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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푸른 인생6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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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말씀으로 오늘 여섯 번째로 말씀을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어 주신다하는 말씀과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른다는 말씀과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다고 하는 이 세마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5절 말씀에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어 주신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 잔칫상를 차려 주신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한 권의 책도 쓰시지 않았고 자서전 하나 쓰시지 않으셨으며 자신의 모양이 어떻다는 초상화 한장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한구절도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나 남기는 무덤도 주님은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단 한가지 남기신 것이 있습니다. 성찬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날 밤에 제자들을 데리시고 예루살렘의 어느 조그만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유월절을 축복하시고 성만찬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떡은 내 몸이라 받아 먹어라하시며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내 피니 이 잔을 받아 마시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없지마는 이 일을 계속 행해서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잔칫상을 마련해 주시고 떡을 떼어 주며 잔을 나누어 주신 바로 그 때는 예수께서 가장 많은 원수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던 때인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대제사장들이 모여 음모를 하고,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모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 입을 맞추고 그 댓가로 30냥을 받겠다고 이미 가약을 맺어 놓았으며 본디오 빌라도와 헤롯이 그 주
위에 있었습니다. 망치를 든 군인들, 편견에 사로잡힌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참으로 즐겁고 재미있게 호기심으로 바라 볼 수많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 극적인 밤에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잔칫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를 나눠 주셨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다고 하는 그 말씀을 예수님의 그 최후의 만찬에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원수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언제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목숨을 잃을지 모르고, 언제 예수의 이름으로 감옥에 갇힐지 몰랐으므로 때로는 지하에, 무덤 속에 숨어 있으면서도 모일 때마다 떡을 떼며 포도주를 나누며 잔치를 벌였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가 이 세상의 대적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가 모여서 함께 떡을 떼며 함께 잔을 나누는 잔치를 벌이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가장 귀한 유산인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성찬예식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할 때에 나를 위하여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보면서 내 자신을 되돌아보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찬예식이 이것으로 끝난다면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의미를 절반밖에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난 후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들과 함께 먹고 마실 그 날까지 이제 다시는 포도로 만든 것을 먹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끝마치고 주님 나라에 가게 되며 주님께서 우리 앞에 상을 베푸시고 거기서 주님과 함께 먹을 신령한 떡과 하늘의 포도주를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우리도 그 하늘의 잔칫사에 참여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찬예식에 참여할때에 날 위해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고 말할 수 없이 엄숙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는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먹고 마실 천국 잔치를 미리 앞당겨서 여기서 맛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이 먹고 마시고 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원수로 둘러쌓인 감람산으로 찬송을 부르며 나아가셨음을 봅니다.

양떼들이 이른 새벽부터 들판에 나가 풀을 뜯다 보면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때로는 사나운 이리에게 쫓기게도 되고 가시에 찔리기도하며 모난 돌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다가 보면 크고 작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양떼들은 양우리로 돌아옵니다. 목자는 우리에서서 한마리 한마리의 이름을 불러가며 수를 세면서 양우리로 끌어 들입니다. 할퀴고 찢긴 양이 있으며 그 상처에 기름을 발라줍니다. 혹시 저들이 이리 저리 쫓아 다니다가 제대로 배부르지 못한 양이 있을까 해서 싱싱한 꼴과 시원한 물을 존배해 놓는 것이 목자의 심정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도 많은 원수들이 아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예수를 믿는다고, 신앙생활 한다고 욕하고 비난도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욕하고 예수 믿는 우리를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으며 예수라는 이름만 나오면 마치 원수나 되는 것처럼 법석을
떠는 사람도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택시에 태우면 재수가 없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앞에 바르게 살지 못하고 빛되게 살지 못했다는 증거도 됩니다만 또한 우리의 목전에는 항상 원수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 가는 곳, 일하는 곳에는 어디나 우리의 대적들이, 신앙의 대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원수의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심과 분노와 시기, 자만심, 자기연민, 갖가지 허영과 사치가 우리의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이 원수들은 때때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유혹하다가 안되면 매수하려고 하며 그것도 실패하면 강제로 강탈하는 것이 원수들 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원수들 틈에 있는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엘리야에 대한 기사를 보면 참 의미 깊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이방신상을 섬기게 된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아 선지자 400명과 엘리야 혼자서 대결했습나다. 엘리야는 거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다 멸절시켰습니다. 이미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섬기던 아합왕과 아합의 처 이세벨이 이 소식을 듣고 엘리야를 죽이려고 군대를 풀어 잡으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브엘세바로 도망갔으나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다 죽여 버렸습니다. 엘리야 혼자 남았습니다. 엘리야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움과 공포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뎀나무 그늘 밑에서 자포자기하고 절망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죽고 싶습니다. 지금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옵소서. 지금까지 산 거스로도 넉넉합니다. 저를 죽여 주십시요.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어느덧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들었다는 말은 신앙의 잠, 인생의 잠, 세상의 깊은 잠이 들었다는 말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원수들 틈에 끼어서 삶을 포기한 엘리야를 위하여 음식상을 차려 놓으셨습니다. 잠든 엘리야는 머리맡에다가 숯불에 구운 떡과 시원한 물을 준비해 놓으시고 엘리야를 깨웠습니다. 엘리야야! 일어나 먹어라! 네가 앞으로 가야할 길이 많다하셨습니다. 엘리야가 깨어보니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는 잔칫사이 자기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올랐습니다.

