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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장막에 거할 자 (시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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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대단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급전 이야기이다. 100 만원을 20일 꾸는데 이자가 30만원이라 한다. 그런데 꿔주는 사람이 100만원 가지고 와서 이자로 30바나원을 떼고 70만원을 주면서 100만 원을 갚으라는 것이다. 순전히 날도둑이다. 그런데 충격은 그것이 아 니었다. 이자놀이 하는 사람이 대표적인 모교회의 집사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여러가지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많이 들렸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과 거래하는 이들에게 물었다. 우리 교회에 나온 뒤에 신용이 나 상도덕이 좀 나아졌는가 대체로 대답은 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대단히 부끄러웠다. 설교를 어떻게 했길래 내게 일년 이상 신앙을 배우고도 거의 변한 것이 없다는 말인가

이것은 신앙을 행위로 별개 문제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생각해 보 라. 부도덕한 신자들. 그것이 과연 신자일까 부도덕한 그리스도를 상 상할 수나 있는가 물론 사이비 교주들이나 악한 영적 지도자들은 도 덕을 초월해 있는 것처럼 부도덕한다. 안그런척 하면서도 그렇다. 그 러나 신자는 절대로 신앙과 행위가 나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샤마니즘에서는 신앙과 도덕이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우선 제 물 로 신을 매수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다음에는 더 좋은 제물을 드리겠 다는 약속도 그러하다. 어느 사람이 무당의 말을 듣고 자신의 부도덕 함을 뉘우치는 것을 보았던가 절대로 여기에는 회개가 없다. 목욕 재 개하는 것도 신에게 정성을 보이려는 것뿐이지 죄를 뉘우침은 없다.

 기독교이들도 그러하다. 샤먀니즘적으로 이해한 일들이 그러하다. 기 도나 예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한다. 자기 기도하는 내용이 도덕적 인지 아닌지 판단이 없다. 무조건 하나님을 내편으로 삼아 이기려고 한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기도만 이루어지면 된다. 좋은 땅이 있을 때 교회들이 기도해 능력 경쟁으로 차지한다. 기도는 능력 싸움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선악과 관계 가 없는가 무조건 하나님의 백성은 다 이기고 세상 사람들은 망해야 만 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찌 않고 능력에 있다. 이 능력은 무조건 이기고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의의 능력이요 선의 능력 도 포함된다. 하나님처럼 사는 삶에는 의로움과 거룩함이 우선이다.

 절대로 요동치 않고 바위처럼 굳건한 사람은 누구인가언제나 하나님 의 장막에 있는 사람처럼 풍족하며 기쁨으로 노래를 삼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말이다. 시대가 바뀌고 유행도 지나고 어려운 상황이 와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언제나 모든 면에서 안정되어 진 다.

 신자라고 해도 이러한 삶을 사는 이는 많지 않다. 신자에게 약속된 것이 이러한 삶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쪼들리며 어렵게 들 살고 있는가. 삶의 여유는 커녕 늘 불안하고 쫓기고 있으며 항상 피곤하다. 때때로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가하고 불평이 일 어난다.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내게 주신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 리 용이라도 여의주를 사용하지 않으면 커다란 뱀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도 자신의 힘으로 살려면 세상 사람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신 자는 특별한 존재이다. 용만이 여의주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신자 만이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를 받고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에게는 하나님 자녀의 능력이 있다. 이제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자녀의 삶을 누린다. 그러나 그 능 력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리고 안다하더라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 른다면 신자는 더욱 사회에서 지탄받는 존재가 되고 만다. 믿기 전에 는 용납되던 일이라도 믿은 다음에는 어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에기만 사랑을 받는 것이아 니라 세상에서도 존경을 받아야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부터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경탄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서 신자가 되던가 아니면 두려워서 상대를 피하게 되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칭송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언제나 신앙의 고백 뒤에 따라나온다. 만약 행위의 변 화가 없었다면 사람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는가 또한 거짓 선생이나 위선적인 신자들을 어떻게 가리겠는가다름 아닌 행위의 증거를 통해서이다. 앉은뱅이가 나왔다는 증거는 그가 걸어가 는 길 밖에 없다. 신자가 된 증거는 그의 행위가 변했다는 것이다.

 요셉이 위대한 것은 그의 꿈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나탄나 위대한 사 랑 때문이었다. 다윗이 존경을 받은 것은 그의 신앙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너그러운은 마음과 백성을 사랑하는 태도였다. 아무리 신앙을 고 백하고 기도를 많이 해보라. 그러나 세상 사람들처럼 자랑하고 거짓 말하고 저질스런 행위를 한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신자로 여기겠는가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물어서 그 대답을 얻은 것처럼 말한다. 누가 하나님의 장막에 유하며 누가 그 거룩한 산에 머물겠는가 그리고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삶은 영영히 요동하지 않을 것 이라고 선언한다. 평안하기가 반석가튼 사람.아무런 경기를 타지 않는 사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던가

