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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마 03:1-12)

첨부 1


마태복음 1-2장에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Birth Narrative)가 기록되어 있으며, 4장 12절부터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실제로 시작되고 있다. 따라서 그 사이에 위치한 3:1-4:11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 대한 준비과정을 담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크게 세례요한의 사역을 기록한 3:1-17과 예수의 광야시험을 기록한 4:1-11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를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면, 3:1-12는 세례요한의 선포를, 그리고 3:13-17은 세례요한에 의한 예수의 세례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는 여기서 주로 마가복음 1:2-6의 본문과 어록자료(Q)에 있는 세례요한의 선포(눅 3:7-10 참조) 본문을 자료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렇게 두 자료를 융합시킴으로 해서 그는 마가가 전하는 단순한 사건보고에 이스라엘을 향한 임박한 심판의 경고라는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자료의 융합과 편집적인 작업을 거친 마태의 본문은 그 문학적인 구조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

I.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한 서술적 보고 (1-6절)

1. 세례요한의 출현 (1절)

2. 세례요한의 선포의 요약 (2절)

3. 성경의 인용 (3절)

4. 세례요한의 옷차림과 음식 (4절)

5. 사람들의 반응 (5-6절)

II. 세례요한의 선포 (7-12절)

1. 임박한 심판의 선언 (7-10절)

2.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 (11-12절)

 사역
○ 1 그 때에 유대광야에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이렇게 선포했다,
2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임하였다.
3 이 사람이 바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예언된 사람이다:광야에서 외치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대로를 곧게 만들라.
4 이 요한이라는 사람은 낙타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 때 예루살렘 사람들과 유대 전지역 및 요르단 인접지역의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와서,
6 그들의 죄들을 고백하면서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 7 그런데 그는 많은 수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에게 세례 받으려고 나아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독사의 종자들이여, 누가 너희더러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도망하라고 일러주었느냐
8 그러므로 (먼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부터도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
10 이미 도끼는 나무뿌리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뽑혀져서 불에 던져질 것이다.
11 나는 회개를 위하여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고 있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께서는 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셔서 나는 그분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다. 바로 이분께서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그분의 체가 그분의 손에 들려져 있다. 그분께서는 (이제) 그분의 타작마당을 정리하시면서 알곡은 창고에 모으시고, 빈 껍질은 꺼지지 않는 불로 태워버리실 것이다.

 본문주석

( 1절 )

마태는 여기서 그때에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세례요한이 출현한 때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눅 3:1-2이 당시 통치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시대적 배경을 밝히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마태의 관심이 연대기적인 보고에 있지 않고 사건 자체와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에 의하면 세례요한의 선포는 유대광야에서였다. 이것은 예수의 선포와 사역이 갈릴리에서 되어진 것(4:12, 18, 23)과 대조되는데, 이러한 차이는 세례요한이 옛 시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사역한데 반해서 예수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람으로서 그의 선포와 사역은 궁극적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열려지게 될 것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2절 )

마태복음에는 세례요한의 선포(3:2)와 예수의 선포(4:17)가 동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적어도 하늘나라의 선포라는 점에 있어서 세례요한과 예수와의 연속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기서 마태는 마가복음의 본문에 중요한 편집적인 수정을 가하고 있다. 즉 막 1:4 에서 죄사함을 위한 이라는 구절을 삭제한 것인데, 후에 최후의 만찬 부분에 가서 마태는 이 구절을 막 14:24에 붙이고 있다. 이러한 마태의 편집적인 작업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회개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죄를 사해주지는 못하며 죄의 용서는 궁극적으로 예수의 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 것이다.

( 3절 )

여기서 마태는 막 1:2-3의 이사야서 예언을 약간 축소하여 인용하고 있다. 이 구절은 세례요한의 사역이 가지는 의미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데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마태는 구약성서를 인용할 때 주로 형식인용구 (formula quotation)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모두 예수에 관한 예언인 경우이다. 물론 세례요한의 경우도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마태는 의도적으로 성취되다라는 표현을 예수에게 국한시키기 위해서 세례요한에 관해서는 단지 이 사람이 바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해진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 4절 )

세례요한의 의복과 음식은 금욕주의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의 모습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11:18-19). 적어도 마태에게 있어서 금식이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듯이 금욕주의도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 세례요한의 금욕적인 삶은 그의 세례가 회개를 위한 세례이기 때문에 참된 회개를 위한 자기절제를 상징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5-6절)