한 동굴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강한 바람이 지나가고 지진이 지나가고 세찬 불길이 일어 났지만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으나 불길이 지난 후 아주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세미한 소리 가운데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지금까지 생각하기를 아합과 이세벨이
하나님의 제단을 다 헐어버리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다 죽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엘리야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가 너 혼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는 사람이 7,000명이나 남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너와 함께 한 자가 아합과 이세벨과 함께 한 자보다 더 많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마치시고 이 일을 기념하여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갖가지 원수들로 우리가 둘러싸여 있을 때에 이 일을 행하라!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에게 잔치상을
베풀어 놓으셨습니다. 그 잔치상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길 내가 생명의 떡이라!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내 살을 먹지 아니하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한 자는 그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놀라운 잔치상입니다.

성도 여러분!
갖가지 세상의 염려와 근심, 대적, 실패와 삶의 원수들이 우리 주위를 에워싸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일을 행하라!뭡니까 예수님의 살을 먹고 마시라는 말이에요. 세상의 여러 가지 원수들로 인해 사면초가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찬송가 202장의 가사 가운데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시험을 이기는 승리도 보혈의 능력,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는 것도 보혈의 능력, 육체의 정욕을 이길 수 있는 힘도 보혈의 능력, 우리의 죄를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도 보혈의 능력, 부정한 것을 맑게 하는 것도 보혈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원수들 앞에서
승리하도록 예수의 십자가로 상을 베풀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많은 원수들 앞에서도 주님의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을 먹고 마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앞세우고 찬송을 부르면서 감람산으로, 원수들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도록 하는 위협과 협박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때 우리를 위해 차려 놓으신 주님의 살과주님의 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고 원수들이 수없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기에도 주님이 현존하고 계신다는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노래를 부르며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23편 마지막절 상반절에 보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만약'이라는 말을 좋아 합니다. '혹시'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약''혹시''어쩌면'이라는 말을 어느 한 군데서도 쓰고 있지 않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른다. 기필코 나를 뒤따라 다닌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보다는 자기의 의심을 더 사랑하고 믿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자기에게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고백하진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것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잘 믿으면 80살까지 평온하게 잘살 것이다. 나를 잘 믿으면 잠자듯이 평화스럽게 죽을 것이다. 나를 잘 믿으면 부귀영화만 누리고 잘 살 것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한가지도 공개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심한 중병에 걸려죽게 될지도 모르며 가산을 탕진할 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오히려 미래가 친구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이러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내게 무슨 일이 닥치든지 이 모든 일이 합력하여 내게는 선을 이룬다고 그는 믿고 고백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것이 합력하여 마침내 선을 이룬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하시든지 나에게 유익되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선한 모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심으로 우리를 때로는 때리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싸매어 주시고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길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내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진정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00세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당치도 않은 것 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 위 제단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나를 어떤 방법으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내게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고 하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귀한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해 놓고는 아브라함 모르게 모리아산 꼭대기에 깨끗하고 흠없는 어린양 한 마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평생을 위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시편 기자와 같이 나의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코 나를 따르리라고 하는 그 확신을 가질 때에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능히 이길 수 있고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이끌리어 일생을 아름답게 마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마지막 절에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는 말씀으로 이 시간 끝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양이 아침에 들판으로 나가서 뜨거운 대낮을 만나기도 하고 시원한 저녁을 만나기도 하며 하루 종일 풀을 뜯다가 저녁이 되어 양우리로 돌아오는 그런 모양을 유추해서 쓴 내용입니다. 시편 기자가 이 시를 쓴 때에는 아직도 내세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23편을 쓴 사람은 자기의 삶이 이 땅에만 국한되어 있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돌아가야 할 때에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일 것