그는 정직하다. 그리고 언제나 정정 당당하다. 그 마음에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자기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 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이 돌보시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이 흐려진다면 다시 옛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분명히 성경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하고 말한다. 새사람은 새로운 방법으로 산다. 그는 진실하게 하나님처럼 사는 것이다. 그러 나 다시 옛 방법으로 산다면 옛 사람으로 머물러 있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이웃을 제치고 눌러야 하고 그들을 속여야 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 혀로 남의 허물을 들쳐내고 비판한다. 남이 잘되는 것을 배아파한다.신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음을 알아야 한다. 그 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의 형제로 생각했다.그래서 그들이 잘되 기를 마음에서 원했다. 그러고도 욕하고 비판할 수 있는가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돈을 벌려고 한다. 그만큼 가난을 느끼기 때 문이다. 가능하면 적은 봉급을 주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고리대금하 는 위치에까지 나가게 된다. 보라.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 사업체가 임 금을 늦게 주고 적게 주는가. 기독교 단체일수록 봉급은 너무도 작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의 믿음을 줄여서 그 수준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장막에 있음을 아는 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약속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지킨다. 하나님의 사람의 첫 발자국은 약속 을 지키는 것이다.하나님이 약속을 어기면 하나님도 아니다.마찬가지 로 신자들은 약속을 생명철머 안다. 특히 지불약속이 그러하다. 시간 약속도 마찬가지이다.지금부터라도 하나님처럼 하라.

 특히 마음에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것은 손해가 있어도 지킨다. 너무 도 정확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 앞에서는 나도 그런다. 그리고 하나 님 섬기는 자를 존대한다. 하나님의 일하는 사람을 잘 대하려고 한다.

교회에서 일하는 사무원을 보라. 그는 내 심부름하는 이가 아니다. 하 나님의 교회의 일꾼이다. 하나님의 집을 지키는 이다.

 일본에서 어떤 전도사가 부임할 때 이야기다. 국회의원이 자기 교회 전도사님이 부인한다고 국회 일을 중단하고 역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그의 가방을 들고 사택에까지 모시고 갔다.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기 에 하나님의 종이 자기보다 어리고 학식이나 경험도 부족하지만 그처 럼 스승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는 저명한 국회의원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행동하면 다 훌륭한 교인이 되는가아니다. 그것이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어야 한다. 문 간에서 신발 정리하면 훌륭한 장 롱니가아니다. 훌륭한 장로가 그 일을 할뿐 아니라 다른 훌륭한 일도 하는 것이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힘이 있음을 믿기에 그러하다.먼저 마음이 새롭게 되어 변화하는 것이 행동보다 앞서야 한다.

 백마디 말로 해서 신자는 될 수 없다. 신자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

행동할 힘도 주어졌다. 단지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 으라고 했다. 이 망므을 새롭게 하는 것이 변화받은 길이다. 하나님 의 말씀으로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고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주신 여유를 가지고 살지 못하는가 믿음이 없다는 증거 이다. 내게 능력이 있는줄 알면서 병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 다. 내게 돈이 많은줄 알면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내게 기쁨과 평 안이 넘치는 줄 알면서도 슬퍼하며 불안과 초조에 떨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지루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는가

내가 신자지만 그만큼 각박하고 악하게 사는 것은 내가 그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로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어찌 밖으로 발휘되지 않고 안에만 머물겠는가 그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다.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아 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처럼 행동한다. 두 사람의 군목이 있었다. 한 사 람은 미남에 프린스톤을 나왔따. 모든 면에서 철저하고 완벽하기에 진 급도 빨랐다.젊은 나이에 벌써 소령이었다. 이제 군대를 마치면 벌써 교단에서 중책을 맡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계급에 제대할 때가 다된 다른 군목이 있었다. 그는 좋은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먼저 번 군목처럼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그 와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무엇 인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호수 같은 눈을 보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었다.

 프린스톤 출신은 설교를 잘했다. 논리적으로 그리고 시대에 잘 맞는 고상한 언어와 학문으로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아직 아무도 믿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른 군목은 달랐다. 그를 마 나는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 도했다. 그는 별로 설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루는 전투가 벌어졌다. 피아간에 모든 총알을 다 쏘아대는데 한 장 병이 한 가운데서 총에 맞아 누워있었다. 늘 예수를 극력히 반대하던 이였다. 늙은 군목은 어느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옷을 벗어서 피 를 쏟고 있는 젊은이 머리 밑에 고여주었다. 그리고 자기 옷을 찢어 서 지혈을 했다.그리고는 말했다. 보게 곧 괜찮을걸세.

 그때 젊은이는 말했다.나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탁 이 있습니다. 목사님을 그렇게 선한 분으로 만드는 그 힘이 무엇입니 까저는 늘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죽기 전에 듣고 싶으니 말씀해 주 십시오. 늙은 군목이 몇 마디 한후, 이 젊은이는 예수를 구주로 영 접하고 기쁘고 평안한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이제 알자. 하나님의 나 라는 말에 있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권능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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