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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한 갈대 (사 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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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고 난 후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가장 큰 숙제는 신앙 성숙에 관한 문제이다. 믿고는 있으나 믿는다는 사실이 그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사실임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앙과 고백을 갖지 못한 사람들과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구태여 차이를 찾는다면 단지 신앙의 형식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늘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왜일까
스스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한번 해보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이 말씀들에 공감하는가 공감한다면 왜인가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공감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 순종이 무엇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인가 윤리적 차원이라면 그것은 또한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이해와 납득의 대상물이 아니다. 기독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앙이다. 어떤 일에든지 신앙으로 대처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분명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공감하고 있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믿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약점이다. 그것이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결단코 한걸음도 떼어놓지 못하게 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사야 42장 3절에 진술된 말씀은 “너희는 상한 갈대이고 너희는 꺼져가는 등불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른다. 성경이 우리더러 “살인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때에 우리가 “그렇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뭔가 다른 데가 있어야지. 살인을 하지않는 정도가 원수를 사랑하는 지경까지 나가야지”라고 공감하는 기초가 “그럼 살인을 하는 게 옳단 말인가!”하는 이런 기준으로써 공감해서는 안된다.
지금 우리를 고발하는 이사야 42장 3절 말씀은 우리의 기초가 어디인가를 밝혀주는 것이다. 우리는 ‘상한 갈대’이다.
땅 중에서 갈대가 피어나는 땅은 황무지이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버려진 땅, 저주받은 땅이다. 농사를 짓지않는 사람에게는 갈대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겠으나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지겨운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갈대가 목적이 아니라 갈대가 돋아난 땅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대가 자랐다면 눈쌀을 찌프리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그 갈대가 꺾여 있으니 가장 저주받은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저주받은 자리에 부패되어 있는 죄인들의 모습을 이보다 더 잘 묘사한 것은 없을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상한 갈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부러뜨려 뽑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신자의 현실이라면 신자의 현실은 그 다음이다.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하였다. ‘꺼져가는 등불’은 기름이 없어서 꺼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지가 타고 그 다음에 꺼지는 것이다. 등불은 방안을 밝혀두기 위해 걸어두는 것인데 심지가 탈 때에는 불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연기만 나는 법이다. 그래서 도움을 주기보다 냄새가 나고 눈을 아프게 하는 매연으로 피해만 줄 뿐이다. 바로 그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 놔두기만 해도 꺼져가는 심지를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살인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그 우리가 바로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라고 하고 있다. “온누리를 비추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시면서 또 “너희는 상한 갈대요, 너희는 꺼져가는 등불이니라”고 지적하신다. 서로 연결시킬 수 없는 두 극단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요구하시고 그렇게 되야 한다고 명령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꺼져가는 심지요, 상한 갈대라”고 선언하신다. 이 시점에서 쳐다보는 ‘하나님의 요구’는 성취불가능한 요구이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점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명령이 우리의 머리 속에 내가 성취할만한 기준 속에서 요구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신앙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 속에서 도덕성이나 윤리성을 찾고 있는 사람은 신앙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신앙이란 할 수 없는 갈등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드디어 생겨나는 것이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나 보자”는 것이던가, “믿은게 잘못이지”이든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신다고 했으니 그래도 기대를 걸어보자”하는 셋 중의 하나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어느 지점이 모자라는가하면 “어디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두고보자”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데 신자들의 약점이 있다. 신앙인의 최고 약점은 이 갈등에 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해낼 수 없는 상황 속에 있고 하나님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한 약속을 나에게 해놓았다는 그 꿰어 맞출 수 없는 출발선과 결승선을 갖고 있는 이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선언하신 목적지와 그것을 이루어야할 나의 너무나 처절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모습과의 이율배반적이고 도저히 꿰어맞출 수 없는 이 불연속선, 도저히 연결될 수 없는 이 황당함, 바로 이런 갈등이 없다. 