세례요한의 선포는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즉 그의 선포에 반응하여 예루살렘과 온 유대 그리고 요르단의 전 인접지역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서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마태는 여기서 마가복음의 οι Ιερσολυμιται παντεs를 Ιερσολυμα라고 고친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대한 마태의 부정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미 2:3에서 마태는 모든 예루살렘이 헤롯 편에 서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마태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유대의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구원보다는 심판의 대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7절 )

7절부터 마태는 마가복음의 본문을 떠나서 Q자료의 본문으로 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마태는 세례요한의 하늘나라선포가 일차적으로 심판의 선언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마태의 본문에는 많은 수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의 세례를 향해 나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세례요한은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손들아라고 말하는데, 이 표현은 나중에 예수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에서 다시 사용되고 있다 (12:34, 23:33). 즉 마태복음 속에서 세례요한과 예수는 유대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함께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3장에 나오는 예수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그들의 위선(hypocrisy)과 스스로 의롭다고 여김(self-righteousness, 23:28)에 있다. 따라서 여기 세례요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대한 비판도 그러한 면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8절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은 세례요한의 심판경고가 단순한 파멸을 예언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와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는데 있음을 말해 준다. 마태복음 속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주로 심판의 대상으로 나오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마태복음에는 입으로 회개하고(3:7) 입으로 주를 시인하고(7:21) 입으로 의를 행하는 것(25:31-46)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나온다. 따라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허한 언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의를 상징적으로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9-10절)

여기서는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하는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 즉 구원을 위해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런 점에서 그들이 인종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구원을 보장해 주는 근거가 되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구원에 대한 안도감 (security)을 가져다준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부터도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세례요한의 말은 바로 이런 인간적인 안도감을 철저히 부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속에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인종적인 의미에서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좋은 열매(3:8, 10)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옛 이스라엘을 대치할 새 이스라엘 즉 새로운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것(8:11-12, 21:43)에 대한 예표가 되고 있다.

(11-12절)

세례요한의 선포 속에서 처음으로 예수가 소개되고 있다. 본문은 여기서 μεν-δε-의 희랍어 구문을 통하여 세례요한과 예수를 선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11절에서 양자 사이의 대비의 초점은 세례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사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세례요한의 사역은 단순히 사람들로 하여금 다가올 심판에 대비하여 회개하게 하는데 있지만, 예수의 사역은 그들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인지 즉 그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가려서 구원받을 자들과 멸망 받을 자들을 가려서 심판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꺼지지 않는 불로란 표현은 예수의 사역에 의해 나뉘어질 구원과 멸망이 종말론적인 차원을 가지는 심판이 될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떠한 모습이냐 하는 것이 최후의 심판날 그가 받을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어 줄 것이라는 마태의 구원관과 맥이 통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

대강절(advent)은 성탄절에 앞서서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흔히 성탄절은 계절이 주는 들뜬 분위기에 편승하여 마냥 즐겁고 흥겨운 절기로만 느껴진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매우 귀하고 뜻깊은 사건이 아닐 수 없고, 따라서 그 귀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인 성탄절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절기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이 인간과 세계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 값싼 은혜가 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오심을 맞기 전에 그의 오심에 대하여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사람들이 해야 할 준비가 바로 회개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 회개는 뉘우치는 생각이나 언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 맺어지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수반해야 한다. 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위선(hypocrisy)과 스스로 의롭다고 여김(self-righteousness)을 극복하고 근본적인 사고와 삶의 변화를 통해 사랑의 열매를 맺어 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22:37-40, 25:31-46).
이렇게 진정한 의미의 회개를 통해서 삶을 변화시키고 좋은 열매를 맺어 가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사건이 좋은 소식이 될 것이지만,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그릇된 안도감 (false security)에 빠져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면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오히려 심판을 불러오는 불행한 소식 이 될 것이다.

이렇듯 예수의 오심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선포가 구원의 소식과 멸망의 소식을 함께 예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의 핵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 속의 세례요한은 심지어 오늘의 모습대로라면 곧 멸망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들에게조차 단순히 너희는 이제 곧 멸망 받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너희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구원의 길로 나아오라는 사랑의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에 속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없듯이, 어떤 사람이 현재 멸망 받을 자들의 무리에 속했다고 해서, 즉 지금까지 그 사람의 삶이 위선적이고 의롭지 못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오심은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시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셔서 그들도 구원에 이르게 하심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이 우리에게 참된 의미의 복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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