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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격려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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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합시다. 할렐루야!
만약 누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까닭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아주 적절한 말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다.” (고전15:17,18) 맞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부활 사건은 그것뿐 아니라 또 다른 중요한 것들을 들어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을 통한 격려입니다.

부활의 사실이 참으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기 위해, 오늘 우리는 그 처음 부활절 아침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 첫번 부활절 아침도 오늘 아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날은 주일 첫 날이었습니다. 막 동녘 하늘에서는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오솔길 위에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의 어머니 살로메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주님의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도착했을 때, 그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세마포 옷만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주님의 시체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주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려고 왔었지만 그 시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슬픔에 잠겨 깊은 실망에 빠지게 되었고 드디어 슬픔에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그들이 무덤 옆에 서 있는데 갑자기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들의 모습은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었습니다.' 천사들의 출현은 여인들에게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만들었지만, 천사는 여자들에게 너희는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면서 예수 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가리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누우셨던 무덤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알리고, 갈릴리도 먼저 가셨으니 갈릴리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고 가리켜 주었습니다.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도중에서 부활하신 예수 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예수 님은 돌무덤 속에 갇혀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고 침을 뱉으며 죽일 수는 있으나 그를 묻었던 무덤 문을 열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님을 그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굴욕과 죽임을 당했으나 다시 사신 우리 주님은 이미 어떠한 제한도 뛰어 넘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을 무덤이 가둘 수 없고, 사망과 음부의 권세도 그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이 가장 악랄한 박해에도, 모든 수단과 방법과 간교한 죄를 동원한다 해도 이제 부활하신 그분을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 그분은 무덤의 한계를 깨뜨리셨고 죽음의 지평을 여셨고 새로운 하늘의 능력을 이 세상 속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 님께서 묻히셨던 무덤을 찾아가 죽어 있는 시체를 찾아 그 시체 위에 향품을 바르려고 했었습니다. 세 여인은 예수 님의 빈 무덤을 찾아 예수 님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공동묘지에 남아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살아나시고 슬픔 때문에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믿음이 없어 의심하는 제자들을 찾아와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하시며,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할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살아나신 예수 님은 실망 속에 터덜거리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 예루살렘으로 뛰어오게 하시고,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배신한 죄책과 수치와 아픔 속에 갈릴리 바다로 물러간 베드로를 찾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고 재차 사명을 부여하시며, 손과 옆구리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아야 믿겠다는 도마에게 나타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 보게 하셨습니다.

살아나신 예수 님은 가는 곳마다 슬프던 자는 기쁨을, 실망한 자는 소망을, 의심하는 자는 확실한 믿음을, 수치와 죄책에 빠져 있는 자는 용서와 사랑을, 좌절하고 있는 자는 새로운 사명과 용기를 가지고 새 사람을 입어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는 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실망한 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지혜 없는 자, 좌절한 자, 의심하는 자, 살 소망이 끊어진 자,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을 새 사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모든 사람은 격려를 필요로 합니다
(Everyone needs en-couragement). 최상의 격려는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에게 들려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다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5, 6절)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격려는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점입니다.

첫째는, 우리의 믿음이 그릇된 신뢰가 아니었음을 말해 줍니다.
제자들은 약 3년 동안 예수 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기적을 보았고, 그의 메시지를 들었으며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들의 믿음은 그들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대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부활절 아침 주께서 그들을 찾아 주셨을 때 주님을 향한 그들의 신뢰가 정당함이 확인되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이 살아나신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그릇된 신뢰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명한 영국의 역사가 깁본(Gibbon 1737-1794)과 아놀드 토마스(Arnold Thomas 1795-1842)도 '예수의 부활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만일 예수의 부활이 허위 날조 된 거짓이었다면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로마 정부가 침묵으로 일관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 정부는 자기들이 반역자로 규정하고 자기들의 손으로 '죽여 장사까지 지냈던 바로 그 예수의 종교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자기 나라의 국교로 공인했고(313년) 국교로(392년) 확정을 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예수의 부활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 신앙을 재확인하여야겠습니다.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라고 고백하는 이 뚜렷한 신앙 고백이 부활절을 맞는 우리들의 분명한 고백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음을 뜻합니다.
예수 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제자들은 예수 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으로 생각했고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오사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 20:19)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하는 주님에게서 자신들이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하)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해 지금도 모든 신자들의 삶 속에 살아 계십니다(행 1:4). 요 14:23-26, 16:7: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처지는 어떻습니까 빈 무덤 앞에서 슬퍼 울고 있던 마리아와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는 지금 슬픔으로 가득찬 무덤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비록 행복한 듯 하지만 우리의 깊은 곳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남북의 분단, 노사관계의 대립과 불신, 가정의 파괴, 집권 여당과 야당의 정치 권력을 둘러싼 대립 속에서 각계 각층의 욕구 분출 속에서 우리 사회는 상당한 무질서와 혼란 속에 빠져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은 바로 마리아처럼 우리가 슬픔과 절망 속에 잠겨 있었을 때입니다. 승리의 주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시사 부활의 승리로 우리들을 승자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없애 주실 것이며 우리 속에 불안과 공포를 없애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의 암담한 현실을 새롭게 하실 약속자로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우리의 삶은 무덤이 끝이 아님을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지상 사역 기간 중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 17:22, 23)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막 9:10)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덧붙이기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 20:9)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이 무덤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

성경은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위협이 없는 이상적인 삶이 끊임없이 지속되기를 갈망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무한한 것, 보다 더 영원한 평화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찾으며, 애태우는 것이 인간의 거짓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죽는 이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사실도 능력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눈에 대하여는 빛이 있고, 귀에 대하여는 소리가 있고, 폐에 대하여는 공기가 있는 것처럼, 인간에 대하여는 영원한 내세의 생명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넷째, 우리의 내일(미래)은 오늘(현실)보다 더 나을 것임을 가리켜 줍니다.
성금요일의 어둠은 이 사적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슬픔은 부활절 아침에 기쁨에 의해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부활은 역사에 대한 희망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 속에는 변질될 수 없고, 극복될 수 없는 절망적인 흑암의 현실은 존재치 아니합니다. 역사의 현재가 아직도 암울하다 할지라도 이 현재는 약속을 그 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부활하신 자에 의해 주어진 역사를 새롭게 하시고 완성시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에서 부활 신앙은 주어진 현존하는 것에 대한 체념 내지 만족 속에 있지 않고 새로운 현실의 가능성을 향하여 현실을 변혁시킵니다. 부활 신앙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부활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은 현실을 변혁시키는 새로운 현실 참여로 나가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 그 자체도 놀라운 일이지만 우리를 죄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을 시키고 구원의 기쁨을 줌은 물론, 이 세상의 고난 가운데에서도 위로와 격려가 되는 반면 주를 대적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증거가 되기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간직한 저와 여러분은 그 사실을 속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활의 소망에 참여케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의 부활을 통한 격려가 여러분 가정과 삶 위에 충만히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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