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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은 없다 (눅 18: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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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락 박사서남동 목사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보기를 하나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죄'라는 말은 지배자의 언어이다. '한'(恨)은 민중의 언어이다. 기독자는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의 한을 신학의 주요한 테마로 다루었습니다. 지금까지 민중신학에서 한의 개념에 대하여 내린 정의는 한의 심리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데 머물렀을 뿐이고 한에 대한 철저한 신학적 반성을 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죄와 죄의 용서가 말해지는 자리에는 죄의 한편만 등장합니다. 즉 가해자만 등장할 뿐이고 죄의 피해자는 전혀 시야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피해자를 안중에 두지 않으면서 자기가 지은 죄의 용서만을 목표로 삼는것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발로라 하겠습니다. 부당하게 피해를 당한 사람이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하면 그 마음 속에 한이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의 비유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유 이야기 자체는 2-5절에 전개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재판관, 과부, 그리고 그의 적대자입니다. 주인공은 과부입니다. 과부가 재판관에게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졸라대니까 재판관이 결국에는 그의 청을 들어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비유를 분류할때에 모범이야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범이야기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는 비유를 가르킵니다. 과부와 재판관에 관한 이 비유가 분류상으로 하나의 모범이야기이고 과부가 이 모범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고 한다면 이 과부가 행한 행동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된 셈입니다. 이 과부가 행한대로 너희도 그렇게 행하라.고 하는 것이 이 비유 이야기가 담고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과부의 행동이 무슨행위의 모범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아니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독자들에게 이 비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 비유 이야기에 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무슨 취지로 이 비유를 이야기 하셨는지를 누가복음 기자가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1절에 늘기도하고 낙심(낙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을 하나 말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늘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범이야기가 됩니다. 오늘날까지 거의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 비유를 기도에 대한 모범이야기로 해석 합니다. 즉 과부가 재판장에게 끈질기게 졸라댄 것은 하느님께 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범적 행동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여러가지 난점에 부닥칩니다.

첫째로 이 과부는 무신적이고도 안하무인적인 불의한 재판관에게 간청하는 데 반해여 기록자는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느님께 기도 합니다. 즉 과부와 기독자 사이에는 대응이 되지만 재판관과 하느님 사이에는 대응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이러한 해석은 이 비유에 덧붙여진 두번째 적용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적용문이라는 것은 비유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덧붙인 해석문인데, 그것은 그것은 비유 이야기가 무슨 현실에 응용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우리의 이 비유에는 두개의 적용문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하나는 7절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8절 말씀입니다. 8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수 있겠는냐.라는 물음으로 된 적용문이 있는데 만일 이 비유 이야기가 늘 기도하라는 모범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적용문은 그러나 인자가 올때에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볼수 있겠느냐.라고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셋째로 이러한 해석은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어구를 잘못 이해를 했습니다.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말과 낙심하지 말고 늘 기도하라는 말은 뜻이 다릅니다. 낙심하지 말고 늘 기도하라는 말과 '낙심하는것'과 '기도하는것' 둘 중에서 첫째것을 하지말고 둘째것을 하라고 하는 말인데 그것은 양자택일을 뜻하면서 강조점은 둘째것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달리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말은 '늘 기도하라'와 '낙심하지 말라'라는 두 명령문이 대등하게 연결된 것인데 이것은 둘다를 하라는 명령입니다. 다만 첫째것이 긍정 명령문에 반하여 둘째것은 부정 명령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두 명령은 전혀 별개의 내용을 가르키지 않습니다. 늘 기도하는 것은 낙심하지 않는것에 대한 하나의 내용 또는 방법을 가르킵니다. '책을 읽고 졸지말라'는 말에서 책을 읽는 행위는 졸지않는 행위에 대한 하나의 구체적인 내용이기도 하며 그렇게 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합니다.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명령에 있어서 늘 기도하는 행위는 낙심하지 않은 태도를 구체화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여기서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고수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낙심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낙심하지 않은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 줍니다.

종말론적 희망은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는데 근거하여 쌓아올린 장미빛 미래 설계도가 아닙니다. 종말론적 희망은 억압 받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이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끝내는 그들을 구출하시리라는 마지막 한 가닥 빛줄기를 바라보고 일어서는 몸부림입니다. 종말론적 희망은 현실의 절망의 벽을 밀치고 나가라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입니다. 이 속삭임을 포착하는 수신기가 믿음 입니다.

