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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아,야훼께 희망을 걸라 (시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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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대부분은 본디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 사용되던 것들로서 여러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즉 찬미(Hymns), 탄식(Laments), 신뢰의 노래(Songs of Trust), 감사(Thanks-givings), 거룩한 역사(Sacred History), 군왕시(Royal Psalms), 지혜시(Wisdom Psalms), 예배의식(Liturgies)등으로 나뉜다. 131편은 그 중에도 신뢰의 노래에 속하는 시이다.

150편의 시 중 제 120편에서 134편까지 의 열 다섯 편의 시는 (shir hamma'aloth)라는 표제가 붙은 시들로서 일반적으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인식되어 있다. 영어로는 단순히 A Song of Ascents라고도 하고 옛 성경에서는 A Gradual Psalms라고도 했다.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1) 앞 절에 나온 낱말을 발전적 혹은 상승적(上昇的) 리듬(rhythm)을 가지고 반복하는 시(시121:3-5:123:1-2:127:1-2:130:5-6).

(2) 예루살렘 성전의 유대 여인들의 뜰에서 유대 남자들의 뜰로 올라가는 열 다섯 층계 하나 하나에서 부르는 열 다섯 편의 시.

(3) 바벨론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을 암시하는 시들(에스라 2:1:7:9).

(4)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오고 가면서 부른 시들, 특히 추수축제 때에 부른 시들.

 한글 개역성경과 표준새번역은 (4)의 설을 따라 각각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고 풀이하였다.

스툴뮬러(Carroll Stuhlmueller)는 120편-134편을 순례시로 추정하고 각 시의 성격을 매겨 보았다.

 120편-광고(announcement) 121편-출발(beginning) 122편-즐거운 예루살렘 도착(joyful arrival at Jerusalem) 123편-예루살렘에서 드리는 기도(prayers offered at Jerusalem) 124편-예루살렘에서 드린 감사(thanksgiving offered at Jerusalem) 125편-휴식 (pause) 126편-곡식단을 들고 행진(processions with sheaves) 127편-기도(invocation) 128-129편-축복과 저주(blessing and curse) 130편-속죄 제사(expiatory sacrifice) 131편-계약의무의 갱신(a renewal of covenant obligations) 132편-예루살렘을 기리는 또 하나의 행진(another procession honoring Jerusalem) 133편-거룩한 식사(sacred meal or communion sacrifice) 134편-성전 례위인들에 대한 작별 인사(a farewell to the Levites at the Temple)

(Harper's Bible Commentary,487)

이상의 맥락에서 131편을 하나의 순례 시로 간주하고, 석의를 통하여 그것이 주는 메세지를 찾아보도록 하자.

 I. 석의

131:

1. 우선 표제에 나오는 은 개역에서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번역되어 있다. 축자적으로는 LXX의 Ωide ton anabathnon to Δauis나 NRSV의 A Song of Ascents. Of David가 옳을 것이다. 즉 층계의 노래, 올라감의 노래라는 시의 종류를 먼저 말한 다음, 다윗의 시, 혹을 다윗을 위한 시편임을 밝힌다.

 는 (올라간다)를 어원으로 하는 여성 복수 명사로서 여러 층으로 된 계단을 말하거나, 여러 차례의 올라감 이라는 추상명사일 수도 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 성전에라는 말과 순례자라는 말을 보충하여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고 설명했다. 원문에는 이 뒤에 나왔는데 개역과 표준새번역에서는 LXX나 영어 번역들처럼 뒤에 두지 않고 앞으로 내 세웠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무엇인 모르겠다. 특히 개역에서 곧이라는 접속사를 둔 것은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말은 다윗의 시는 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표준새번역에서 다윗의 시 해 놓고 카마를 붙인 것이 오히려 낫다. 그러나 보다 더 정확하기 위해서는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다윗의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ledawid)는 LXX에서처럼 즉 for David 혹은 to David 라고 읽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다윗의 직접적인 글이 아니라 시인이 다윗에게 바치는 글, 혹은 다윗의 이름으로 대신 쓰는 글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 뜻에서 영어 번역들이나 다른 많은 번역들이 Of David라고 한 것 같다.