이것이 없는 자에게는 신앙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목적지’와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꿰어 맞출 수가 없으니까 이 갈등 속에 들어가느니 하나님께 내가 해놓을 수 있는 것과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산다. ‘주일날 예배 봐주기, 십일조 바쳐주기, 그 다음에는 서로 손대지 말기, 마치 마피아단 이 구역을 나누는 것과 똑같다. “하나님 제가 예배는 봐 드리겠습니다. 십일조는 바치겠습니다. 그대신 제게 말도 안되는 요구를하지 마십시오. 저를 하나님의 아들을 삼는다든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준다든가 하는 것으로 저를 골치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냥 죽으면 천국이나 보내주시고 그걸로 때워 주십시오. 그 대신 제가 이정도는 해드리겠습니다”이렇게 타협하고 있다. 갈등을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믿음의 영역에 관한 갈등이 없다. “이것이 정말일까”하는 불안감이 없다. 이것을 정말 내가 믿을까 말까 이렇게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회의도 품지 않는 자리로 우리는 쉽게 면역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만은 절대 외면하지 말고 부딪쳐야 하는 싸움인 것이다. 내가 꺼져가는 등불이요, 상한 갈대임에도 불구하고 요구되는 것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시합에는 중요한 약속이 있다. 동일한 출발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출발점이 없는 골인 지점은 없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우리의 출발지점이 어디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거기서부터 신앙 생활을 잃어버리고 있다. 출발지점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살인도 간음도 윤리적 이유에서가 아닌 신앙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
도덕성 때문에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시요, 대장이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이해나 납득이 아닌 그분이 옳다면 모두 옳은 것이다. 틀렸다면 내 생각에 아무리 옳아도 틀린 것이다. 나는 꺼져가는 심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날의 주인이 되셨다. 그래서 죄절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저를 저버릴 수 없다. 저가 나를 잡고 있는 한 그분에게서 나를 빼앗아갈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할 출발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늘 웃으시면서 “원수를 사랑하라”하신다. “언젠가는 되갰지. 나는 못하지만 그분이 하라는데, 하라고 하시는 분이 어떻게 해주시겠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 어떻게 해결해 주시겠지” 이런 배짱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신앙이 좌절해 마땅할 자리에서 요구되고 있는 이 감격을 모르는 데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출발한 자는 누구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돌아오는 것은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좌절이 마땅한 출발점인 줄을 모르는 사람은 스스로 은폐하고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방법이다.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로부터 출발이다. 그것은 하나님이시다. 나로부터 출발된 것으로는 저기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몰아붙이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갈등을 겪기보다는, 성경이 말씀하신 이 출발지점을 확인하기보다는 오히려 외면을 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하기 싫어하는 고집장이’라는 데 아픔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이 지적하신 것이 사실인 것을 내 창피와 내 사회적 매장을 무릅쓰고 증명할 인생으로 나타내기보다는 그것이 증명되어서 하나님 말씀이 영광을 얻는 것보다는 내 자존심, 내 열등감에 치우친 그 알량한 나를 추스리는 일 때문에 나를 감춰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향하여 지적하시는 이 무서운 진리의 말씀을 나에게서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병이다.
우리 모두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로부터 하나님 앞에 부름받아 나온 걸레와 같은 자리에서부터 출발된 사람인 것을 기억케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이제 제가 꺼져가고 있습니다. 제 심지가 거의 다 타버렸습니다. 도와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하나님이 끄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것을 근거로 해서 나와야 한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짐으로 마음의 평정을 얻고 싶은 것은 일종의 정신적인 도피에 불과하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 약속을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그 방법에 맡겨버리는 삶을 의미한다. 우리를 여기서부터 부르셨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자리는 출발점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끌고온 중간지점이다. 어디서부터 여기까지 끌려 왔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저는 이렇습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이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이 은혜입니다” 과감하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생을 맡길 수 있는 신앙의 결심이 있어야 한다. 이 결심이 없다면 허비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이것만큼 불행한 것도 없다. 도달해야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오늘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며 거기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갈길을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이러한 배짱으로 살아야 한다. 신자는 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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