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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푸른 인생5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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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편 23편을 읽을 때에 '나''내가''나의''나를'이라는 말을 강조해서 읽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목자입니다. 그가 '나를'푸른초장 위에 누이십니다. '내'영혼을 소생시킵니다. '내가'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헤매고 다닐 때에도 '나를'안위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잔칫상을 베풀어 주시고 '내'잔이 넘치도록 해주십니다.

여러분!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도 여러분의 목자가 되지 못하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여기 서 있는 목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기쁘고 감사하며 살아도 그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목자가 되지 아니하시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신다라는 말씀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며칠 전 입니다. 새벽 한2시 반경에 잠이 깨어 불을 켜고 책상에 앉아 있는데 이 대구시내 한 복판에서 어디서 들려오는지 소쩍새 울음이 들렸어요. 은은하게 들려오는 그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어린시절도 생각해 보며 웬지 그 소쩍새와 무척 통하는 것 같았지요. 다들 잠들어 있는 깊은 밤에 나와 소쩍새만이 깨어 있다는 것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편 23편은 성경의 소쩍새이며 시편의 소쩍새입니다. 시골에서 사신 분은 알겠지만 이 소쩍새는 밤이 가장 깊을때에 맑고 그윽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새입니다. 때때로 근심과 말할 수 없는 고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소쩍새가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 주고 알아 줄 것같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수난과 한 맺힌 역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과거의 문학작품에 보면 이 소쩍새가 자주 나옵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소쩍새를 나이팅게일이라고 말합니다. 이 나이팅게일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깊은 밤에 노래를 보르는 새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 시편 23편은 마치 소쩍새와 같습니다. 인생의 깊은 밤, 잠을 이룰 수 없는 복잡한 문제가 우리를 둘러싸고, 죽음을 생각해 보기도 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다닐 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시는 성도님들 가운데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보시면 몇번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는 성도들도 계실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연세가 높으신 분들, 이
제 머지않아 마지막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 죽음을 통과해야 할 분들도 계십니다. 이때 시편 23편이 우리에게 노래를 들려 줍니다. 소쩍새와 같이.
실지로 저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음침하고 깊은 골짜기가 많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해로 내려가는 그 골짜기에는 매우 깊고 험한 계곡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험한 곳에서 양떼들이 잘못하여 깊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생명을 잃게 됩니다. 위험한 길을 혼자 걸어 간다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양떼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목자가 함께 있어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편 23편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는 것은 여러분이 인생을 살다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맬 때에 이 말씀이 소쩍새와 같이 여러분의 귓가에 울려서 여러분을 튼튼히 세워주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수 있도록 힘주시는 말씀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혼자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이 시편 23편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지키시고 안위해 주심을 믿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잘 통과하는 은혜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사는 사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라는 것은 지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행로에는 이러한 음산한 골짜기가 많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앞길에 한치의 빛도 출구도 보이지 않는 암담함을 느끼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받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장담했는데 지금 내 인생을 가만히 되돌아 보면 무엇하나 내 마음대로 해놓은 것이 없고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하며 낙담과 좌절속의 깊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맬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실망과 한숨의 언덕을 때로는 넘기도 합니다. 절망의 구렁텅이나 깊은 고독의 밤을 혼자 보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런 골짜기에는 악한 짐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욕망과 탐욕이라는 호랑이가 나타나고, 시기와 분노의 사자가 나타나고, 원수맺는 것과, 분열과 질투의 여우가 따라오며, 술취함과 방탕의 곰이 닥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인생을 나 혼자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5장 2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갖가지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원수맺음과 싸움과 시기, 분내고 당짓고 분열을 조장하고 질투하며 술주정하고 흥청대며 마시는 것들이 따라 온다고 했습니다. 나 혼자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을 때에 이런 것들이 친구가 되기 위하여 따라
오는 것입니다. 잠깐 멈추어 서서 자신이 지금 누구와 함께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 혼자 이 인생의 길을, 인생의 밤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저 소쩍새도 나와 같이 있으며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23편을 썼던 다윗은 참으로 그 인생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많이 지나 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걸코 혼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해 주심을 믿었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많이 지났어도 성경의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많은 노래와 시를 썼던 아름다운 삶의 소유자였
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을때만이 우리 내부에 일어나는 추하고 더러운 것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은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주면 내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하고 일평생 믿고 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어지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하구요.

구약성경에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지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왜입니까 아직 이 육체, 변화되지 않는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존재와 만나게 될 때 그 충격에 견딜 수가 없어 우리는 죽게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발전소에서 발전되는 전기는 수만 볼트가 됩니다. 이 전기는 고압선을 통해서 각지역으로 흐르는데 이 힘은 굉장합니다. 아주 강력한 힘입니다. 그런데 이 수만볼트의 강력한 전기를 전깃줄로 연결해서 우리 가정의 형광등을 사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전구는
순간적으로 터져 버립니다. 그러나 고압선에 흐르는 전력을 변압기를 통하여 철저히 축소시켜 적은 양으로 각 가정의 전력이 배달될 때 우리는 전깃불을 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전구와 같은 작은 우리의 육체로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 내포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본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것 같이 온전히 알리라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 성경을 쓸 당시에는 유리거울이 없었고 구리 거울이었습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거울로 아무리 자
기의 모습을 보려고 해도 병확하게 볼 수 없으며 아무리 안다고 해도 부분적으로 밖에 알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아주 일부분적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에 대해서 믿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아십니다.