 이 시인은 첫 마디로 (YHWH)여 하고 자기가 신뢰하는 하나님을 부른다. 보통명사인 일반적 하나님도 아니고, 대명사격인 ('adonai, 주님)도 아니다. 물론 입으로는 아도나이라고 했겠지만 마음과 글로는 이스라엘 고유의 하나님의 이름 를 내 세운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러 성전에 올라와 엄위하신 야훼 앞에 서 있다. 자기 자신과 자기 민족이 과거에 저질은 무수한 허물과 죄를 상기한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채찍을 드셨고, 그들을 먼 나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하셨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엄위하심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천 번 만 번 지당한 징계였다. 그 진노의 하나님은 노를 푸시고 이제 이스라엘을 고국으로 돌려 보내셨고,다시금 오매불망 그리고 또 그리던 예루살렘 성전을 개축하고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은총과 자비를 베푸셨다. 시인은 이렇게 과거의 좌를 참회하며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에 감격하며, 야훼 하나님을 불렀다.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 시인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첫째로 마음이 교만했었던 것을 느끼며 뉘우친다. 하나님의 심판과 사죄의 은총을 경험한 자로서,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와 그에게 울부짖으며 통해하고 결단한다. 과거처럼 마음이 잔뜩 높아서 안하무인이 되는 일이 없도록 작정했다는 것이다.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 첫 행에서 마음을 말했고 그 평행구에서는 눈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잘못된 태도와 행실은 우선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는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한다. 여기서 우선 눈이 악을 저지른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는 표현이 아마도 그것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 말에 콧대가 높다는 말도 있지만 여기서는 눈을 가지고 교만을 표시했다. 과거에는 교만한 눈을 가지고 자기 이상 높은 자가 없다고 보았고,하나님까지도 깔보았었다. 그렇다면 동료 인간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겠는가 문자 그대로 안하무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서 결단의 고백을 한다. 이제는 결단코 눈을 높여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깔보는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이것을 의역하여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로 처리했다.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 ). 여기서 시인은 과거에 자기가 흔히 하던 일을 또 회상한다. 과대망상증에 걸려서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어마어마한 일을 꾸몄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어서 분수에 맞는 일을 해야 하는데,잔뜩 교만해져서 분에 넘치는 일을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역량 안에서 알맞은 일을 해야할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다던가,동료 인간의 한계선을 침범한다던가 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제 시인은 그것을 뉘우친다. 다시는 그러한 분수에 넘치는 큰 일에 종사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다(lo' hillakhti, I do not occupy myself with,NRSV). 시인은 과거에 굉장하고 기이하고 놀라운 것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복한다. 평범한 것에 가치가 있고 그것들도 다 하나님의 은총임을 깨닫지 못했었다. 하루 하루의 삶에 충실하기보다 기상천외의 것을 추구하였다. 마치 신기루를 좇는 사람처럼. 자기 힘으로는 결코 될 수 없는 일( )을 도모한다는 것은 시간과 정력의 낭비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그것을 뉘우치며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131:

2.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 시인은 과거의 자신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심령( nephesh)이 얼마나 들떠있었고 불안정하고 불안하였던가를 깨닫는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고 난 이제 그는 결심을 한다. 이제부터는 자기 심령을 안정시키고 제어하여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을 가지겠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표준새번역에서는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라고 자동사로 표현했지만 여기의 히브리 동사들( 와 )은 강력한 타동사들로서 자기 심령을 능동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는 결의를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개역의 번역이 옳다고 본다. LXX에서는 이 대목의 해석이 달라졌다. 심령을 평온케 한다는 말을 오히려 내 심령을 높였다는 뜻으로 보았다( ). 그것은 LXX 번역자들이 가졌던 히브리어 원문에 가 로 바뀌어 나타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원문이 옳다면 의미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기는 하지만( ) 젖뗀 아기가 어머니 품에서 당당함같이 이제 하나님 안에서 마음이 튼튼하다는 뜻이다.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젖뗀 아이( gamul)는 마음에 안정이 없다. 젖뗀 아이는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그러나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을 때 마음이 평안하고 안정된다.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안도하는 마음이 마치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서 안도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내 중심이 젖뗀 아이와 같도다( ). 여기의 내 중심은 위의 심령과 같은 낱말이어서 구태여 중심이라는 말로 다르게 표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NRSV에는 my soul is like the weaned child that is with me라고 번역되어,시인이 직접 가정에서 체험하는 젖뗀 아이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즉 자기 집의 젖뗀 아이를 봐서 잘 알 수 있다는 말이다. NRSV 각주에는 my soul within me is like a weaned child라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즉 내 속에 있는 내 심령은 마치 젖뗀 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 하나의 형편을 생각할 때 마치 젖뗀 아이와 같아서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자기를 지키시고 용서하시고 새 희망을 주시는 야훼를 생각하면서 마음의 안정과 평안 을 가지기로 했다는 것이다. LXX에는 역시 다른 해석이 나온다. 라는 번역은 내 심령에게 주실 보상(reward)으로라는 뜻인 바, 시인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니 이제는 마음이 든든하여,마치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 안에서 당당한 것과 같으며, 자기 심령에 무언가 베풀어주시는 것이 있어 보여 마음든든하다는 말이다. 의 을 로 바꾸어 읽으면 내 심령이 나를 좋게 해준다(my soul does good to me)는 말이 된다. LXX의 대본이 masora 본문과 달리 (tigmol이나 tiggamel)이었는지 모른다.