비유 이야기속에 과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무력한 약자의 신세를 잘 대변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재판관 즉, 불의하고 안하무인적인 재판관에게 이 과부가 그의 문제해결을 호소한다는 것은 이 과부가 놓여잇는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냅니다.

과부의 적대자는 강자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강자의 편을 들기 마련입니다. 현실을 냉철한 눈으로 판단할때 과부에게는 아무런 가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절망의 어두움 속에서도 이 과부는 좌절하지 아니하고 절망의 벽을 끊임없이 두드렸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무반응에도 불구하고 낙망하지 아니하고 자꾸 졸라댔습니다. 이 과부가 해결 하고자 발버둥치는 사건의 내용이 무었인가를 밝히는 것이 이 비유의 뜻을 밝히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 과부가 재판관에게 호소한 일이 무었인지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3절에 인용되어 있는 이 과부의 호소를 정확하게 번역해야 합니다. 개역성경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번역 했습니다. 이와달리 공동번역은 저에게 억울한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요라고 했고 카돌릭 200주년 기념성서는 내 (송사) 적수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요라고 했습니다. 개역성경의 번역과 나머지 두 성경의 번역 사이에는 의미상 엄청남 차이가 있습니다. 원한은 마음에 맺힌 원망스럽고 한이되는 생각인데 원한을 푼다는것은 원한을 맺히게 한 상대에게 해를 주어 앙갚음을 하는것을 뜻하는것 뿐입니다. 개역 성경이 여기서 '안티디코스'라는 낱말을 '원수'로 번역한 것도 원문의 뜻을 곡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마태복음 5장 25절에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법정에 갈때에...라는 말씀에서 '고소하는 사람' 헬라어로 '안티디코스'입니다. 이 낱말은 소송사건의 적대자를 가르킵니다. 소송사건에 있어서는 권리의 침해가 문제되어 있고 재판은 부당하게 침해된 권리를 회복해 주는 일입니다. 그르므로 이 과부가 재판관에게 자기의 일을 해결해 달라고 호소하는데 사용한 '엑크디케손'이라는 헬라어 동사는 '원한을 풀어 주십시요'가 아니라 '권리를 찾아 주십시요'를 뜻합니다. '디크'라는 어간은 '권리'를 뜻합니다. 이 동사가 3절과 5절에서 사용되었고 7절과 8절에는 이 동사의 명사형이 사용되었습니다. 3절의 '적대자'는 어원상으로 분석하면 권리를 대적하는 사람을 뜻하고 6절의 '불의한'이라는 형용사는 '권리를 부정하는'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의 RSV 3절을 Vineicate me against my adversry라고 변역 했으나 NRSV 는Grant me justice against my oppment 라 했습니다. 독일어 성경도 대개 Schsffe mir Recht gegenubger meinem Gegner라고 했습니다.

과부는 무력한 약자입니다. 그의 적대자는 강자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정의의 편에 서지않고 강자의 편을 들기 마련입니다. 이 과부는 가망이 전혀 없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했습니다. 8절의 적용문에서는 이 과부의 처신을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 하느님께 밤낮 부르짖는 것에 견주었습니다. 부르짖음은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는 약자의 외침입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을 해방하셨습니다. 사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서 부르짖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구출해 주셨습니다. 야고보는 품꾼에게서 가로챈 삯이 부자의 창고에서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성서에서 부르짖음은 억울함을 표출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한국민중에게 있어서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서도 그것을 해결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면 그 억울한 감정은 한이 되어 가슴 속에 맺혀 있습니다. 한 숨을 쉰다는 것은 무력감의 체념적 표현 입니다. 한국의 민중과 성서에 나타나 있는 하느님의 백성을 비교해 볼때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역사운행에 대한 신뢰에 근거하여 절망을 거부합니다. 절망 속에서 기도한다는것은 절망을 거부하는 부르짖음이요 몸부림입니다. 기도 한다는것은 낙망하지 않음의 적극적 표현 입니다. 이 과부의 처신은 어떠한 극한적 역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삶의 모범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 특히 대도시 교회의 기독자들은 대개 중산층에 속하여 있으므로 이 비유의 과부처럼 그렇게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비유 이야기가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과부와 그의 적대와 재판관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편에 서야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에게 지체없이 권리를 찾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한에 맺힌 민중이 있습니다. 서남동 목사님의 말씀대로 기독자는 민중에게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역사 운행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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