찬송가 534장 가사의 후렴을 보면 과거에 요단강가에 섰는데 내 친구 건너가네. 저건너편에 빛난 곳 내 눈에 희미하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믿음 좋은 사람들이 저 건너편의 빛난 곳이 왜 희미하냐 믿음없는 생각이다하여 ...저 건너편에 빛난 곳 내 눈에 확실하다로 바꿨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찬송가를 편집할 때 다시 ..., 내 눈에 히미하다로 바꿨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받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작은 믿음의 눈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믿음의 눈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온저히 아십니다. 언젠가 우리의 육체가 변화되고 우리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질 때 하나님과 그리고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희미하게 밖에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것으로는 모릅니다. 단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은 아브라가의 아들 이삭에게도 약속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에게 약속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중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이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어디서 언제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떠나 가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함께 하시겠습니까 주님은
떠나시는데,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떠나 가시면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를 위하여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주님이 승천 하시고 제자들이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을 때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이란 말의 뜻은 파라클레이토스란 말의 뜻인데 파라라고 하는 말은 우리곁에라는 뜻이고 클레이토스라는 것은 도와주기 위하여 선택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보혜사 성령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도와주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하나님!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하여 우리 곁에 와 계시는 하나님이 성령이십니다. 옛날 영어 성경 번역에 보면 이 보혜사를 영어로 Comforter즉 위로자라고 번역 했습니다. 성령은 공중에 떠다니는 혼이나 귀신이 아닙니다.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옆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사이 대역성경에 보면 이 보혜사를 영어로 Counsellor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성령은 바로 우리 옆에 계시면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상담해 주시는 상담자이십니다. 최근에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에서는 보혜사를 Helper 곧 우리를 도와주는 분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성령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도 성령이 지금 거하고 계십니다. 나 혼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동행해 주십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할 때에 착한 일이나 하고 예배를 잘 드리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실수하고 범죄하고 잘못하고 큰 죄에 빠져 있으면 성령이 나를 떠나 버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믿음 가운데서 살 때나 실수하고 범죄하고 죄 가운데 빠져있을 때나 언제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큰 죄에 빠져있을 때나 언제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큰 죄에 빠져있을 때에도 성령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들이게 해 주십니다. 이 성령을 마음 속에 모시고 이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믿을 때에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며 인생살이의 상담자가 되시며곤경에 빠졌을 때 우리를 건지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을 때에 우리는 그 하나님으로부터 도움받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잘 지나갈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령님과 함께 행했을 때에 성령께서 우리인간의 연약함을 도와 주시며 앞길이 암담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고 낙심할 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신음하면서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에 계속해서 바울은 말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환란이나 곤고가 닥쳐와도, 박해와 굶주림과 헐벗음이 찾아오고 위험과 칼이 우리를 위협해도, 이것들이 우리와 깊이 맺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한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 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그분이 어찌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지 않겠싶습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누가 감히 소송하겠습니까 우리를 의롭다고 선고하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누가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 하겠습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주관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권세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밖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깊이 믿고 있었습니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찌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는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가난하게 만들고 있는 여러가지 것 중의 하나는 자신에 대해서와 마음속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조그만 실수를 해도 자신을 학대하고 저주하며 자신을 조롱하고 욕합니다. 우리가 이런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삶을 부유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향해 부정적인 사고를 할 것이 아니라, 실수하고 죄짓고 때로는 곤두박질하는 나를 위하여서도 예수님께서 죽어 주신,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족하하고 연약하지만 그런 나를 위하여 주님이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시고 그런 나를 위하여 성령이 와 계신다는 것을 믿을 때에 우리는 자신이 참으로 귀한 존재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몇년 전에 이런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불구의 몸으로 외국어 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여학생의 얘기입니다. 4년 줄곧 1등을 했고 졸업도 최우수 졸업자였는데 기자가 당신은 육신이 불구인데 어떻게 4년 동안 그렇게 공부하고, 어떻게 오늘과 같은 승리의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까라고 그 비결을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그 비밀은 내가 몇년 전에 읽고 배웠던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 말씀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는 것인데 그 말씀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고 하고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고 하면 나는 나쁜 놈이다나 같은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런 말을 더이상 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때때로 자신을 나는 죄인중의 괴수다. 나는 만삭되어 나지 못한 존재라고 말했지만 그는 이 질그릇같은 내 속에 보물과 같은 예수님이 와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자기를 긍정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 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이제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와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 이제 이 모두를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한 나를 위하여 주님이 오셨고 죽으셨으며 그런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입니다.

다윗은 자기 앞에 놓여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 보지 아니하고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함께 와 계시는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언제나 바라보았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서도 해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등산을 해보면 좋은 교훈을 받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려면 대부분 등산로는 계곡을 통해서 정상에 이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헤매고 그 계곡을 지나왔습니까 그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통해서, 골짜기를 통해서 여러분의 믿음이 지금 이만큼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골짜기를 통해서 여러분의 믿음이 지금 이만큼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것을 통해서 믿음의 산 정상에 오르게 됩니다. 또한 푸른 풀과 좋은 샘물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해서 고통당하고 역경속에 허덕이지만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거기에 신령한 꿀이 있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물이 그 속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분이 계십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 보시지 마시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히 주리지 않는 생명의 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발견하시고 또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생명의꿀과 생수가 풍부히 숨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서 거기에서 푸른 꿀을 먹고 거기에 흐르는 좋은 샘물을 마셔서 신앙의 높은 산에 올라가는 은혜와 지혜의 계기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제 머지않아 최후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한번 지나갈텐데 이미 죽음을 경험하시고 죽음이 무엇인가를 다 아신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자리에서도 함께 계시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건널 때에 우리의 이 육체를 신령한 몸으로, 영원한 몸으로 변화시켜 영원한 처소로 인도해 주심을 믿을 때, 최후의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
도 우리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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