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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경 속의 축복 (마 08: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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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이런 경우에 있는 사람들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장애자인 아들을 위해 발명가가 된 사람도 있고, 투병 중인 부모에게서 영향을 받아 의사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고난의 역경 중에 얻은 영향들입니 다. 사람은 어차피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영향을 받을 바에는 좋은 면으로 영 향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가난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진 사람도 있지만, 그 가난 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거부가된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보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역경 중에 절망하거나, 원망하기 쉽고, 그래서 자신을 포기하고 비관하여 소망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같은 역경 중에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도리어 무엇인가를 새로운 계기로 전환 하는 동인(動因)이 되었는가 하면, 같은 역경에서 비관 자살하는 사람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이 바로 신앙의 차입니다. 대부분의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 을 보면, 바로 역경 중에서 축복을 받은 그런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문 제없이 산 사람들이 아니라, 문제 속에서 신앙으로 극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뜻이 함축되 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의 내용 자체가 과학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위 신화적(神話的) 얘기라고 하겠지만, 성경은 결코 과학을 말하는 교과서가 아니라, 구원의 메시지로서 계시된 말씀이기에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깊은 (위로)와 (자신감)과 (용 기)를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몇 가지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먼저 배에 올랐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23절에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배에 올랐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아 올 랐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이 먼저 (바닷길)로 가려고 앞장섰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역경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계시록 21:1절에 회복된 하늘 나라를 말하면서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다)란 고통과 고난, 눈물과 역경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닷길을 택하여 앞장서서 배에 올랐다는 것은,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니 제자들이 당할 고난의 길에 그가 동참하려고 배에 먼저 올라탔다 는 뜻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바다를 건너가는 것처럼, 세상은 항상 우리에게 역경의 바람 을 불어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주님께서 앞장 서 먼저 배에 올 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성도들은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 중에서 주님 을 생각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너무나 불안한 세상입니다.

하루 하루를 무사히 가족들이 들어오면 감사해야 할 불안한 세상입니다.

오늘날 과년한 딸을 키우는 집안의 부모님들, 그리고 집에 청소년을 가진 성도님 들, 남의 자식 얘기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내 자식들이 밖에서 어떤 경우를 당하 는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두 불안한 세상입니다.

 지난번 제직 수련회를 인도해 준 민 목사님 교회의 교인은 차를 타고 가다가 고장이 나 길가에 세워 놓고 본 넷을 열고 무엇이 고장이 났는가 보고 있는 순 간에 술취한 차가 와서 왕창 받아버려 척추를 상하여 병원에 입원 중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이것이 예측 불허의 역경의 바람 입니다. 그것이 비단 남의 교회의 얘기만은 아닙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서도 지 금 민병승 집사님과 함현철성도가 어떻게, 왜, 자신이 그렇게 다쳤는지도 모르 는 형편에서 의식이 없이 몇개월식 있습니다. 모두가 예측 불허의 역경의 돌풍들 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제자들 보다 앞서 배에 오르셨던 주님 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길은 주님이 앞장서서 배에 오 르신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길에서 죽게 될 경지에 이 를 때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의 형편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2. 제자들의 형편이 어떠하였습니까 저들은 풍랑이 거세어 갈 때, 자신의 노력으로 노를 저어 보려고 무척이나 애 를 썼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풍랑을 이겨 보려고 아마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노를 저어서 언덕에 대려고 애쓰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인생 전체를 보 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풍랑을 이겨 보려고 애 를 씁니다.

부단히 행복이라는 언덕을 향하여 노를 저어 봅니다.

요즈음 우리 나라에 와서 노동하는 외국의 근로자들을 보면서 저는 저들이 한국 에 올 때에 어떤 꿈을 꾸면서 왔을까 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두 자신의 꿈을 실현해 보려고 오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본국에서 못 이룬 꿈을 한국에 와서 이루기 위하여 밤과 낮을 구별하지 않고 일 합니다. 그들에게서 꿈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을 벌어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아 보겠다 것,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노를 저어 그 행복에 언덕에 대려고 밤낮 없이 일합니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행복의 언덕에 오르려고 애들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만 진정한 행복을 성취할 수 있겠 는가 예기치 않은 인생의 풍랑은 지금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 중에는 일하다 손이 잘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불법 체류라는 것 때문에 산 재 보험도 못 받고, 그리고 돈도 벌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예기치 않았던 풍랑들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정에 풍랑이 그치지 않는 가정들이 계십니까 그럴 때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풍랑의 의미를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고난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얘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로마에 살면서 사업에 성공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갑자기 풍랑이 닥쳤습니다.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유대인의 추방령이 내렸습니다.

요즘 사업하는 이들의 말대로 하면, 권리 금이란 것은 한푼도 받지 못하고, 물 건 역시 헐값으로 넘겨야 만 했을 것입니다. 공권력에 의한 파산선고 였습니다.

할 수 없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상심해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울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천막 제작 업이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높은 계획을 봅니다.

만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졸지에 당한 추방령이 없었던들, 바울과의 만남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업과도 무관한 삶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도리어 고난의 역경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혹시 지금 풍랑 중에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 풍랑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뜻 없이 성 도들을 고난 속에 두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3. 풍랑 중에 있다면 이제 잠든 주님을 깨워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결국 주님을 깨웠습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주님을 흔들어 깨웠습니 다.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흔들어 깨웠습니다. 우리에게 어느때 주님께 부르짖게 됩니까 죽게 된 지경입니다. 신자들이 평범할 때는 그렇게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위기가 닥치고 죽게 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죽겠다 고 주님을 깨울 수 박에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하겠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대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풍랑 중에서 주님과 한배를 탄 제자들이 죽겠다고 아우성 친 자체를 가만히 보 면, 과연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주님과 한배를 타고 가면서 왜 죽겠다고 하였 겠습니까 빠지면 자기들만 빠지고, 가라앉으면 자기들만 가라 앉는 것이 아니건 만, 주님의 말씀처럼 믿음이 적었기 때문인 것을 쉽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런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 생활이란 주님과 한배를 타고 가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풍랑만 보고, 그 풍랑을 내 힘으로 해결해 보려다 지치는 경우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 니다. 풍랑 중에 주님이 함께 한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내 이런 고통 속에 주 님이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역사의 위대한 신앙 인들을 보면 평 생을 고통 속에서 산 사람들입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부드는 지난날들을 돌이켜 볼 때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살아 있는 성자라 고 추앙을 받는 테레사 수녀는 고열과 마비 증세를 동반하는 만성 두통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토벤은 불치의 귀머거리였습니다. 파스칼은 18세부터 죽을 때까지 고통 가운데서 지내야 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죽게 된 지경에서 주님을 깨운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정작 풍랑 중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깨우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주님 을 흔들어 깨우는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비로소 기적의 역사를 체험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체험적 신앙입니다. 체험적 신앙은 주 님이 함께 하심을 몸소 느끼고 확인한 신앙을 말합니다. 누가 뭐라도 나는 주님 을 만났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껏 풍랑 중에 자 신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했다면, 금년에는 주님을 깨워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라고 했던 놀라움을 경험하 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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