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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웃의 실수를 목격할때 (창 09: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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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말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 3:10,23)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 신의 약점이나 실수에 대하여는 관대합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면 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죄책감 때문에 견딜 수 없다면 무슨 일이 생겨도 벌써 생겼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비판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사람인 노아가 범한 실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술에 취해서 자식들 앞에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 성경은 이 노아를 가리켜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6:9 참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어찌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깁 니다.

 저는 이러한 장면에 성경의 참된 진정성(眞正性)이 있다고 생각합 니다. 저는 청년 시절 처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창세기를 읽으 면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거룩한 이야기만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 거짓말했고 야곱은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 이삭을 속였고 유다는 며 느리를 잉태하게 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 그 내용에 실망해 읽기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런 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인간의 참 모습이라는 깨달음이 왔 습니다. 성경은 업적과 성공담만으로 가득 찬 수많은 영웅들의 전 기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아무리 존경할 만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그의 약점이나 실수를 거리낌없이 폭로합니다. 저는 성 경의 정직성,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성경의 위대한 권위를 느 낄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노아의 실수만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노아의 실 수에 대한 아들들의 반응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와 가 장 가까운 사람들, 바로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가 실수했을 때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인의 태도를 공부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이 실수했을 때 어떤 행동이 바람직한가? 노아의 아들들의 반응을 살펴봅시다.

 관계를 파괴하는 반응 ^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보고와 고하매라는 두 동사에 주목하십시오.

 첫째, 보다는 히브리어로 『라아』인데 이 단어는 지나가다가 슬쩍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흥미 있게 계속해서 주목했다는 뜻입 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는 말입니다. 함은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 있는 장면을 보고 놀라서 후다 닥 뛰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의 부끄러운 광경을 계속 보면서 즐겼다는 말입니다.

함의 태도는 이웃의 실수를 즐기는 자세입니다. 이웃이 잘못되는 모습을 보면서 고소하게 생각하고 기분 좋아하는 놀부 심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이 당한 어려움, 부끄러움을 내 일처럼 여기 며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의 실수를 즐기는 것은 그 마음에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하매라는 동사에는 이웃에 대한 염려가 전혀 들어 있 지 않습니다. 이웃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재미있는 화제거 리가 생긴 것을 기뻐합니다.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데서 쾌감 을 얻습니다.

저는 사무엘하 1장 말씀을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그렇게도 못살게 굴던 원수 같은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 식을 들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쁜 소식이라며 동네 방네 알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좋아하기는커녕 통곡하며 애가(삼하 1:19-27 참조)를 지어 불렀습니다.

 함의 태도와는 아주 대조되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당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웃이 실수하고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그 일을 즐깁니까, 아니면 그를 위해 기도합니까? 함의 태도는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처사입니다.

 관계를 향상시키는 반응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 쳐 들어 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이 말씀에서 어깨에 메고와 덮었으며라는 동사에 주목해 보 겠습니다.

 첫째, 어깨에 메고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를 나타냅니다. 이 는 언제나 봉사하는 종의 태도를 표현합니다. 아버지가 실수한 것 은 사실이지만 이 아들들은 아버지 섬기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잘못을 덮어 줍니다. 아버지가 실수 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인격을 보호 하려는 아들들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귀한 태도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당신은 이웃의 실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봅니까? 함과 같이 상처 를 드러내어 더 아프게 만들지 마십시오. 셈과 야벳처럼 덮어 주 고 사랑으로 감싸 주십시오. 이는 그 결과가 저주와 축복으로 나 뉘기 때문입니다.

 함에게 내린 저주

성경은 정당한 비판을 인정합니다. 올바른 비판은 역사를 발전시키 는 소중한 원동력입니다. 성경은 이런 의미의 비판을 분별이라고 말합니다. 분별이란 어떤 일의 상황과 요인을 모두 살펴보는 것입니다. 곤란에 빠진 사람을 궁지에 모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처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왈가왈 부하는 것은 비판입니다. 성경은 이런 비판을 금지합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마 7:2).

함은 아버지 노아에 대해 분별하지 못하고 비판했다고 할 수 있습 니다. 그 결과 함에게는 저주가 내렸습니다. 중요한 점은 함에게 만 저주가 내린 것이 아니라 그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가 집중되었 다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 를 원하노라.

아버지보다 아들에게 더 큰 저주가 내렸습니다.

여기서 먼저, 함이 저주받은 흑인이고 셈은 황인이고 야벳은 백인 이라는 이야기는 근거 없는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이는 과거 백인 들이 흑인들을 착취하려 꾸며 낸 억지 소리입니다. 본문에서 중요 한 것은 왜 가나안에게 저주가 내렸는가입니다.

 자녀를 두신 분들은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괴로 움보다 자녀가 겪는 고통이 열 배, 아니 백 배나 더 큰 아픔을 가져 오는 법입니다. 특히 자신의 잘못 때문에 자녀가 벌을 받 는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그보다 더 끔찍한 저주는 없을 것입니다. 함이 받은 저주는 바로 자녀의 고난을 응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자녀가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지 금 당신의 이웃이 저지른 실수를 관대히 보아 주십시오. 남을 쉽 게 비판하는 사람은 그 자녀가 수모를 당한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 오.

 하나님의 엄중하고 엄숙한 징계는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라는 말씀에 압축되었습니다.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 누구에 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종의 종이 되라고 할 때는 인간의 자존심 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녀를 사랑한다면 이웃의 실수를 함부로 논하지 못할 것입니다.

 셈과 야벳이 받은 축복 ^ 26,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 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 주고 보지 않은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축복 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며 그와 동행하시 며 찬양을 받으십니다. 야벳은 셈과 더불어 복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 원합니까? 이웃을 비판하기보다 황금률을 실천하십시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

 이웃을 섬기고 높이고 그들의 잘못을 용납할 때, 주께서 당신을 높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삶 의 모습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섬기려 이 땅에 오셨고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 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런데 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높이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 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9, 1 0).

예수께서 먼저 낮아지셔서 우리를 섬기심으로 우리가 예수께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본을 따라 먼저 이웃을 섬기고, 어 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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