입니다. 집을 잃어버린 자식이 뉘엿뉘엿 해가 지는데도 갈 곳이 없어서 기를 띵방황한다면 그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늦은 밤 모두를 자기의 집으로 돌아 가는 시간에 갈곳 없어 텅빈 거리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불쌍 하겠습니까

죤 하워드 페인이라는 사람은 9년 동안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러던 어느날 저녁때에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다 보면서,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행복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는 불현듯 파리의 자기 하숙집이 매우 쓸쓸하고 적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기 고향 롱아일랜드의 조그만 마을이 떠 올랐고 거기서 지낸 어린시절의 풍치와 추억이 그를 사로 잡았습니다. 그는 즉시 펜을 들어 글을 썼는데 그 글은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곳도 꽃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내 벗 나의 집 뿐이리라는 글이었습니다. 이 가사에다 곡을 붙여서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이 노래를 합창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세상의 유혹과 즐거운 곳에서 오라고 손짓 하여도 진정 우리가 쉴 곳, 내 집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끝날 즈음에 재산이 여기가 더 좋은 곳이라고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자식들이 조금난 더 사십시오하며 우리를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영원히 쉴 곳은 따로 있습니다. 내 나라, 내가 가야할 곳이 따로 있습니다. 길이 쉴 곳, 꽃피고 새 우는 집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거기에는 눈물이 없고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나라입니다. 장막집과 같은 이 육체가
무너지면 새롭고 영원한집! 하나님이 손수 지어주신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을 때에 좀더 아름다운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예! 제가 믿습니다고 하는 이 믿음 속에서만이 우리는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저는 이 시편 23편을 오늘로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저녁예배를 마치고 2부순서로 음악순서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 프로그램 중에는 시편 23편을 낭독하는 순서가 끼어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나와서 아나운서와 같은 좋은 음성으로, 균형잡힌 언변과 극적인 기교로 시편 23편을 아주 멋지게 낭독을 했습니다. 이 젊은이의 낭독이 끝나자 거기 모인 청중은 손뼉을 치고 아멘하며 한번 더 낭독해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젊은이가 나오지 않고 나이 많으신 허약한 노인 한 분이 지팡이에 의지하여 절룩거리면서 나와서는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시편 23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리며 시편 23편을 다 외웠습니다. 이 노인이 낭독을 마치자 청중들은 아무 말도 없이 눈시울을 적시면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듯한 조용함 속에 숙연 했습니다. 이때 처음 낭독했던 젊은이가 나와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나에게 시편 23편을 다시 한번 낭독해 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이 할아버지가 낭독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도 박수도 치지 않고 아멘소리도 못하고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낭독한 것과 이 할아버지가 시편 23편을 낭독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차이를 제가 말씀 드리지요. 저는 시편 23편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만 이 할아버지는 시편 23편 안에 계시는 목자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을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23편안에 있는 목자를 깊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목자를 깊이 안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궁핍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잔이 넘칩니다. 이제 나는 진정한 부자입니다.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신경쇠약에 걸리고 불면증으로 괴로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죄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를 괴로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영혼을 주님께서 소생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기력과 나약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두려워합니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삶을 두려워합니까 죽는 것이 두렵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시 살 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시편 23편 안에 있는 목자 그 분을 의지하시고 그 분의 뒤를 따라,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 일평생 살다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사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을 모시고 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면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이끌려 이 세상을 승리하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안겨 사는 그러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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