부한다’는 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이 심각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이 그것이다. 믿는 사람이 말로는 창조론을 믿으면서도 자기의 삶의 표현에 있어서는 진화론으로 가게 된다면 그것은 신자가 ‘신앙생활로서 만들어야 될 모습은 아닌 것이다’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이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자주 오해되는 부분은 율법의 요구를 단지 윤리 도덕의 요구로 바라보는 점이다. 율법의 요구는 그것이 그 계명이 갖는 메세지 때문에 요구되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부분들을 상징화하고 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던 제사 제도는 폐지되었다. 상징화의 뜻이 확실해진 부분에 대하여는 우리에게 그 예표나 상징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지켜야 하는 것들의 하나가 안식을 주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식일이 왜 주일로 옮겨졌는가’하는 문제는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살펴 볼 것이나 그 둘 사이에 면밀히 이어지는 하나의 공통되는 점이 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13)”
‘안식일의 개념’과 ‘주일의 개념’에서 공통되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주일의 개념’이 구속적 차원의 메세지이고 ‘안식일의 개념’을 창조하는 차원의 메세지라는 것이다. 안식일이 ‘하나님이 혼자서 완벽하게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것의 표로써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기를 요구한 날이라면 주일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역을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날이다.
초대 교회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안식일이 주일로 옮겨졌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다’라는 표현을 우리 삶의 영역에서 ‘표(表)’로 걸어 놓고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날‘, 그날이 구약식으로 하면 안식일이고 신약식으로 하면 주일이다.
우리가 식사를 하기 전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기도하고,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하는 것은 내가 개인적인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보다 더 큰 메세지가 있는 것이다. ‘주일은 교회에 나간다’ 이것이 제 삼자들에게는 커다란 메세지가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주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주일을 상당히 많이 틀리게 지키고 있는 셈이다. 제 삼자가 볼 때에 “저 사람은 주일에는 남다르게 굴더라”하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만큼 지켜야 한다. 이날만은 가능한 한 돈을 안 쓰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도 이날은 주일이라는 것이 전달되어야 한다. 다른 날과는 절대 구별이 있어야 한다. 시험을 망치는 한이 있어도 주일에는 공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형식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형식을 왜 미워하는가 하면 그것이 위선과 형식주의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 자체가 욕먹을 일은 아니다. 형식이 없으면 내용을 담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장 아름답게 메세지화 하라고 준 주일이 우리가 치장하지 못해서 제 삼자에게 그날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책임이다.
주일이 주말로, 레저의 날로, 뛰노는 날로 인식된 것은 신자들에게 99% 그 책임이 있다. 믿는다는 문제가 전달되고, 십자가는 전달이 있어도 ‘주일’이라는 날이 한국 교회에서는 아직 그렇게 큰 힘을 갖고 형태화 되어 있지 않다.
주일을 지킴에 있어 우리는 가장 쉬운 일부터 해야 한다. 그날이 다른 날과는 구별되는 날이라는 마음의 준비와 긴장이 필요하다. 주일은 다른 날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날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 가족 모두에게 그날은 ‘주일’ 즉 ‘주의 날’로 전달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 아버지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 메세지를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은 생각에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날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로서 형식화해야 한다. 형태화해야 한다. 그 일은 내 삶의 한 부분을 구별해서 어느 형태로 만들어야 되는 날이기에 어렵다. 가장 먼저 그날을 만들기로 마음 속에 결심부터 해야 한다. 우리는 주일을 ‘하나님의 날로 메세지화’하는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형태를 마음 속에 지니기로 결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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