 131: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시인은 지금까지 자기 개인의 고백과 결단과 포부를 말했다. 그러나 이제 제 3 절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호소한다. 자기 개인의 신앙 경험을 통하여 자신 있게 호소할 수 있었다. 야훼만이 자기 개인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살리고, 보호하고, 행복하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였기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그를 앙망하고 의지하고 희망을 걸라는 것이다. 표준새번역에는 의지하여라고 했지만, 본 뜻에 가까운 것은 바란다 희망을 건다(hope NRSV, LXX)일 것이다.

 II. 사 역

131:1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다윗의 시.

야훼여! 인제 내 마음 교만치 않습니다.

내 눈은 높지 않습니다.

나 이제 분수에 넘는 큰 것,기이한 것에 정신을 팔지 않으렵니다.

 131:2 오히려,나는 내 심령을 가라앉히고 잠잠케 합니다.

어미 품에 있는 젖뗀 아이 같으며, 내 속의 내 심령 젖뗀 아이 같나이다.

 131:3 이스라엘아! 야훼께 희망을 걸라.

지금부터 영원까지.

 III. 메 시 지

사람은 누구나 범죄하고 그 대가로 하나님께 벌을 받고 심판을 받는다. 그 점에서 사람은 동등하고 차별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고를 겪으며 사는 중에 어떤 사람은 승리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한다. 어떤 사람은 칠전팔기 일어나고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일어나지를 못한다. 이 시인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범죄 했고 하나님의 진노를 샀으며, 그의 채찍을 맞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좌절하고 패망했으며, 어떤 이들은 승리하고 돌아왔다. 이 시인은 그 승리자들 중의 하나이고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써서 천추에 그 글과 사상을 남기고 만인의 귀감이 되어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1. 그는 남들과 다 같이 겪는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그에게 귀의하는 슬기를 가진 자였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눈에 보이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즉 신령한 존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신비한 존재가 있음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은 반대로 영적 존재를 너무 무차별하게 시인하고 무차별하게 아무것에게나 굴복하고 끌려가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의 존재를 계시하셨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어 남달리 참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나님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그의 율례를 어기고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이다. 이방 사람들은 몰라도 선민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조물주 야훼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이 시인은 무엇보다도 야훼 하나님을 부르며 그에게 귀의했다는 점에서 가장 현명하고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을 살려 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고국에 돌아오게 하시고, 이제 다시 성전을 짓고 예배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에게 경배하러 나온 이 시인은 감사를 아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2. 이 시인은 야훼 하나님께 그냥 돌아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마음을 가지고 온 것이다. 하나님은 목석이 아니다. 도덕적 인격의 하나님이시다. 법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불의와 범법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깨닫고 자신의 허물과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나아온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 그런데 이 시인은 과거에 마음이 교만한 자였다. 그는 또 눈이 높고 안하무인이어서 자기밖에는 아무도 안중에 없었다. 그는 마음이 부풀어 사소한 것,평범한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크고 굉장하고 어마어마한 것,괴기한 것, 기상천외한 것들만 좋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물의 하나님, 모든 것을 가치 있게 만드신 분이시다. 모든 것이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어른만 귀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도 귀하다. 이 시인은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제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모든 잘못을 시인하고 자복하면서 나왔다. 어느 누가 허물이 없으리요. 현명한 자는 우선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사람이다.

 3. 이 시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뿐 아니라 결연히 그 잘못들을 되풀이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하나님 앞에 서약한다. 나는 이제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않겠다. 나는 이제 눈이 높고 안하무인격인 건방진자가 되지 않겠다. 나는 분수에도 맞지 않는 큰 것,기이한 것만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참회적 서약을 하고 심기일전 새 출발을 다짐하는 것이다.

 4. 이 시인은 과거의 죄를 고백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신의 심령의 태도와 노선을 설정한다. 일만 악이 마음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리고 심령이 안정을 잃고 꿈틀거리며 삶의 동요를 가져오는 것이기에, 이 시인은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께 다짐한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심령을 책임지고 가라앉히고 조용하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무 근거도 없이 무모하게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인은 이미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나, 혼자서 걸어 갈 때는 언제나 불안하고 만족이 없고 안정이 없었지만, 이제 야훼께 돌아와 그 안에 있으며 경험한 것에 의하면, 능히 하나님 안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젖뗀 아이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심령은 언제나 안정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5. 은 명백하다. 자기 자신을 의뢰하며 세상을 살 것인가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나 지위를 의지하고 살 것인가 허깨비 우상들을 의지하고 살 것인가 지금부터 영원토록 의지하고 바라고 살만한 분은 오직 야훼 하나님뿐이시다. 이것은 이 시인 한 사람만이 간직할 신념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같이 가져야 할 신앙이다. 그래서 이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향하여 호소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귀담아야 할 교훈이요 권면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적어도 이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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